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기둥
도적들과 어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칼밥 먹는 직업이 거기서 거기라, 고용주가 있으면 용병이고, 고용주가 없으면 도적이었다. 울프 용병단에 들어오기 전에 도적질 한두 번은 다 해보았다.
“그래도 이건 좀...”
물론, 도적질이라 해서 살인, 방화, 강간 같은 무시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막 나가면 기사한테 걸려 동구 밖 아름드리나무의 고기열매가 되거나 농부들한테 두들겨 맞아 보리밭 거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보통은 헛간의 곡물자루를 훔치거나 마을 가축을 몰래 잡아먹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사는 게 팍팍한 농민들에게는 고통이지만...
“영주성을 공격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되잖아!‘
허풍쟁이가 기가 차서 소리쳤다. 목숨이 열 개쯤 되지 않는 이상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기존 도적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덩치들에 비해 왜 이리 소심하신가? 늙은 영주가 그리 무섭소?”
채플린 성을 공격해서 영주의 재산을 털자는 제안이었다. 상식적으로도 기가 차지만, 영주 아래에서 오래 일한 울프 용병단에게는 더욱 황당했다.
“채플린 남작은 공왕의 봉신이다. 보복이 무섭지 않은가?”
“보복은 니미... 한몫 챙겨서 뿔뿔이 흩어지면 공왕이 아니라 공왕 할애비라도 어쩔 거요?”
키가 큰 용병 하나가 꿈틀거렸다. 할애비와 사연이 많은 듯한테, 그리 티 나지 않았다.
애꾸눈은 외눈안대를 만지며 고민했다. 이 정신 나간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었다. 그러나 칼잡이 이하 기존 도적떼는 동참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가난해도 귀족이오. 성 안에 꼬불쳐둔 재산이 적지 않을 거요. 하다못해 갑옷과 말만 챙겨도 한밑천 나올 것이오. 그걸 딱 반으로 나눕시다.”
도적 중 일부가 반발했지만, 칼잡이가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위험부담을 나누는 대가로 싼 편이었다.
애꾸눈은 수염을 만지는 척하면서 동료들을 보았다. 어깨를 으쓱이거나 고개를 저어서 의사를 표시했다. 대부분 의미 없었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결행일이 언제지?”
“결행일? 그거 멋진 말이군! 어디서 종자 노릇이라도 했소? 아, 그래, 내일 저녁이오. 원래는 사흘쯤 두고 볼 생각이었지만, 그쪽 패거리가 있으니 바로 저질러도 되겠소.”
“그리고? 다음 계획도 있나?”
“계획은 무슨. 자기 몫 챙겨서 바이바이해야지.”
엎어지면 코 닿는 페르젠 시티로 도망가는 모지리는 없을 것이고, 프란시스 시티나 버팅거 시티로 도망칠 것이다. 간이 조그마한 작자는 바다를 건너서 포클랜드 시티나 자유도시연맹으로 갈지도 모른다. 애꾸눈은 적당히 호응하고 적당히 충고하다가 관심을 끊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지만 실현되는 것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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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과 약탈은 단어부터 음울하고 음습하여 아무도 보지 않는 깜깜한 밤에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의외로 힘들었다. 자신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에게 자랑하지 못할 못된 짓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의외로 해가 지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다. 옛 신이 달아주신 조명 아래 일을 마치고 어둠을 벗 삼아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총 63명. 전쟁을 치르기는 좀 적지만, 마을 하나를 발칵 뒤집기는 충분한 숫자였다. 가난한 마을의 가난뱅이 기사 가문은 알고 막지 못할 규모였다. 그렇기에 도적떼는 거리낄 것 없이 구릉을 넘어 채플린 남작의 목성으로 향했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빨리 닫아!”
채플린 가문의 사내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해가 지는 이때까지 미처 퇴근하지 못한 마을사람은 비명 지르며 성안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애꾸눈이 근심하는 얼굴로 물었다.
“성문이 닫히면 공격하기 힘들 텐데?”
“걱정 마시오. 저 안에도 우리 사람이 있으니까.”
도적들은 느긋하게 행군했다. 사실 말이 좋아 행군이지 삼삼오오 뭉쳐서 제멋대로 몰려갔다. 그래도 숫자가 깡패라 위압감이 대단했다.
칼잡이 이하 도적떼는 화살이 겨우 닿을 거리에 늘어서 성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노을이 한 뼘 정도 줄어들자 늙은 남작이 낡은 헬름을 쓰고 나타났다. 남작은 도적떼의 몰골을 보고 다짜고짜 소리쳤다.
“저 하찮은 도적놈이 우리 가문을 넘봐? 옛 신과 샘 포클의 이름으로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고귀한 이름이 나오자 순박한 일부 도적이 움찔했다. 그러나 기세 싸움에 익숙한 용병 출신 칼잡이는 과장되게 웃었다.
“우리는 100명이 넘고! 영주는 계집과 아이를 합쳐도 20명이 되지 않소! 항복하시오! 그럼 목숨은 빼앗지 않겠소!”
“도적한테 항복하라고? 미쳤구나! 미쳤어! 무적무패 왕이 돌아와 네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일 것이다!”
울프 용병단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다행히 길게 늘어진 노을 그림자와 전투 직전의 흥분으로 들키지 않았다.
“왕은 떠났소!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우리보고 하찮다고 했소? 왕 또한 하찮은 기사 가문에게 관심 없소! 협상은 끝났소! 성문을 여시오!”
마지막 말은 채플린 남작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영지민을 매수했는지, 미리 심어놓은 끄나풀인지 모르지만, 통나무로 된 성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채플린 일가는 기겁해서 소리 지르고, 성 밖의 도적 일당은 기뻐서 소리 지르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패거리가 있었다.
“이런 작전이었어? 의외로 똑똑한데?”
“채플린 경은 반성하시오. 집안 단속을 어찌하기에 배신자가 나오는 것이오?”
“며,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껏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용병이 앞으로 나왔다. 구석진 곳에 있어서 용병 패거리의 신참이라 생각했는데, 주위 반응이 이상했다.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대장인 애꾸눈 아바레스터조차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
“이게 뭐...? 왜들 그러시오? 당신은 또 누구요?”
용병 패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체처럼 사늘한 얼굴로 도적들을 보았다. 어젯밤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시던 그 용병들이 아니었다. 칼잡이는 반쯤 열린 성문과 정체 모를 용병을 번갈아 보았다. 머리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쪽이 진짜 대장이오?”
‘진짜 대장’이 낡은 꼬뜨를 치우고 칼자루에 양손을 얹었다. 특이하게도 혁대 양쪽에 칼을 차고 있었다.
“몇 가지 정정할 게 있어.”
성 안의 기사와 성 밖의 도적 모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새로 나타난 진짜 대장이 앳되다는 것만 간신히 인지했다. 젊고 잘생긴 진짜 대장이 헛기침하고 말했다.
“첫째. 무적무패 왕은 채플린 가문을 하찮게 여기지 않아.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도울 거야.”
“아... 아앗...”
진짜 대장을 따라 나온 얼치기가 돌연 감격했다. 생긴 것부터 좀 모자라 보이는 용병이었다.
“둘째. 너희는 100명이 아니잖아? 우리까지 더해도 어... 어... 66명이잖아?”
“...63명입니다.”
밤색 머리에 점잖게 생긴 용병이 정정해주었다. 칼잡이는 상황 파악을 치우고 불안한 마음에 입술부터 떼었다.
“병력을 부풀리는 것은 전쟁의 상식...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그쪽은 대체 누구요? 이게 다 무슨 짓이고? 약속대로 공격하시오!”
로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사실 63명도 아니야. 우리를 제외하면 36명이지.”
“...35명입니다.”
옆에서 자꾸 숫자를 고쳐주는데, 진짜 대장은 못 들은 척했다.
“우리는 같은 편이 아니거든. 잘 봐.”
그 뒷말은 칼잡이도 못 들었다. 진짜 대장의 왼팔이 스르륵 움직이자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어...?’
어지러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길게 자란 풀잎 사이로 익숙한 몸뚱이가 보이는 듯하더니, 그대로 의식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흐룬팅의 마술이었다.
로벨은 발검과 함께 처리한 칼잡이 몸뚱이를 발로 차고 남은 잔당을 가리켰다. 착한 아이는 집에 갔을 시간이니 애써 순화할 필요 없었다. 직설적으로 명령했다.
“전부 죽여.”
울프 용병단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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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평소의 2배 수당이 걸린 만큼 인정사정 보지 않고 머리통을 쪼개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도적들은 젖 먹던 힘까지 더해 도주했지만 부질없었다. 울프 용병단 최고의 명사수 애꾸눈과 동방의 신궁이라 불리는 더스틴 폴라 경이 고이 보내주지 않았다. 시위를 튕길 때마다 한 명씩, 가끔은 두 명씩 나자빠졌다.
고된 일과를 마친 햇님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스름이 밀려오자 지상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죽은 자는 고통이 없는 법이었다.
성안의 소란도 정리가 된 듯 늙은 채플린 남작과 남작의 둘째아들, 조카, 사위가 밖으로 나왔다. 서른 구가 넘는 시체 밭에 흠칫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왔다.
“볼탄 반도 공왕 로벨 로드릭 만세. 공왕 폐하의 깊은 뜻을 잠시나마 의심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고지식한 기사라면 비겁한 속임수라 화내겠지만, 그 속임수 덕분에 살아난 채플린 남작은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고지식한 기사는 ‘도적’을 속인 거라 아무렇지 않았다. 명예는 동등한 상대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일례로 기사는 농민하고 결투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살펴본 바 이 일대의 도적은 이들이 전부요. 이들의 머리를 마을 밖에 걸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오.”
서른다섯 명이나 쳐죽인 영지에서 도적질할 미친놈은 없었다. 채플린 남작은 두 눈을 질근 감았다. 감격의 눈물을 참는 중이었다.
“저희 가문을 위해 천한 것들과 어울리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시다니... 이 은혜는 대를 이어 갚도록 하겠습니다.”
천한 것들이 불쾌하게 쳐다보았지만, 귀한 것들 대화라 끼어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전리품을 챙기느라 바빴다.
로벨은 채플린 가문의 대를 이을 장남 바티안 채플린 경을 힐끔 보고 기왕 쓴 선심을 조금 더 보탰다.
“바티안 경이 큰 공을 세웠소.”
“제 아들이 말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공을...?”
“아, 음... 도적 소굴을 찾아내고, 싸울 때 열심히 싸웠소. 아무튼 그렇소.”
바티안 채플린 경이 가슴을 펴고 피 묻은 롱소드를 자랑하듯 기울였다. 기사 교육을 날로 받지는 않는 듯 악쓰는 도적 하나를 처치했다. 로벨과 호른 경이 각각 셋을 벤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공은 아니지만, 공은 공이었다.
자식을 칭찬하는데 싫어하는 부모는 흔치 않았다. 채플린 남작의 얼굴이 좀 더 환해졌다. 왕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이 아니라, 영주 가문으로서 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니 더욱 기뻤다. 채플린 남작은 이 기쁨을 어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결론 내렸다. 기사가 생각하는 게 사실 뻔했다.
“공왕 폐하와 바티안 경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겠습니다. 부디 참석해주십시오.”
허풍쟁이가 칼잡이의 옷섶을 뒤적이며 ‘기둥... 성의 기둥...’ 중얼거렸지만, 그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오. 기꺼이 참석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