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3화 (473/605)

473화. 악마

예상치 못한 전투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트롤 세 마리를 사살하고 한 마리를 쫓아냈다. 아군의 피해는 도끼머리에 맞은 운 없는 한 명뿐이었다.

“로드릭 시티로 데려가. 닥터가 치료해줄 거야.”

부상 입은 용병이 낄낄 웃으며 실려 갔다. 살아 보겠다고 이것저것 껴입은 덕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트롤 시체를 발로 찬 후 물었다.

“오크를 쫓을까요?”

“아니. 뉴 로드릭 마을로 가.”

로벨은 싸움개 패거리 40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뉴 로드릭 마을로 보냈다. 마을 주민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지만, 그들이 안심해야 몬스터를 뿌리 뽑을 수 있었다. 트롤 시체도 챙겨갔다. 전리품 겸 전시용이다.

“저희는 무엇을 합니까요...?”

싸움개가 멀어지는 동료들을 보며 물었다. 로벨이 있어도 고작 40명이라 불안했다.

“트롤이 나타난 곳을 찾아.”

“오크가 아니고요?”

“확실한 것부터 찾아야지.”

로벨은 괴물 냄새에 흥분한 모닝스타를 달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싸움개 패거리는 서로를 한 번 보고 군말 없이 따랐다. 소대 단위로 갈라져 양쪽에서 호위했다.

트롤의 흔적을 쫓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의 포식자가 그러하듯 흔적을 감추지 않았다. 부러진 나뭇가지, 헤쳐진 진흙 바닥, 악취 나는 배설물 따위가 한 곳을 가리켰다. 1시간이 조금 안 되어 괴물들이 싸운 장소를 찾아냈다.

“어이구, 난리 났군요.”

“오크 시체입니다!”

“하나, 둘, 셋... 이크! 일곱 구입니다요.”

“저쪽에도 있는데?”

“저건 상반신이고, 이쪽에 하반신이 있잖아.”

치열하고, 잔혹하고, 해괴한 현장이었다.

‘오크가 용감해도 트롤 다섯과 싸울까?’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시체 사이를 걸었다. 이상한 흔적이 있으면 무릎 꿇고 유심히 살폈다. 사냥꾼이나 추노꾼 같은 추적술은 없지만, 워낙 큼직한 흔적이라 몇 가지 알 수 있었다.

“오크는 영리하지?”

“사람을 납치해서 식량으로 쓸 정도니까요. 대충 7, 8살 지능은 되겠지요.”

“그 정도면 유인책도 생각할 수 있겠지?”

로벨은 두 팔로 트롤이 나타난 방향과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거의 직각이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고, 인간의 마을로 도망간 이유가 뭘까?”

싸움개 패거리는 칼밥으로 살아온 용병이다. 로벨이 가리키지 않은 곳. 트롤의 본래 이동방향을 쫓았다.

“오크 부락이 가까이 있군요.”

“그리고 내 사람이 있는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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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싸움개 패거리는 소리를 죽여 이동했다. 병장기 소리와 사슬 갑옷 소리는 어쩔 수 없지만, 웃고 떠들지 않는 것으로도 숲이 조용했다. 주의 산만한 창이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소리 없는 욕설이 쏟아졌다.

로벨은 모닝스타 주둥이에 재갈을 물리고 도보로 이동했다. 기사답지 못한 일이고, 모닝스타의 불만도 엄청나지만, 마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이 결과로 돌아왔다. 수령이 짧은 양수를 베어내고 잔가지를 얹어 지붕을 만든 원시적인 움막이었다.

‘저놈들이...!’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빠는 갓난쟁이와 그 주위를 아장아장 도는 새끼 오크의 모습이 종(種)을 떠나 화목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과 가죽이 현실을 일깨웠다.

‘저것들을 어찌할까요?’

싸움개가 조그맣게 짖었다. 그래서 원하는 답을 주었다.

‘전부 죽이고 마을 주민을 찾아.’

싸움개가 고참 용병 몇 명을 지목해 신호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패거리라 금방 자리 잡았다. 잠시 잠깐 침묵이 깔리고, 이어서 고함이 터졌다.

“공격! 공격해라!”

“괴물 새끼들! 뒈져라!”

덩치 큰 수컷이 두어 마리 있지만, 대부분은 키 작은 암컷과 더 작은 새끼였다. 칼에 베이고 창에 찔려서 힘없이 쓰러졌다. 전투라 부르기 민망했다.

로벨은 무력한 오크들을 무시하고 움막으로 향했다. 입구를 막은 나무 뭉치를 발로 차 쓰러뜨리고 조잡한 덩굴을 흐룬팅으로 베었다. 그러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

오크의 굵은 성대로 낼 수 없는 인간의 비명이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집어넣고 얼굴을 보였다. 까칠한 비명 사이로 정확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기, 기사님?”

“영주님이야! 영주님이 우릴 구하러 오셨어!”

오크의 비상식량으로 잡혀 온 뉴 로드릭 마을 주민이 환호했다. 평소 무시무시해 보이던 기사의 갑옷이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로벨은 숫자를 헤아렸다. 남자 셋, 여자 넷, 꼬마 하나, 노인 하나. 찰드 촌장이 말한 대로였다.

“응?”

아니, 숫자를 잘못 세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가 넷이었다.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홀로 엉엉 우는 아낙이 있었다. 왜 그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낙의 품에는 사지가 뜯긴 사내가 있었다. 로벨도 잘 아는 사내였다.

찰드 촌장의 첫째 아들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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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추가로 투입해 도망간 오크와 트롤을 추격하고, 뉴 로드릭 마을 일대의 치안을 강화했다. 그리고 가까운 가시성, 바위성, 도너반 성에 경고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에요.”

찰드 촌장의 아들을 비롯해 희생자 합동 장례식이 치러질 무렵, 볼탄 반도 각지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규모는 조금씩 다르지만,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전황 보고였다. 어린 집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래 전에 몰아낸 몬스터가 갑자기 왜? 그것도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이상하지 않아요?”

듀라한이 말한 피의 예언이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면 누구 짓인지도 짐작 갔다.

“마녀들이야.”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라 쳐다봤다. 로벨은 그게 아니라고 억지로 웃어 보인 후 말했다.

“예전에도 고블린을 부려서 사람을 습격했잖아.”

“그때 그 마녀가...”

“응. 그들이 돌아왔어.”

볼프 사트로 후작을 꺾고, 흑태자를 도와 고르곤 공작을 처단한 후 일단락되었다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마법사의 왕 제퍼슨과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그대로 살아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로벨은 깃털을 뺀 캐벌리어 모자를 벗어 묵념한 후 일어났다. 리암 수사가 다시 기도문을 이어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보살피니,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로벨은 주름진 얼굴에 밤톨만한 눈물이 흐르는 찰드 촌장을 보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촌부의 아들딸을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는 군주는 없으니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로벨을 쫓아왔다.

“그럼 어쩌죠? 잉그비아 왕국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잖아요?”

로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멀리 보았다.

황금보리 수도원의 언덕길은 늑대성 언덕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좌우의 울타리 너머로 양들이 뛰어다니고, 햇살을 담은 조각구름이 스치듯이 지나가고, 구불구불한 길이 끝나는 곳에 거대해진 로드릭 시티가 보였다.

“내 몸은 하난데 싸울 상대가 너무 많아.”

로벨 답지 않은 약한 소리라 두 친구가 당황했다.

“항상 이길 수 없고, 모두를 지킬 수 없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서로를 보고 뻐금거렸다.

‘젊은 찰드 씨가 죽어서 속이 상한 모양이에요.’

‘용병은 목숨값을 받은 대전사(代戰士)지만, 영지민은 아니니까요.’

위대한 왕이자 무적의 기사도 위로가 필요했다. 어린 집사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그야 그렇죠. 폐하도 사람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로 자책하지 마세요.”

“사람...”

로벨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모두를 지키지 못해도 많이! 아주 많이 지킬 수 있잖아요?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많이...”

로벨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서로를 질책했다. ‘그걸 위로라고 해요?’, ‘뭐라구요? 내가 할 말인데요?’ 로벨은 언덕길을 내려가며 두 사람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모두 옳았다. 그래서 할 일을 찾았다.

“그래. 최대한 많은 사람을 지키자. 기사들을 소집해서 몬스터를 소탕해.”

“어, 어느 기사들이요?”

“칼을 쥘 줄 알고 말을 탈 줄 아는 기사! 그거면 충분하잖아?”

시골 가문의 차남, 삼남, 사남이 대거 몰려올 것이다. 어린 집사가 머릿속의 주판알을 튕기는 사이 마녀 키르케가 물었다.

“악마추종자는요? 악마추종자는 어떡하고요?”

“어린 집사가 답을 줬잖아.”

“제, 제가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을 부리면 되잖아?”

악마추종자가 상대하기 어려우면 그냥 악마를 상대하면 되었다. 마침 잘 아는 악마가 근처에 있었다.

“강철성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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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만큼은 아니지만, 강철성과 강철성 아래의 마을들도 빠르게 발전했다.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오랜 반목이 끝나 남북을 오가는 상인이 많아지고, 붉은 산의 침체로 철광의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연히 인구도 크게 늘었다. 검은 숲의 유민, 붉은 산의 피난민, 구(舊)깁스 자작령의 도망 농민 등등. 그 때문에 기이한 소문도 조금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젊은 처녀가 실종된다느니, 강철성 지하의 사형수가 미라가 되어 몰래 버려진다느니 하는 흔한 괴담이었다.

“그자가 진짜...”

로벨의 눈썹 끝이 치솟았다. 죽은 자의 왕이니 마도의 수호자니 떠들어도 본질은 인육을 탐하는 괴물이었다.

“그냥 소문이잖아요. 소문. 그리고 어차피 죽을 사형수 이야기고요.”

“정의의 심판과 괴물의 한 끼 식사는 달라!”

어린 집사는 관문 위에 주렁주렁 걸린 시체들을 힐끔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 꼴이 될 바에 흡혈귀한테 물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강철산 기슭에 고블린이 나타났다고 하네.”

“이런! 여기서도?”

“어디 가나 몬스터 소식뿐이군.”

강철성 관문을 지나는 상인들이 흉흉한 소식을 공유했다. 눈이 녹아 본격적인 상행에 나설 때라 예민했다. 불안과 불만이 불처럼 위로 향했다.

“공왕은 뭐하는 거야? 무적무패니 챔피언이니 자랑질만 하고...”

“성 안에 사는 것들이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나. 알아서 조심해야지.”

“저, 저게?!”

어린 집사가 당나귀 머리를 휙! 돌렸다. 자연스레 스몰 소드 손잡이를 잡는 것이 스승으로서 보람찼다.

“하지 마.”

물론, 칼질을 가르쳤다고 칼부림을 방관할 수 없었다. 로벨이 어린 집사와 상인들 사이를 막았다.

상인들은 필드 아머와 모닝스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느 가문 기사인지 몰라도 까닥하면 치도곤을 당할 수 있었다. 사실 공왕 본인이란 것을 알면 치도곤 걱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쥐고 소리쳤다.

“기사님도, 아니, 공왕 폐하도 엄청 노력 중이거든요? 기사님들 모아서 몬스터 잡을 거거든요?”

“누, 누가 뭐라 했나?”

“그럼 그런 거지. 왜 소리치고 지랄이야?”

기사만큼 마녀도 껄끄러워 다들 흩어졌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친구들을 말렸다.

“그만해. 별일 아니잖아.”

“모욕을 받았는데 왜 별일 아니에요? 평소에 명예가 어쩌고 떠들면서요?”

“명예를 거론할 상대가 아니잖아.”

포비아 왕국에는 ‘개가 짖는다고 화내지 않는다’란 속담이 있었다. 단순히 자비로운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뼛속까지 기사고, 귀족이었다.

“이곳에도 몬스터가 출몰한다는 것은 알았잖아. 흡혈귀 군주가 어찌할지 궁금하지 않아?”

어린 집사는 칼에서 손을 떼고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그냥 다 죽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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