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3화 (503/605)

503화. 사치

대장간이 투탕투탕 불꽃을 피우고, 대낫이 쓰삭쓰삭 풀밭을 헤집고, 물레방아가 쿵덕쿵덕 소란을 떨고 나니 어느새 가을 추수가 끝났다.

“연자방아가 생각보다 쓸모 많아요. 겨울까지 놀고먹을 가축을 적당히 부릴 수도 있고요.”

가축들의 의견은 다르겠지만, 늑대성에 탄원서를 넣지는 않을 테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여름이 평년보다 가물었던 탓인지, 아니면 몬스터와 싸우느라 방치한 탓인지 수확량이 작년과 재작년보다 못했다. 욕심이 많거나 잔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기대보다 적은 소출에 근심했지만, 대부분은 고된 한해 농사가 끝났다는데 기쁨을 가졌다. 농사 외에 먹고살 것이 없던 10년 전 로드릭 마을이 아니었다.

“내년에 먹을 빵보다 내일 먹을 고기가 먼저 생각나는 거죠.”

“내일? 아, 추수제 말이구나.”

진짜 내일은 아니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로벨이 아련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세월이 참 빨라. 작년 추수제가 엊그제 같은데...”

“엊그제는 아니지만, 얼마 안 된 거 같죠. 한 63일 정도?”

“뭔가 구체적인데?”

작년 추수제는 볼탄 반도 기사들만 초대했지만, 올해 추수제는 잉그비아 왕국 대사를 비롯해 외국 기사, 상인, 학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그래서 준비할 것이 훨씬 많았다.

“요즘은 그 말을 잘 안 하네?”

“무슨 말이요?”

“먹고 죽으래도 페닝이 없어요!”

로벨이 어린 시절 어린 집사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남자(?)치고 고음이라 변성기 전 목소리가 그럴듯했다. 어린 집사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때는 진짜 가난했잖아요. 지금은 뭐,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래도 잔치 한 번 할 정도는 돼요.”

약한 척, 겸손한 척하는 거짓말이었다. 본의 아니게 나흘 동안 실무를 보고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어린 집사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이고, 하나는 그 덕분에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여유 자금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사실 로벨 덕도 있는데, 왕이 되어서도 통 사치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잡담을 하면서도 몇 가지 서류를 처리해서 페리 행정관에게 주었다. 페리 행정관은 숫자와 품목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 쓰일 식자재와 부속 기재 비용이 1로닝까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수다를 떨면서도 일 처리가 깔끔했다.

“우리 홀은 작아서 연병장까지 연회석으로 사용할 거예요. 정원으로 꾸미면 좋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니까 허수아비랑 과녁만 치우고 천으로 대충 덮어요.”

“천? 꼭 그래야 해?”

“그 정도는 해야죠. 이건 연회 참석할 볼탄 반도 기사 명단이고, 이건 인상 좋고 덩치 좋은 용병 명단이에요. 연회기간 중에 늑대성 경비는 이 용병들한테 맡겨요. 무기랑 갑옷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으라 하고요.”

로벨은 떨떠름하게 일거리를 받았다. 입장이 바뀐 거 같은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당장 할 필요는 없어 보이니 치워두고 수다를 이어갔다.

“이렇게 하면 리처드 2세가 마음을 고쳐먹을까?”

“리처드 2세 왕은 아직 어려요. 존 곤트 공작이 마음을 고쳐먹어야죠.”

“어느 쪽이든.”

“솔직히 말하면, 아니요. 고작 파티에서 폼 잡은 걸로 ‘어이구! 무서워라! 쟤네 건드리면 안 되겠네!’ 할 리 없잖아요. 더욱이 볼탄 반도 기준에서 화려한 거지, 에르나 왕국이나 잉그비아 왕국 궁정 귀족한테는 평범하거나 조촐한 연회일 텐데요. 도적 잡은 승전연회라 망정이지, 더 큰 연회였으면 부끄러울 뻔했어요.”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잖아...”

“어쨌든! 너무 큰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잠재적 적국에게 무시 받지 않을 노력이라 생각하세요.”

로벨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일차원적인 기사에게 그런 노력은 즐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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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에서 손님 맞은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동안, 성 아래 로드릭 시티도 추수제 준비가 시작되었다.

머리가 조금 굵었거나 굵은 체하는 사내들은 ‘매년 하는 축제인데 왜 호들갑이야?’하고 철든 척 쿨한 척 하지만, 평소 마음에 둔 이웃 처녀를 볼 때마다 망상 가득한 축제 계획을 새로 세웠다.

옛날을 추억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먹을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고 사람까지 많은 추수제가 아직도 어색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회상으로 아들, 손자, 손자 친구들을 슬금슬금 도망가게 만들 뿐, 감개무량한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추수제 전후로 가장 바쁘고 가장 신난 것은 상인들이었다. 시내에 창고를 여러 개 가진 거상들은 늑대성에 납품할 각종 식자재 입찰을 따내느라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였고, 짐마차 하나 겨우 굴리는 소상인들도 추수제 기간에만 허락되는 노점 자리를 차지하느라 온갖 술수를 부렸다. 그래서 늑대성 출입하는 사람들은 조금 난감했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리암 수사, 페리 행정관, 심지어 그람 형제 수준만 되어도 특특급 로비 대상이었다. 그러한 ‘거물’까지 손이 닿지 않는 상인들은 늑대성에서 근무하는 용병, 하인, 마구간지기까지 찾아가 넌지시 정보를 캐내었다. ‘자칭’ 공왕 폐하의 전우와 ‘자칭’ 어린 집사의 은사가 두 자릿수로 나타나는 시기였다.

“동문쪽 9번 거리요? 거긴 동네 아이들도 안 다니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무슨 장사를 합니까?”

“아이고, 나으리, 나으리, 그러지 말고 힘 좀 써주세요. 그람 형제분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 사기였다. 늑대성은 친분이나 인맥으로 편의를 봐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청렴결백한 탓이라기보다 친구가 딱히 없었다.

“나한테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한데, 저게 뭐 하는 거야?”

추수제 준비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이실직고 말하면 어린 집사의 잔소리가 무서워 지미와 루시의 여관으로 도망 나온 로벨은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았다. 함께 도망 나온 펄프 대장이 웃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이맘때 흔한 일입니다. 그냥 두시지요.”

“어린 집사가 알면 손모가지를 자를 텐데?”

“...라고 협박하겠지만, 진짜 자르지는 않을 겁니다.”

로벨이 활짝 웃었다.

“하긴, 우리 집사가 겉보기보다 좀 착해.”

“그게 아니라 외국 대사가 오니까요. 아니었으면 진짜 잘랐을 겁니다.”

로벨은 고급 와인과 은화 자루를 상납받는 사기꾼을 보고 갈등했다. 이런 일까지 개입해야 되나 싶었다.

펄프 대장이 리암 수사표 맥주를 주문하고 바로 받아왔다. 로벨의 정체를 아는 여관주인 지미는 혹여나 술 취한 잡것들이 실수할까 전전긍긍했다. 축제 전날에 피로 범벅이 되면 손해가 막심했다. 물론, 잡것의 피였다.

“공무가 많아 바쁘시다 들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관주인 지미의 걱정이 아주 틀리진 않았다. 술 취하진 않았지만 잡것이 꼬였다. 연령과 연륜을 구분할 필요 없는 외길 인생 펄프 대장이 의자에서 한 발을 빼고 칼집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잠행이란 것을 알면서 접근하는 인간은 멍청하거나 적대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칼이 필요했다. 그런데 칼은 저쪽이 많았다.

“경계하지 마시오, 용병대장. 공왕의 집 앞에서 공왕을 해칠 만큼 용감하지 못하오.”

로벨뿐만 아니라 펄프 대장까지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로벨은 맥주잔을 비우고 몸을 돌렸다. 오른손이 자연스레 칼자루를 쥐었다.

“억양이 독특한데... 잉그비아 왕국인이오?”

전부 알고 묻는 것이었다. 두 칼잡이가 칼을 잡자 ‘잉그비아 왕국인’의 경호원들도 굳은 얼굴로 칼을 쥐었다. 소란스러운 여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흡사 폭풍의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실제로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리처드 2세 폐하를 모시는 조지 윌리엄 남작입니다. 볼탄 반도의 대사로 왔습니다.”

“로벨 로드릭이오. 볼탄 반도의 공왕이지.”

로벨은 잉그비아 왕국의 대사를 유심히 살폈다. 기사라 자칭하지만 가냘픈 어깨에 툭 튀어나온 아랫배가 배부른 상인 내지 부패한 사제 같았다. 그러나 속내를 감춘 표정과 당당한 몸짓이 조상 덕을 보는 불민한 후손이 아니었다. 로벨이 칼을 쥐었는데 겁먹지 않은 것만도 일국의 대사 자격이 있었다.

“지미, 여기 맥주 한 잔. 아니, 네 잔 가져다줘.”

로벨의 정체를 아는 손님과 모르는 손님이 나눠졌다. 전자는 혹시나 로벨이 위험할까 잉그비아 왕국 대사 일행을 포위했고, 후자는 싸움에 휘말릴까 슬금슬금 여관을 벗어났다. 겁쟁이라 도망갔다는 것보다 누군지 몰라 도망갔다는 게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래도 대사 일행을 포위하는 사람 숫자가 꽤 많았고, 경호원의 스트레스는 빠르게 쌓여갔다. 펄프 대장이 안쓰러운 마음에 한 마디 흘렸다.

“우리 나으리의 손님이시오. 신경 쓰지 마시오.”

“하지만 대장...”

술꾼 중에 울프 용병단도 있는 모양이다. 폭력 사태를 걱정하는 여관주인 지미가 허둥지둥 술잔을 가져왔다. 그러나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경호원은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아무도 가엾은 여관주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일이면 만날 텐데, 성미가 급하시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보았습니다.”

“우리가 ‘우연히’ 알아볼 사이였소? 초면으로 알았는데?”

“공왕 폐하께서는 기억 못 하시겠지만, 과거 린딘 시티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로벨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흰 머리 개수만큼이나 노회한 펄프 대장은 대강 감을 잡았다. 로벨과 함께 린딘 시티에 입성한 귀족이면 본디 흑태자의 기사였다.

‘변질자? 아니면 존 곤트 공작이 흑태자의 파벌을 흡수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잉그비아 왕국의 정치조직을 거의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기억 못해서 미안하오.”

로벨은 속뜻을 모르고 순진하게 사과했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정치밥을 더 많이 먹은 윌리엄 남작은 소문 그대로의 ‘무적무패’ 모습에 미소 지었다.

“공왕 폐하는 옛 신의 신실한 신자라 들었습니다. 거짓과 기만으로 행간 사이에 비수를 숨기는 짓은 어울리지 않지요.”

“행간... 비수...?”

잉그비아 왕국인답게 비유도 어렵게 했다. 하여간 저 나라 귀족하고 말로 싸우면 힘들었다.

“진솔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소? 그거 아주 좋소!”

로벨은 계속 그렇게 말하라고 독려했다. 로벨의 성격을 읽은 대사는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다.

“이것은 잉그비아 국왕 리처드 2세 폐하의 정식 요청입니다. 북해무역협정의 공식적인 파기와 북해안 교역도시의 새로운 관세 협정, 그리고 북방항로의 향후 이용료를 논의했으면 합니다.”

로벨은 앞서 생각한 것을 취소했다. 직설적으로 말해도 알아듣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펄프 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왕의 용병대장이면 그 정도 자격은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요!”

자격이 있는 것과 자신감이 있는 것은 달랐다. 로벨이 재빨리 속삭였다.

‘저게 무슨 말인지 알고 소리치는 거야?’

펄프 대장은 대사를 무섭게 노려보며 속삭였다.

‘잘은 모르지만 어감상 좋아 보이지 않잖습니까.’

세월을 거꾸로 먹은 게 아니었다. 로벨은 늙은 용병의 지혜에 감탄한 후 함께 화를 냈다.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내일 내 집사와 다시 이야기하시오!”

대사의 눈썹이 가까이 붙었다. 자기가 바보란 것을 아는 바보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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