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2화 (492/605)

492화. 특징

기사는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명예, 긍지, 신념, 기사도 등으로 포장하지만, 까놓고 보면 열두 살 꼬마의 치기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적은 물론이고, 가족과 벗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공왕 폐하께서 오실 줄 모르고 ‘약소하게’ 차렸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사슴이라도 잡아 대접했을 텐데... 허허헛!”

뻔히 보이는 자존심은 우습기에 앞서 측은하다. 과거 로벨도 없는 살림에 무리해서 접대한 경험이 있어 잘 알았다.

“이것도 충분히 과하오. 본인은 거창한 식사를 좋아하지 않소. 저녁은 빵과 치즈로 부탁하오.”

기사의 자존심은 쌍방향이라 집주인의 접대를 거부하는 것도 큰 무례였다. 그러나 로벨은 무례를 무릅쓰고 배려했다.

무적무패 왕의 검소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덕분에 채플린 남작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만찬까지 접대할 여유가 없어 내심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털가죽 벗겨진 짐승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으니 이미 차린 음식은 맛있게 먹기로 했다. 로벨이 술잔을 들자 늑대성 식구와 채플린 가문 식솔이 따라 들었다.

“채플린 남작의 명예를 위하여!”

“무적무패 왕의 영광을 위해서!”

술 방울이 튀어 오르고 위장 속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흥겨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전문 악사는 아니고, 마을주민 중에 재주 있는 이가 있어 데려온 듯했다. 옛날 추수제가 떠오르는 음악이었다. 피리소리와 북소리가 경쾌했다.

술과 음악이 어우러지자 금방 흥이 올랐다. 허브와 허브 유사한 잡풀을 그루트로 왕창 넣고 곡물 건더기를 거르지 않은 전통 맥주였다. 리암 수사표 맥주에 익숙해진 울프 용병단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그걸 표현할 만큼 무례하고 무식하진 않았다. 그리고 여름 과일로 담근 과실주가 여럿 있어 입맛대로 골라 마실 수 있었다.

오늘만 걱정하는 용병과 내일만 고민하는 기사들이라 금방 웃고 떠들었다. 볼탄 반도 출신들은 어깨동무하고 연주에 맞춰 민요를 부르기도 했다.

“저렇게 취해서 내일 도적들을 토벌할 수 있겠습니까?”

호른 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내일을 생각할 줄 아는 기사였다. 로벨은 가죽부대의 맥주를 몰래 따르며 말했다.

“내일은 전투가 없을 거요.”

“예? 하지만...”

하루 만에 결과를 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사정을 보아 장기간 식량을 축내기는 곤란했다.

그때, 채플린 남작의 장남이 새로운 접시를 가지고 왔다. 가장 크고 가장 살점이 많은 닭의 몸통이었다. 개인적으로 날개와 다리를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나누기 쉬운 관계로 호른 경과 폴라 경, 그리고 채플린 남작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무, 무적무패 왕을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저는 랭스터 가,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

로벨 또래의 장남이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 때문에 기사치고 많이 어눌해 보였다.

“술 한잔하시겠소?”

로벨은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끊고 리암 수사표 맥주를 권했다. 장남은 깜짝 놀라서 술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폴라 경이 자신의 잔을 양보했다.

“여, 영광입니다! 고, 고, 공왕 폐하 만세! 만세!”

로벨 맞은편의 채플린 남작이 수염을 쥐어뜯었다. 가문 내 평가가 조나 켈트 경하고 비슷한 모양이다.

장남은 잔을 말끔히 비운 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직 볼 일이 남은 듯했다. 술맛을 두서없이 칭찬하며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로벨의 수행기사 호른 경이 헛기침했다.

“공왕 폐하께 전할 말이 있소?”

“아니, 그것이, 그것이 부탁이, 아니, 간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경의 가문이 못하는 일이오?”

“그렇습니다! 아, 아니요! 가문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흥분한 탓에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행동에서 나왔다.

“공왕 폐하를 따라 종군하겠습니다! 이 칼과! 이 목숨을 다해서!”

챙-

장남이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아 수직으로 세웠다. 기사가 경의를 표하는 보편적인 제스처 중 하나지만 때와 장소가 좋지 않았다. 고용주 앞에서 칼을 뽑자 웃고 떠들던 용병들이 깜짝 놀라 한꺼번에 병장기를 꺼냈다. 챙- 챙- 차르륵- 창-! 큰 칼, 작은 칼, 둥근 망치, 뾰족한 망치, 곧은 도끼, 휘어진 도끼 등등 다채로운 쇳덩이가 연회장에 펼쳐졌다. 악사들은 비명 지르며 도망가고, 채플린 남작의 조카, 사위 등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오해요! 오해! 무기를 거두시오!”

“저 멍청이가...!”

장남은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에 놀라 롱소드를 앞으로 떨구었다. 자칫 왕을 위해 하는 동작으로 보일 수 있었다. 채플린 남작의 얼굴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하얘졌다.

“공왕 폐하! 아닙니다! 지금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알지만, 절대 아닙니다!”

로벨이 아니라 채플린 남작이 오해하고 있었다. 로벨은 이깟 일로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하핫!”

“폐, 폐하?”

로벨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실 예전에 한 번 보긴 했는데, 워낙 옛날이라 기억이 안 났다.

“경, 아주 재미있소.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로벨이 깔깔거리자 울프 용병단은 머쓱해서 서로를 보았다. 채플린 가문의 장남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바티안! 서(Sir) 바티안 채플린입니다!”

“좋소. 바티안 경. 도적 토벌에 함께해도 좋소.”

바티안 채플린 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채플린 남작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울프 용병단의 병장기가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둥 뒤, 탁자 아래, 창문 너머로 대피한 비무장 영지민도 각자 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하게 술잔이 한 번 돌고, 조금 전 일을 안주 삼아 더욱 크게 웃었다. 모든 것이 좋아졌다. 질투심 많은 기사 하나만 빼고 말이다.

“칼 치우시오.”

“아, 앗! 죄송합니다.”

“웃지도 마시오.”

“그, 그건 왜...?”

“그냥이오. 기분 나쁘니까.”

@

저녁까지 이어진 술 파티 후 여기저기 흩어져 잠이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적 무리를 소탕하러 출발했다.

전체적으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숙성이 덜 된 과일주 탓인지 두통을 호소하는 용병이 많았다.

“이래서 도적을 잡겠나! 정신들 차려라!”

호른 경이 호통지자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기어코 속을 비우는 용병도 나왔다. 지휘관으로서 화가 날 상황인데, 전설적인 지휘관 로벨 로드릭은 화내지 않았다.

“그냥 두시오. 괜찮소.”

“그러나...”

“오늘은 싸울 일 없소. 술이 깨게 천천히 출발하시오.”

로벨의 말대로였다. 성 아랫마을을 지나 구름 평야의 언덕을 한 바퀴 돌고 가까운 숲을 지날 때까지 도적은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호른 경이 로벨의 선견지명에 감탄해서 물었다. 사실은 간단했다.

“영주가 가축을 잡고 잔치를 준비했소. 그러면 영지민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을 텐데, 도적들이 자리에 앉아 기다릴 리 없잖소.”

“아... 하?”

권세가 대단한 제후들과 겁대가리 상실한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감을 잃었다. 무적무패 왕이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나타나면 도망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어찌해서 오자마자 치지 않은 것입니까?”

로벨은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흘겨보았다.

“이곳 지리를 모르잖소? 말이 지치기도 했고.”

모닝스타가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가끔씩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호른 경은 여전히 심각했다. 새로 합류한 바티안 채플린 경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망갈 것을 알고 놓아준 것입니까? 늙은 채플린 남작도 알고 있습니까?”

로벨은 지나온 채플린 가문의 영지를 쭉 훑어보고 느긋하게 말했다.

“영지의 골칫거리를 그냥 둘 수 없지. 조만간 처리할 것이오.”

호른 경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어떻게?’를 삼켰다. 로벨이 처리할 거라 했으니 어떻게든 처리될 것이다. 그냥 믿고 따르기로 했다.

@

로벨은 이틀간 채플린 남작령을 순시한 후 도적떼가 사라졌노라 발표했다. 채플린 남작 일가는 항의했다. 왕의 군대가 무서워 흩어졌을 뿐, 왕이 떠나면 다시 돌아올 거란 상식적인 주장이었다. 상식에는 상식으로 대응했다.

“볼탄 반도의 왕이 다스리는 땅은 채플린 남작의 농촌 하나가 아니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 없소.”

로벨이 머물 수 있어도, 채플린 가문이 대접하기 곤란했다. 채플린 남작은 아무 말 못하고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사흘째 아침 페르젠 시티로 출발했다. 당연히 속임수였다.

채플린 가문의 목성(木城)을 떠난 울프 용병단은 미리 눈여겨본 구릉과 숲에 숨어들었다. 이 지역 토박이인 바티안 채플린 경이 도움이 되었다.

가을 추수가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다. 도적질도 때가 있으니 오래 자리를 비우지 않을 것이다. 만 하루가 지나자 꾀죄죄한 복장의 도적무리가 울프 용병단 야영지를 찾아왔다.

무기는 물론이고, 복색까지 제각각 달랐다. 누비 갑옷을 입은 칼잡이, 찢어진 튜닉 차림의 농민, 쇠가죽 조끼를 걸친 까까머리 곰보 등등. 전투 중에 도망친 탈영병,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 도시에서 도망친 범죄자 무리였다. 그중 칼잡이가 대표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땅이오.”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던 울프 용병단이 무기를 쥐고 일어났다. 도적 무리는 생각보다 무장이 좋은 용병 패거리에 겁을 먹었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어깨에 걸치고 외눈안대를 만지며 한 걸음 나섰다.

“채플린 남작의 땅이 아니고?”

간을 보는 말이었다. 도적 중 하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영주가 고용한 용병이오?”

용병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거지 남작이 우리를 고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린 몸값이 꽤 비싸.”

용병업계에 종사한 칼잡이도 알고 있었다. 저런 용병단을 고용할 수 있으면 무적무패 왕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전에 자신들도 강도질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서 온 누구요? 설마 늑대 패거리는 아니겠지?”

몇몇 용병이 찔끔해서 눈을 피했다. 그러나 애꾸눈은 과장되지 않게 웃었다. 용병이 안 되었으면 연극배우가 되었을 사람이다.

“예전에 그치들이랑 일한 적 있지. 소문만큼 대단한 놈들이 아니야.”

이런 거짓말에 딱 맞았다. 외팔이나 겁쟁이를 데려왔으면 큰일 났을 것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칼잡이는 한동안 의심했다. 그러나 용병 패거리에 소속을 나타내는 문장이 있을 리 없고, 왕을 호위하는 비싼 놈들이 이런 곳에 죽치고 있을 까닭도 없었다. 칼잡이는 무기를 늘어뜨리고 미소 지었다.

“영주한테 고용된 게 아니면, 우리와 일해 보겠소?”

“우리를 고용한다고? 그럴 페닝이 없어 보이는데?”

“고용이 아니라 협력이오. 잘하면 내년 봄까지 놀고먹을 수 있을 거요.”

평생 놀고먹는 것이 목표인 울프 용병단에게 빈약한 제안이었다. 애꾸눈은 힘겹게, 정말 힘겹게 표정을 완성했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군.”

조금도 당겨 보이지 않았지만, 개나 소나 받아들이는 도적들은 낯선 용병을 의심하지 않았다. 크게 한탕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이 동네 무법자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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