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14화 (514/605)

514화. 도박

곡사로 쏠 수 있는 롱보우는 직사로 쏘는 크로스보우보다 100야드 이상 멀리 날아갔다.

물론, 멀리 간다고 잘 맞는 것은 아니라, 사수의 기량, 풍향, 습도 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크로스보우와 비교하면 특히 개인의 기량이 중요했다. 솜씨 좋은 사수는 380야드 밖의 과녁도 맞히지만, 몸이 부실한 사수는 180야드 과녁도 버거웠다.

“잉그비아 롱보우맨...!”

여기서 문제는, 잉그비아 왕국 사수의 평균 기량이 대단히 좋다는 것이다. 300야드 거리에서 활을 높이 세우더니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괭이 소리에 놀란 철새 떼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소나기로 돌변했다. 쇠와 나무로 된 장대비였다. 푸른 땅이 붉은 피로 젖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은 정면으로 날아드는 쿼럴에 비해 임팩트가 작았다. 그러나 피해까지 작지는 않았다. 화살비를 맞은 기사 중 일부는 뇌진탕으로 쓰러졌고, 일부는 속도를 줄여 대열에서 이탈했다. 사람인지 말인지 모르지만 영 안 좋은 곳에 맞은 모양이다. 게다가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롱보우는 1분에 2발 겨우 쏘는 크로스보우와 달랐다. 검은 성 기사들이 150야드에 접어들자 재차 소나기를 뿌렸다. 아니, 이번에는 돌풍이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거의 직사로 날아갔다. 첫 사격만큼 장황하진 않지만 순간적인 저지력을 발휘했다.

“역시 힘들구나.”

로벨은 ‘망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돌격대열에 금이 갔으니 제대로 된 돌파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상대가 멋모르는 야만인이나 겁 많은 농민집단이면 기세로 눌러 도망가게 할 수 있지만, 기사를 상대하는데 익숙한 전쟁 전문 용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저쪽도 정예를 배치했군요.”

“응. 익숙한 깃발이야.”

롱보우를 다루는 솜씨에서 이미 알아봤다. 전원 잉그비아 왕국인으로 이루어진 까마귀 용병단이었다.

검은 성 기사들이 적 좌익과 충돌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후드려 잡았지만, 짐작대로 돌파하진 못했다. 이곳처럼 난전이 되었다.

“공왕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응. 그래서 좋지 않아.”

로벨은 시선을 적 좌익에서 아군 중앙으로 옮겼다. 기사들과 달리 느릿느릿 이동하는 2천 5백 명의 경보병 부대였다.

숫자만 보면 양쪽 날개를 합친 것보다 많지만 대부분이 농민병이라 전투의지가 떨어졌다. 조잡한 창과 창 대용품을 꼬나들고 전진하는데, 기사들의 웅장한 돌격을 본 직후라 게으른 양떼 같았다. 그래도 저들이 군대의 핵심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몸통이고 심장이었다.

“우아악-!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이놈아! 언제 적 기사 나리냐!”

“아, 좀! 공왕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로벨은 관심을 다시 돌렸다. 외팔이 더치와 싸움개 닥스가 악을 쓰고 있었다. 혼란을 수습한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이 삼삼오오 뭉치더니 덩치를 키워갔다. 후방을 경계하지 않고 정면으로 싸우는 기사는 무시무시했다. 일당백까지는 아니어도 일당십은 해냈다. 역시 기사는 기사였다.

“과묵한 몬트, 준비해.”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으며 기마 용병대에게 명령했다. 로벨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옛날식으로 ‘랜스’라 불리지만, 편제가 오직 기마병뿐이었다. 겁쟁이 데비의 포병대를 제외하면 가장 비싸고 가장 우수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전원 준비됐습니다.”

“좋아. 가자.”

모닝스타의 고삐를 위로 당겼다가 아래로 때렸다. 주인을 닮은 멋진 갈기를 흔들고 앞발을 떼었다. 세 걸음은 평보로, 두 걸음은 속보로, 한 걸음은 구보로, 그리고 삽시간에 습보로 내달렸다. 펄프 대장이 목청껏 비키라 소리쳤지만, 그래도 정신이 없어 앞을 가로막은 용병은 알아서 뛰어넘었다.

“히리야앗!”

크게 심호흡 한 번 하자 전선에 도달했다. 첫 번째 상대는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 플레일을 들고 힘자랑하는 기사였다. 부연하자면 로벨이 아니라 모닝스타의 상대였다. 아론다이트를 휘두를 겨늘 없이 모닝스타가 몸으로 치고 지나갔다. 로벨의 무게와 질주속도를 생각하면 대로에서 마차에 치인 것보다 안 좋았다. 이름 모를 잉그비아 왕국 기사는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공왕 폐하를 따르자!”

“이럇! 이랴앗!”

로벨에 비하면 과묵한 몬트 등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중장 기병대는 위풍당당했다. 기사들은 새롭게 등장한 정예 부대에 질색했다. 말 없이 말을 탄 용병을 상대하는 수치심도 있었다.

창, 칼, 도끼, 망치, 몽둥이 등등 물리력을 극대화한 도구가 상하좌우로 휘둘러지고, 그때마다 진득한 핏물이 따라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얀 갑옷을 입고 하얀 말을 탄 채 하얀 칼을 휘두르는 로벨이었다.

“저자가 볼탄 반도의 왕이다!”

“로벨 로드릭 공왕이다!”

체스에서도 킹을 잡으면 이기는 법이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로벨을 잡기 위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그러나 로벨은 킹인 동시에 퀸이고,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나이트였다. 로벨은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해 가까이 오는 기사를 찌르고, 때리고, 짓밟았다. 대포알도 튕겨낼 틸트 아머(Tilt Armor:마상시합용 갑옷. 상체가 특히 두껍다)를 입은 기사가 온 몸을 던져 달라붙었지만 산양처럼 좌우로 뛰며 회피했다.

“무슨 놈의 말이 옆으로 뛰어엇-!”

모닝스타가 ‘그럴 수도 있지!’ 표정으로 잇몸을 뒤집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역수로 뽑아 빈약한 오른쪽 어깨에 찔러 넣었다. 억울해하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걸음을 떼면 흙보다 시체가 많이 밟혔다. 바닥에 뿌려진 피를 모으면 우물 하나를 메우고 남을 것이다. 칼 맞은 사람은 진즉에 쓰러졌고, 칼침 놓던 사람도 지쳐서 주저앉았다. ‘이쯤 했으면 후퇴해도 되잖아?’ 생각조차 기운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누가 업어주지 않으면 100야드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로벨은 핏물 때문에 자꾸 빠지는 아론다이트를 고쳐 잡고 다른 곳을 보았다. 우익과 중앙도 비슷비슷했다.

펄프 대장이 투구를 벗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다시 눌러 썼다. 세월에 질려 하얗게 변한 머리가 다시 빨개졌다. 그런데 옛날만큼 좋지 않았다.

“그거, 그거 꺼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거?”

“숨겨 둔 패 말입니다. 지금 안 까면 언제 까려고 합니까?”

로벨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고백할 때가 되었다.

“사실 그거, 나한테 없어.”

“그건 또 무슨... 으이잇! 저리 꺼져!”

창에 찔려서 쓰러진 기사 종자가 무슨 헛것을 봤는지 어그적어그적 일어나 다가왔다. 펄프 대장은 이빨 나간 숏소드를 집어던졌다. 반세기 가까운 용병생활에도 투검술(?)은 배운 적 없기에 엉뚱한 손잡이가 머리통을 때렸다. 그래도 극심한 출혈을 일으킨 기사 종자에게 충분한 타격이었다. 발라당 자빠져서 일어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은 ‘에잇, 기분이다. 그냥 가지쇼’ 중얼거리고 부러진 숏 스피어를 주워 지팡이처럼 짚었다. 로벨은 충직한 가신이 예민한 것을 보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여기 우리 군사가 몇 명이지?”

“저희 용병단 말씀이니까? 아니면 연합군까지 합쳐서 말씀입니까?”

“내 이름을 딴 군대 말이야.”

펄프 대장은 허리를 조금 펴고 기억을 만지작거렸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까마득했다. 로벨이 이끄는 울프 용병단과 로벨 휘하의 봉신 군대가 3천 8백 명이었다. 싸우지 못하는 늙은 하인과 종자조차 되지 못한 코흘리개 시동이 포함된 숫자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늑대성에서 출발한 군사는 총 4천 8백 명이었다.

“호른 나으리...?”

“그래. 맞아.”

검은 성에서 진작 합류했어야 했다. 설령 검은 성에 오지 못했어도, 로벨과 볼프 후작이 계속 남하했으니 어딘가에서 합류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소식이라도 전해졌어야 했다.

“어... 설마? 설마 부대가 넷이었습니까?”

로벨은 주위의 눈을 보았다. 과묵한 몬트가 한쪽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가왔다. ‘조랑말’의 걸음도 어딘가 불편했다.

펄프 대장은 로벨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잉그비아 왕국군을 추격하면서 수시로 ‘정찰’ 나간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벌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마 용병의 역할을 새삼 자각했다.

“호른 경에게 잔존 병력을 이끌고 펠트 성에 집결하라 명령했어. 우리보다 먼저 와 자리 잡았을 거야.”

로벨의 말을 이해하는 순서대로 표정이 밝아졌다. 펄프 대장이 부러진 창을 제대로 잡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보입니까? 정말 여기 있는 것 맞습니까?”

로벨은 잠시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박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그게 그럼 그러니까...”

“처음부터 패를 보이면 큰돈을 못 따. 그렇지? 판돈이 올랐을 때, 가능하면 상대가 올인했을 때 진짜 패를 꺼내야지.”

펄프 대장은 언제부터 그렇게 도박을 잘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쟁이 목숨을 판돈으로 목숨을 가져가는 도박이라면, 로벨은 최고의 갬블러였다. 지금껏 잃은 적이 없으니까.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펄프 대장이 입술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폐를 쥐어짜는 용병이 있었다.

“적의 지원군이다!”

소름이 쫘악- 돋았다. 잉그비아 왕국군 배후에서 깃발이 올랐다. 구릉을 넘어온 탓에 흡사 땅속에서 솟아난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펄프 대장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소리쳤다.

“야, 이 멍청아! 이 땅이 누구의 땅이냐?!”

“어, 어어? 대장?”

“이 땅은 우리 공왕 폐하의 땅이다! 무적무패 왕의 땅이다! 저 개 잡놈들의 땅은 북쪽 바다 너머에 있고! 이 아래 땅은 전부 우리 왕의 땅이다!”

펄프 대장의 악이 다른 소리를 모두 집어삼켰다. 심지어 칼질하던 잉그비아 왕국 기사까지 쳐다보았다. 용병대장 노릇하면서 목청을 키운 보람이 있었다.

“그럼 저 군대가 누구의 군대겠냐! 옹이구멍 같은 눈을 크게 뜨고 봐라! 저 깃발이 무엇이냐!”

거리가 멀어서 깃발 문양까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보여도 기사 가문 문장을 다 아는 게 아니라 태반이 낯설 것이다. 그럼에도 분위기를 타서 대뜸 소리쳤다.

“로벨 로드릭 군이다!”

“아군이야! 어엇! 우리 편이야!”

이렇게 외쳐놓고 적군이면 대단히 머쓱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먼 남쪽 땅에 추가적인 잉그비아 왕국군이 있을 리 없었다. 더욱이 이곳은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의 영토였다.

구릉 위로 계속해서 군대가 나타났다. 세 자릿수를 일찌감치 넘어서 어느덧 네 자릿수가 되었다.

“내가 도박이라고 했잖아.”

로벨이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직이 속삭였다.

“사실 호른 경이 제때 올지 확신하지 못했거든. 그런 의미로 도박이기도 해.”

그래도 로벨은 타고난 갬블러였다. 승부수가 적중했다. 호른 경이 창을 세우자 1천 명의 군사가 기진맥진한 잉그비아 왕국군을 향해 진군했다. 승리가 손끝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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