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밥값
잉그비아 왕국과 악마추종자 건은 모두 뒤로 미뤘다. 바다 건너의 역병보다 내 발등에 종기가 급했다.
“오크? 오크라니? 지난 몇 년간 조용했잖아?”
로벨의 영지가 공격받은 것은 마왕 버그베어 이후 처음이었다. 신참 용병이 버벅이며 대답했다.
“도너반 남작령에서 넘어온 거 같은데, 확실치 않습니다요.”
“적의 규모와 마을의 피해는? 전투 중이야? 아니면 대치 중이야?”
로벨의 질문에 신참 용병은 머리를 긁으며 당혹해 했다. 신참이라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질문을 명령으로 바꿨다.
“찰드 촌장을 들여보내고, 애꾸눈과 발가락을 호출해. 지금 당장.”
“뭐하냐! 당장이라 하셨다!
펄프 대장의 주름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자 신참 용병은 잽싸게 뛰쳐나갔다. 잠시 뒤, 찰드 촌장과 촌장의 둘째 아들이 들어왔다.
큼직한 헌팅 나이프와 셀프 보우와 화살 대여섯 발을 차고 있지만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다. 찰드 가문은 필립 로드릭 시절부터 북쪽 숲을 관리한 사냥꾼 가문이었다. 충성의 기간을 따지면 어린 집사보다 오래되었다.
“M, My lord!”
그래서 호칭이 잘못되어도 지적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에게 갑옷을 준비하라 말하고 중요한 것만 질문했다.
“오크의 숫자와 주민 피해를 말해.”
“마을 농장을 습격한 오크는 30마리인데, 여자와 아이를 나, 납치해서, 숲 속에 더 많을 것 같습니다요.”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몇 명이나?”
“아, 아홉 명입니다! 제 며늘아기도 자, 잡혀가서... 흐윽... 제 아들 부부를 살려주십시오!”
어쩐지 장남이 안 보인다 했다. 제 성질을 못 이겨 아내를 구하러 간 모양이다.
“산채로 잡아갔으면 당장 죽이진 않을 거야.”
“몬스터의 식량보관이죠? 망할 놈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수컷 오크가 30마리면, 암컷과 새끼가 15마리는 될 것이다. 하루에 3명은 잡아먹을 테니, 3일이 지나면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 허풍쟁이가 성 밖을 보고 외쳤다.
“애꾸눈 볼포스가 왔습니다요!”
소식이 울프 용병단 요새에 전해졌는지 신참 용병보다 애꾸눈이 먼저 도착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었다.
“가용 가능한 병력을 모두 동문에 집결해. 무기와 갑옷 외에는 필요 없어. 보급은 후발대가 할 테니 일단 출발해.”
애꾸눈은 칼을 풀어 갑옷을 준비하는 로벨과 하얗게 질려 애걸하는 촌장 부자를 훑어보고 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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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은 몬스터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긴 게 흉측해서나 식인을 해서가 아니다. 인간처럼 전리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늑대처럼 부산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항복이나 포로의 개념이 없어 선택의 폭이 좁았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출발!”
그러나 상시 급료를 받으며 항시 주둔하는 울프 용병단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뉴 로드릭 마을에 내 친구가 있다고.”
“처제가 그쪽으로 시집갔다. 빌어먹을 괴물놈들...”
사회현상이나 제도에 관심 있는 학자라면 흥미로워할 부분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결혼을 해도 가족과 함께 떠돈다- 기존 용병집단과 달랐다. 고대 왕국 시절의 시민병처럼 정착해서 용병처럼 급료를 받았다. 역사를 미리 훔쳐서 용어를 붙이면 상비군(Standing army)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확인된 적은 근육질 난쟁이 오크종이지만, 몬스터 특성상 고블린이나 트롤이 있을 수 있다. 똥 싸러 갈 때도 칼을 놓지 마라. 수상한 것이 보이면 즉시 전파해라.”
애꾸눈 이하 고참병이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보통은 도망가지 말 것을 강조하거나 협박하는데, 도망가 봐야 로드릭 시티니 그럴 필요 없었다.
뉴 로드릭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을 1시간쯤 걸었을 때 후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긴장한 용병들이 무기를 꽉 쥐었다. 그러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적무패 왕이다!”
“공왕 폐하가 오셨다!”
로벨, 어린 집사, 그리고 과묵한 몬트를 비롯한 기마 용병 패거리가 합류했다. 중장 기사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했다.
울프 용병단은 즉시 길을 열어주었다. 빗살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필드 아머와 아멧 형태의 새하얀 투구와 바이저 그늘 아래의 오뚝한 콧날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볼탄 반도의 지배자이자 울프 용병단의 진짜 대장 로벨 로드릭이었다.
‘저분이 있으면 질 리 없지.’
‘오크가 아니라 오우거라도 상관없다.’
울프 용병단의 충성심은 급료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무적무패 신화를 신뢰했다.
로벨은 후미에서 선두까지 용병을 쭉 살폈다. 로드릭 시티 요새에 주둔 중인 병력만 동원하여 숫자가 많지 않았다. 북군과 남군 합쳐서 200명 남짓이다. 그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크는 3, 40마리잖아요? 충분하지 않아요?”
어린 집사가 의문을 표시했다. 로벨의 소꿉친구도 모든 분야의 천재는 아니었다.
“전쟁이 아니라 토벌이야. 숲 속에 숨은 오크 부락을 찾아내려면 부대를 나눠야 해. 밖에서 포위해야 하니까.”
“그럼 3개 부대로 나눠서...”
“그리고 오크만 있다고 확신할 수 없어.”
몬스터가 하나 출몰하면 숫자가 종류가 금방 불어났다. 자연계 학자들은 몬스터의 먹이사슬 때문이다, 몬스터의 채취가 몬스터를 부른다 떠들지만, 정답은 마법사가 알고 있었다.
“인간의 공포야. 인지의 세계에서 불려 나오는 거야.”
마도의 수호자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마녀 키르케의 조잘거림 때문인지 신비의 개념을 이해했다. 오크에게 습격받은 뉴 로드릭 마을 주민과 주변에 퍼진 소문이 새로운 몬스터를 만들어낼 것이다.
로벨은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했다.
“북군과 남군으로 나눠서 가까운 곳부터 수색해. 마을주민을 안심시키는 게 최우선이야.”
“저어어, 공왕 폐하?”
찰드 촌장이 말을 걸었다. 수백 명의 울프 용병단 때문인지, 로벨의 늠름한 모습 때문인지 많이 진정되었다.
“제 아들놈이 이곳 숲 지리에 밝습니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대사였다.
“수색부터 하라는 거야?”
“어이구! 제가 감히 폐하께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요. 그저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고지식한 켈트 경이나 권위의식이 충만한 랭스터 경이 있었으면 샤우팅을 날렸을 것이다. 깐깐한 기사들이 없어서 다행...
“일개 촌장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조용히 있으시오!”
...이지 않았다. 펄프 대장이 이곳에 없는 기사들을 대신해 소리쳤다. 로벨은 두 노신(老臣) 사이에 끼어들기가 어려워 침묵했다.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뉴 로드릭 마을까지 1마일이 남지 않은 곳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오크 십 수 마리가 울프 용병단 앞으로 뛰쳐나왔다.
“저, 저 미친놈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잔뼈 굵은 울프 용병단은 즉시 무기를 꺼내서 방진을 구성했다. 10피트가 넘는 창벽이 세워지고, 10초 후에 아바레스트가 장전되었다.
“뀌이이잇-!”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오크들도 울프 용병단을 보고 당황했다. 로벨은 라이트 랜스를 건네받다가 낌새를 눈치챘다. 기습이 아니었다. 오크가 용감 무식해도 200명이 넘는 인간 부대에 덤빌 리 없었다.
“겁에 질린 거 같은데요?”
어린 집사가 속닥였다. 로벨은 큰 소리로 “기다려! 대기해!” 소리치고 오크들을 관찰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흰 수염 오크가 앞뒤를 번갈아 보며 “뀌익! 뀍-! 뀌이익-!” 소리쳤다. 그러자 가진 무기를 팽개치고 반대편 숲으로 도주했다.
“...저건 뭐야?”
“지금 항복한 건가?”
몬스터가 항복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항복이면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로벨은 오크가 나타난 방향을 보았다.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코로 느끼는 악취인지, 악취처럼 느끼는 육감인지 헷갈렸다.
“사격 준비.”
“예? 예예! 사격 준비!”
로벨의 명령에 사수들이 오크 뒤통수를 겨냥했다. 명령을 잘못 이해했다. 로벨은 창끝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저쪽을 겨냥해.”
로벨의 지시에 크로스보우 중대가 엉거주춤 자세를 바꿨다. 그것이 많은 전우를 살렸다. 거목이 움직였다.
“어... 어랍쇼?”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목 같은 짐승’이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나무 크기의 짐승도 상식적이진 않았다.
“쿠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나무 그림자 사이로 거구의 괴물이 달려왔다. 산간초목을 흔드는 발 울림에 간신히 망울을 터트린 어린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울프 용병단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트, 트, 트롤이다!”
“쏴라! 쏴!”
창벽 사이로 소나기가 쏘아졌다. 어깨에 한 방, 가슴에 두 방, 양쪽 다리에 각각 한 방. 주둥이를 벌리고 화를 내는 순간 애꾸눈이 쏜 강철 쿼럴이 목구멍을 뚫었다. 가죽이 질기고 상처를 재생하는 거대 몬스터도 충격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쿼럴이 박힐 때마다 크게 휘청거리다 입천장이 뚫려 무릎 꿇었다. 허풍쟁이가 숏 스피어를 슬며시 내리며 중얼거렸다.
“해, 해치웠... 웁! 웁웁!”
여러 번 당한 동료들이 즉시 허풍쟁이 입을 틀어막았다. 과격한 자는 오금을 차고 목을 졸랐다. 그 노력 덕분일까, 트롤은 주저앉은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가죽 흉갑을 쓸어내렸다.
“와, 깜짝 놀랐네요. 오크들은 저놈한테 쫓긴 모양이죠?”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대열 앞으로 나갔다. 트롤의 몇 가닥 안 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흉터가 없는 것은 특유의 재생력 때문이라 해도 넝마가 깨끗하고 화살 하나 박힌 것이 없는 게 불길했다. 오크가 버리고 간 무기에는 피가 있었다.
“재장전해.”
“재, 재장전! 재장전해라!”
애꾸눈 이하 아바레스터들은 반쯤 흘린 긴장을 주워서 쇠뇌를 당겼다. 윈드라스를 꺼내 버트에 끼우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감았다. 끼리릭- 끼리리릭- 시위 당겨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그만큼 숲이 조용했다.
“한 놈이 아니야?”
새소리가 나지 않는 게 불길했다. 짐작대로 숲이 다시 흔들렸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닫고 외쳤다.
“세 마리다! 방진을 좁혀! 밀착해라!”
창병이 어깨를 바짝 붙였다. 창이 없으면 장검과 방패로 측면을 보호했다. 매일 같이 굴리며 훈련시킨 보람이 있었다.
“왔다!”
로벨은 라이트 랜스를 위로 던져 역수(逆手)로 받았다. 그리고 등자를 꽉 밟았다. 모닝스타가 신음하듯 울었다. 신수가 아니면 버티지 못할 신비롭고 무식한 힘이었다.
로벨은 등 근육을 한껏 쪼인 후 창을 던졌다. 투척을 위한 무기가 아님에도 무지막지한 힘에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숲에서 뛰쳐나온 작은 트롤이 창에 찔려 나자빠졌다. 그것을 신호로 크로스보우 중대가 일제히 사격했다.
“쏴라!”
대포가 상용화되기 전까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아바레스트다. 70여 발이 집중적으로 날아들자 터프한 트롤도 버티지 못했다. 고슴도치 꼴이 되어 엉덩방아를 찍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는 것이 싸울 의지를 잃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마리였다.
“막아라!”
“버텨!”
가장 덩치 큰 트롤이 창벽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무기가 좋아도 힘에 못 이겨 튕겨나갔다. 그러나 파이크와 롱 스피어만 있는 게 아니었다. 6, 7피트 길이의 짧은 폴암이 빈자리를 채우며 트롤의 몸을 찔렀다. 도끼날이 달린 것은 허벅지와 발등을 찍었다.
덩치 큰 트롤이 구슬프게 울며 반격했다. 가까이 다가간 창병이 도끼머리에 맞아 붕 날아갔다. 그러나 백전연마의 용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창질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섯 번 살을 찢고 뼈를 긁어내자 괴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린 집사가 기쁘게 소리쳤다.
“이제야 밥값 하는군요! 우리 용병단이 최고에요!”
어린 집사의 인정을 받은 기념적인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