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4화 (504/605)

504화. 무기

하늘은 높고 바람은 쌀쌀하니 마침내 추수제가 시작되었다. 가을 수확을 축하하고 겨울나기를 기원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축제였다.

“그것은 핑계요. 실은 추수한 곡식을 세금으로 빼앗긴 농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함이오. 수백 년간 대를 이어 땅을 다스려온 선조들의 지혜지.”

세상사에 부정적이고 인간관계에 냉소적인 기사가 잔뜩 취했다. 그 증거로 같은 말을 일곱 번째 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기사들은 혹여 공왕 폐하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되어 필사의 ‘남인 척’을 시전했다. 매사 부정적인 사람이 인기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공왕 폐하의 진노’ 같은 것은 기우였다. 추수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취언에 화를 낼 만큼 속이 좁지도 않으며, 연회장 구석의 일개 기사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국가 간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참아주었는데, 북방항로 이용료? 이용료라고요? 바닷길에 주인이 어디 있나요?”

어린 집사에게 떠넘긴, 아니, 협상을 맡긴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다. 술기운에도 조목조목 잘만 따졌다. 그러나 잉그비아 왕국을 대표하는 대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북해무역협정은 포비아 왕국의 공작과 맺은 것이지 독립된 볼탄 반도 공국과 맺은 것이 아니오. 따라서 기존 협정은 무효가 되며, 주권을 가진 ‘로벨 로드릭 공왕’과 새로이 맺는 것이 옳소. 북해안 도시의 관세협정이 그것이오.”

로벨이 술잔을 기울이다 ‘오!’ 소리를 내었다.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어린 집사는 의자 등받이를 소리 없이 강타한 후 반박했다.

“그것은 로드릭 가문과 에드워드 전하가 맺은 협정이죠!”

“그렇다면 더욱이 협상하는 게 옳지 않소? 흑태자 전하가 아니 계시니 말이오.”

창칼로 싸우는 것만 싸움이 아니었다. 세 치 혀가 수만 명의 생계를 좌우할 수 있었다. 어린 집사가 조금 밀리자 호른 경이 얼른 지원했다.

“공왕 폐하의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요. 공적인 대화는 공적인 자리에서 따로 하는 게 좋을 듯하오.”

잉그비아 왕국 대사가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러나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적진에 들어온 만큼 온갖 변수를 각오하고 있었다.

‘늑대성의 귀재와 자작나무 숲의 패트릭 호른 경... 무적무패 왕의 최측근이자 공국의 실세라 했지.’

그런 탓에 꽤 정확한 정보도 가져왔다. 저 두 사람 몰래 공왕을 구워삶았어야 했는데, 퍽 아쉬웠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고용한 악사들이 새로 연주를 시작했다. 연인들을 위한 서정곡이었...는데, 로벨을 흠모하는 ‘기사다운’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빵쪼가리와 뼈다귀가 거세게 날아들어 취소했다. 악사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의논했다. 샘 포클 왕의 서사곡은 변형곡과 변형의 변형곡까지 써먹어 남는 게 없었다. 세 번쯤 반복해도 먹귀가 많은 기사들은 좋아하겠지만, 전문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적무패 왕의 서사곡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 아직 미완성인데...”

에르나 왕국 영웅이나 잉그비아 왕국 전설은 좋아하지 않을 테고, 서정곡과 무곡을 빼면 딱히 연주할 게 없었다. 걱정 어린 눈빛이 오간 뒤 악장이 말했다.

“볼탄 반도의 위대한 왕이자 패배를 모르는 전설적인 기사, 로벨 로드릭 폐하의 업적을 찬양하는 곡입니다.”

연회의 조연, 아니, 조연도 아니고 배경 내지 사물 정도로 여겨지는 악단이 집중 받았다. 그것은 무서우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징- 지징- 지르릉-

비엘(Vielle), 레벡(Rebec), 트롬바 마리나(Tromba marina) 3종 현악기로 ‘무적무패 왕의 일대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준비 중인 가사가 있지만 연회 특성상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고요함, 차분함, 경건함... 외딴 수도원에 몸을 의탁하는 꼬마 로벨의 모습이 그려졌다. 옛 찬송가 느낌도 조금 있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이 지나자 갑자기 봄바르드(Bombarde)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벼락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 로드릭 가문에 재앙이 찾아왔다. 닭다리 뜯던 늙은 기사가 깜짝 놀라 고기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점점 템포가 빨라졌다. 현악기의 비중이 줄어들며 플루트(Flute)와 숌(Shawm)이 경쾌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로벨이 마상시합과 자잘한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시기였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병사들의 만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굵직한 사건을 암시할 때마다 심벌즈가 커다란 종소리를 내었다. 어깨가 절로 움직일 만큼 경쾌했다. 흥이 많은 기사들은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며 호응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리듬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봄바르드가 등장해 부이진(Buisine)과 함께 무게를 더했다. 뒤로 물러나 배경이 되어주던 3종 현악기도 다시 소리를 높였다. 볼탄 반도의 주인으로 품격이 있었다. 사실 고증오류고 역사왜곡이지만, 지금은 태클 거는 사람이 없었다.

초반의 경건함과 다른, 무게감 있는 연주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손을 놓은 것처럼 딱 끝났다. 일반적인 서사곡이면 천천히 소리를 줄여 영면을 표현하겠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업적을 쌓아가는 왕이니 절정에서 끝내는 것이 맞았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음악의 음도 모르는 기사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연주 자체가 훌륭하기도 했지만, 로벨의 곁에서 영광을 함께한 기사들이라 남의 음악 같지 않았다.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격하게 반응하는 기사도 일부 있었다.

‘으으음... 과시하는 건가...?’

다른 의미로 격해진 사람도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 대사는 ‘로벨 로드릭 왕’과 ‘무적무패 왕’을 연호하는 기사들을 보며 홀로 심각했다.

로벨은 몇몇 측근한테만 충성 받는 게 아니었다. 기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며 시민과 농민의 존경을 사고 있으니 볼탄 반도 공국은 쉬운 적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거금으로 준비한 연회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

추수제 이튿날도 별거 없었다.

술만 먹기 심심한 기사들이 호기를 부려 칼을 뽑았고, 로벨의 묵인하에 잉그비아 왕국 기사, 네일 공국 기사 등과 가벼운 검술시합을 벌인 것이 전부였다.

“저 작자는 누구요?”

“잉그비아 왕국 사절 중 한 명이오. 무슨 작가라 하던데?”

“작가? 학자가 아니라?”

“응? 그게 다른 것이었소?”

가까이 가서 정중히 물으면 ‘린딘 시티의 <유서 깊은 기록물 관리자의 학구적인 린딘 시티 청년 모임> 소속의 연대기 작가’란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지만, 깃펜과 잉크에 원초적인 공포가 있는 기사들은 혹여나 별자리의 신비나 인문학의 위대함을 토론하게 될까 봐 접근하지 않았다. 기사가 가진 일반적인 학자 이미지가 그러했다. 학자가 가진 기사 이미지는 맨날 술 먹고 툭하면 칼 뽑는 것이니 억울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사절 일행의 정체를 듣고 우려를 표시했다.

“연대기 작가가 있다고요? 이런, 여기서 패하면 수십 년간 조롱거리가 되겠는데요?”

“뭐? 그럼 안 되지!”

“우리가 안 될 것은 없고요. 패배한 기사가 안 됐죠.”

로벨은 가만히 듣고 납득했다. ‘볼탄 반도 기사의 명예’ 운운하기에 개인주의 성향이 너무 강했다.

왕도 있고, 대사도 있고, 여러 나라에서 온 기사와 저명한 학자도 있었다. 승리를 바칠 공주와 흠모할 레이디가 없는 것이 흠이지만, 술 한 잔 마시고 경쾌하게 칼과 발을 놀리니 금방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야닉 가문의 장남 닐스 야닉이오. 잉그비아 왕국 기사의 솜씨 좀 보여주겠소?”

“해리 가문의 차남 올리버 해리라 하오. 관람료가 꽤 비쌀지도 모르오.”

잉그비아 왕국인 다운 경고에 짧은 야유가 흘렀다. 그러나 장난기는 금방 사라졌다. 볼탄 반도 공국으로 독립했다고 하지만 기본 정신은 포비아 왕국 시절 그대로였고, 포비아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은 30년 동안 함께 산 남매보다 자주 으르렁거리는 원수였다. 지금은 웃고 떠들지만 내년이면 어느 한쪽이 선전포고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종의 모의전이군.”

“전초전이라 합시다.”

양쪽 모두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유리한 것은 볼탄 반도의 기사 야닉 경이었다. 실수로 상대방의 멱을 따도 왕의 기사라 뭐라 할 사람이 없지만, 적진에 들어와 있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 해리 경은 몰매를 당할 수 있었다. 대놓고 우르르 달려들진 않겠으나 복수를 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결을 강요받을 것이다. 본인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 챙겨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로벨은 흥미진진했다.

“옛날 생각나네.”

로벨도 어느덧 ‘나 때는 말이야’를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어린 집사가 잠시 혐오스럽게 보았다. 그러나 혐오하기에 너무 사랑스러운 주인이었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호른 경이 슬쩍 붙으며 물었다. 어린 집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사랑스러운 주인을 탐내는 기사가 몹시 못마땅했다.

“야닉 경이 이길 것이오.”

“저 두 사람의 실력이 보이십니까?”

“경이 물어봐서 그냥 찍은 거요.”

헤픈 웃음이 머물다 떠났다. 어린 집사가 눈썹 끝이 정수리까지 올라갔다. 그때, 검술대결이 시작됐다.

선공을 가한 것은 입지가 유리한 야닉 경이었다. 과감하게 상단 베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절 호위로 선발된 해리 경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정치파벌과 가문의 입김이 적용했다 해도 기본 실력이 안 되는데 적국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칼을 마주 휘둘러 공격을 쳐내고 한 걸음 다가가 손잡이와 몸통으로 야닉 경을 밀어냈다.

‘몸통 박치기’라 하면 우습지만, 실제로 당하는 쪽은 웃지 못했다. 최소 160파운드 덩치가 쇳덩이를 끼고 부딪치는데 웃음이 나오면 인간이 아니라 곰일 것이다. 야닉 경은 발라당 넘어졌다가 재빨리 뒤로 굴러 일어났다.

“우- 우우-”

기사들이 야유로 동료를 격려했다. 힘이 되는 듯 귓불까지 뜨거워졌다. 해리 경은 롱소드를 오른손 왼손 번갈아 옮기다가 다시 두 손으로 쥐고 중단세를 잡았다.

“계속해 봅시다.”

그 뒤에도 비슷했다. 굳이 평하자면 1대 1.2 정도로 해리 경이 약간 우세했다. 처음에는 불안한 낯빛을 보이던 잉그비아 왕국 대사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푸근하게 말했다.

“무적무패 왕께서도 패배할 때가 있군요.”

어린 집사가 발끈했다.

“아직 승부 안 났어요! 그리고 우리 폐하가 패한 게 아니죠!”

“도박도 승부 아니오. 공왕께서 고른 쪽이 지는 듯하오만?”

누가 말한 대로 전초전이었다. 이 작은 승리를 등에 업고 협상을 시도할 듯했다. 로벨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허리에서 흐룬팅을 뽑았다. 지금껏 표정 관리를 잘해온 대사가 사색이 되었다.

“도박이 승부면, 대련은 전쟁이오?”

로벨은 대사를 베거나 찌르지 않았다.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흐룬팅을 야닉 경 앞으로 던졌다. 짤막한 칼날이 두 바퀴 반을 회전한 후 메인 홀 바닥에 푹- 꽂혔다.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을 꺾은 ‘전설’이었다.

“전쟁에서 좋은 무기를 쓰는 것은 당연하지.”

야닉 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반대쪽은 굳이 묘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