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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515화 (515/605)

515화. 진짜

태양이 언덕 위에 살포시 앉았다.

장작불처럼 빨간 노을이 시체와 시체와 시체에 꽂힌 깃발창을 비추었다. 찢겨지고 부러져서 바람조차 품지 못하는 처량한 깃발이 주인을 닮았다. 피 묻은 정적에 기뻐하는 것은 까마귀 부부와 승냥이 형제뿐이었다.

“죽이는 것도 힘들지만, 죽이고 나서도 손이 많이 간다니까.”

저 북쪽 어디에 붉은 곰처럼 생긴 용병이 말했다. 왼팔 밑동이가 조금 짧은데, 그만큼 오른팔이 크고 두꺼워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두면 이 주변 마을에 역병이 돌 텐데. 우리 폐하가 그 꼴은 또 못 보시지.”

“뭘 역병까지야...”

“시체 파먹은 쥐가 새끼치고, 그 새끼가 또 시체 파먹고, 먹을 게 없어지면 무리 지어 마을로 이사 가지. 그럼 어찌될까?”

상대적으로 키 작은 용병이 장황하게 떠벌였다. 주위의 반응은 ‘저거 또 시작이네...’가 대부분이지만, 귀가 얇은 일부와 경험 부족한 신참 일부는 진지하게 납득하고 작업을 서둘렀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는 이쪽으로! 아닌 것은 저쪽으로! 기사였던 것과 기사가 될 뻔했던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 야! 금가락지 챙기지 마! 금니도 빼지 말고!”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물든 용병이 부러진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기사의 물건을 훔치면 좋은 꼴 못 본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 욕심을 주체 못 하거나 ‘나 하나쯤은 모르겠지’하는 희망을 품는 자들이 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바다 건너의 유족들이 무슨 수로 유품을 확인할까.

로벨은 구시렁구시렁거리는 용병들을 지나 태양이 넘어가는 구릉에 올랐다. 모닝스타가 이제 좀 내리면 안 되냐는 듯 칭얼거렸지만 목덜미를 한 번 두드리고 무시했다. 사람도, 짐승도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아직 쉴 수 없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허리를 쭉 펴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굽어보았다. 그림자가 족히 20야드는 드리웠다. 어린 시체를 위해 성호를 긋던 애꾸눈과 상아 장식이 된 단검을 슬쩍하던 발가락이 눈살을 찌푸리고 언덕을 보았다. 황혼의 마법일까, 아니면 살풍경한 풍광 때문일까, 저승의 신이나 죽음의 신처럼 보였다.

용병들은 꺼림칙한 기분에 자리를 피했다. 꺼림칙하지 않아도 존귀한 왕이자 위대한 물주에게 ‘햇살 가리지 말고 비켜주실래요?’ 할 수 없으니 아쉬운 쪽이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이 같지는 않았다. 호수의 요정을 사랑한 버팅거 경처럼, 평생 닿을 수 없는 것을 연모하는 자가 있었다.

기사 하나가 시체를 넘고 피 웅덩이를 지나 언덕에 올라왔다. 커다란 말 그림자가 마주 보았다.

“공왕 폐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벨은 투구를 벗어 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의 시간은 경을 만날 때까지 멈춰있으니, 경은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소.”

어느 소설에서 읽었는지 퍽 낭만적인 대사였다. 시체가 즐비한 전장이 아니면 말이다. 모닝스타가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귀를 까닥였다. 그러나 콩깍지가 고막으로 전이된 호른 경은 감격했다.

“왕의 마음이 곧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왕과 기사가 마주 웃었다. 그것은 평소의 모습이며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다시 말해 1차 북해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잉그비아 왕국 원정군 3천 3백 명 중 800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사흘 이내에 100명쯤 추가될 것이다.

전장에서 도망친 무리는 많지 않았다. 기사들은 승부가 갈리자 명예롭게-그리고 편안하게-항복했고, 몸값 내기가 곤궁한 용병들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검은 성 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고향 가는 길을 모르는 농민병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호른 경이 1천 지원군을 이끌고 뒤를 막자 그 자리에서 투항했다.

전사자와 전사자가 될 중상자를 제외하면 포로만 2천 명이 넘었다. 유라피아 대륙의 유구한 전쟁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로벨의 ‘숨은 패’가 그만큼 결정적이었다.

“몸값을 못 내는 것들은 어찌합니까?”

고대 왕국 시절이면 전부 노예로 삼았겠지만, 옛 신의 교리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지금은 불가능했다. 뱃노예나 계약노예로 부리는 꼼수는 가능하지만, 그것도 한두 명일 때 일이지, 천 단위로 노예를 부리면 옛 신의 사제들이 거품 물고 찾아와 ‘신앙의 형제’를 부르짖을 것이다. 게다가 2천 명이나 되는 노동력을 쓸 곳도 마땅치 않았다.

“중범죄를 저지른 자는 본보기로 처형하고, 그 외에는 손가락 하나 자르고 풀어줘.”

관대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결정이었다. 손가락 하나 없다고 굶어 죽지 않으니 포로들도 순순히 따를 것이다. 제비뽑기에 걸려 목이 잘리는 동료들을 보고 나면 손가락으로 끝난 것에 감사할지도 모른다. 저들 중에 범죄에 동참하지 않은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포로 다음은 포상이었다. 기사가 소집에 응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현실은 냉혹하여 이득이 없으면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전공에 따른 포상은 전후 중대 사안이었다.

“기사들 몸값으로 충분할까요?”

“글쎄...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흔히 ‘기사를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고귀한 양반들의 선민사상 같지만, 사실은 그냥 페닝이었다. 기사는 몸값을 낼 수 있으니 가급적 사로잡는 게 좋았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는 너무 많이 죽었다.

적군 기사가 많이 죽으면 받을 몸값이 줄어들고, 아군 기사가 많이 죽으면 위로금과 포상금이 늘어난다. 수익은 줄고 지출은 많으니 골치가 아팠다. 호른 경이 영리한 기사답게 답을 주었다.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시지요.”

“존 공작이 줄까?”

“포로협상 조건에 전쟁 배상금을 걸면 포로가 된 가문들의 눈치 때문이라도 토해낼 겁니다.”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아, 난 모르는 일이오. 포로가 된 기사들하고 알아서 해결하쇼’ 하고 발 뺄 가능성도 있지만, 섭정이란 불안한 정치기반상 그러지 못할 것이다. 로벨이 호른 경 이하 최측근들을 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요구해야...”

그러자 동시다발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어린 집사와 상의하시지요.”

“어린 집사한테 물어보세요.”

“어린 집사가 알지 않겠습니까?”

“어린 집사가 있잖습니까요!”

역시 볼탄 반도 공국은 어린 집사가 없으면 안 돌아간다.

“공왕 폐하, 볼프 사트로 후작의 전령입니다.”

로벨이 한숨으로 인정할 때, 로벨의 임시막사로 검은 성 기사가 찾아왔다. 해가 지고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라 예의 바른 방문은 아니었다.

“그렇소? 앞장 서시오.”

로벨이 흔쾌히 일어나자 전령이 도리어 놀랐다. ‘내가 후작의 봉신인 줄 아시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오라 하시오!’ 등의 반응을 걱정했다. 하지만 로벨은 볼프 후작을 잘 알았다. 그는 겁쟁이도 게으름뱅이도 아니니 본인이 올 수 있으면 왔을 것이다. 전령을 보낸 것은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있거나, 그곳에 보여줄 무언가가 있어서 일 것이다.

“몬트! 몬트! 과묵한 몬트! 공왕 폐하를 모셔라!”

“저도 따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로벨의 측근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잉그비아 왕국놈들을 처리했으니 우리 사이의 묵은 원한도 잘 처리해 봅시다’일 가능성을 염두하고 무기와 병사를 준비했다. 로벨은 부산떠는 펄프 대장과 호른 경을 말렸다.

“몰래 부른 것은 몰래 할 말이 있어서야. 다 같이 갈 바에 아침에 가지. 그렇지 않소?”

로벨이 검은 성 기사에게 동의를 구하자 뒤늦게 잊은 말을 꺼냈다.

“그, 그렇습니다. 공왕 폐하만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공왕 폐하께서 거절할 리 없지만, 만약 공왕의 아랫사람이 반대하면 이렇게 말하라 했습니다.”

평생의 라이벌이란 그런 걸까, 볼프 후작도 로벨을 잘 알았다. 로벨이 미소 같은 것을 보이자 전령이 용기를 내어 볼프 후작을 따라했다.

“우리의 진짜 적을 사로 잡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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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사트로 후작의 진영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쪽에는 노획한 병장기가 마구잡이로 쌓여있고, 한쪽에는 포로로 잡힌 용병이 뚱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가까운 곳에 무기가 있으니 위험천만한 시도를 하지 않을까 우려되었는데, 장전된 쇠뇌를 가진 검은 성 병사들이 화톳불마다 배치된 것을 보고 안심했다. 어차피 용병이라 페닝 주는 것도 아닌데 목숨 걸지는 않을 것이다.

“부상자가 많군요.”

볼프 후작은 ‘혼자’ 오라고 했지만, 볼탄 반도의 왕이자 최고 지휘관이 혼자 다닐 수 없기에 ‘혼자나 다름없는 최소인원’으로 해석해야 옳았다. 그래서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동행했다.

로벨은 포로에게서 눈을 떼 진료소를 보았다. 수도사로 보이는 민머리 사내들이 붕대와 도끼를 들고 돌아다녔다. 치료에 자주 쓰이는 것은 붕대지만, 시각적으로 강렬한 것은 도끼였다. 화살촉이 뼈를 상하게 하거나 뼈에 박힌 채 분리되면 주저 없이 신체를 잘라냈다. 열독이 올라 미치는 것보다 팔다리 하나 떼어내는 것이 생존확률이 높았다.

“윽...”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끼 사용을 직관할 수 있었다. 부상자의 팔다리를 결박하고, 값싼 와인을 몇 모금 마시게 한 후, 끓는 물에 담갔다 꺼낸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닥터 줄리안의 외과수술을 어깨너머로 봐서 아는데, 한 번에 자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싸구려 와인이 통증을 줄여주지 못했다. 사실 비싼 와인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실력이 있군요. 어설픈 의사는 도끼에 자신이 없어 톱으로 자르는데, 열에 여섯이 쇼크로 죽습니다.”

“기사님, 저 속이 안 좋아요. 그 얘기는 그만하면 안 될까요?”

마녀 키르케가 목을 움츠리고 웅얼거렸다. 로벨도 동의했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무시무시하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로벨을 알아본 검은 성 기사들이 바이저를 올리거나 흉갑을 두드리며 경의를 표시했다. 첫날의 적대적인 시선은 거의 없었다.

“후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볼프 후작의 기사 종자가 말고삐를 잡다가 한번 깨물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안내했다. 지휘막사가 아니었다.

“기사야?”

“예?”

“저쪽 포로들하고 달리 따로 감금한 것 같은데?”

기사 종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횃불을 든 순찰병이 하품하며 지나가고, 코 고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기사가 아니라 마녀입니다.”

마녀 키르케에게 눈길이 간 것은 신앙인의 본능이었다. 마녀가 발을 쾅쾅! 굴렸다.

“전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라고요!”

기사 종자는 얼른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자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자신은 마녀가 아니라 진리탐구회 소속 마법사라고...”

로벨의 손가락이 폼멜에 닿았다. 그림자가 짙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호른 경이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호칭을 정정했다.

“...악마추종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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