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복수
키 작고 앙상한 산림 위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보통 불이 아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기름 냄새와 화약 냄새, 그리고 사람 태우는 냄새가 났다. 로벨은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워- 워워-”
모닝스타는 콧김을 쒹- 쒸익- 쒹- 하고 내뿜었다. 오랜만에 정신없이 달렸다.
“숨 고르고 가자. 잠깐 쉬어.”
로벨의 명령에 모두가 탄식했다. 그럴 만도 했다. 기사 종자와 기마 용병으로 구성한 ‘별동대’는 이틀 동안 구보와 속보를 반복하며 강행군했다.
신비에 두 발 걸친 하프 유니콘이 숨을 헐떡일 정도니 평범한 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침인지 거품인지 구분 안 되는 것이 줄줄 새어 나왔다.
“연기의 방향이 이상합니다.”
과묵한 몬트가 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만지작거리며 긍정했다.
“응. 북쪽이야.”
외성이 함락되었다. 연기의 숫자와 크기를 보아 내성도 위태로웠다. 난공불락 까마귀 성이 이렇게 빨리 수세에 몰릴지 몰랐다.
‘어떻게 한 거지?’
그 답은 금방 나왔다.
쿵... 쿵...
산울림과 함께 공기가 흔들렸다. 땅바닥에 너부러진 인간과 그런 인간을 부러워하는 말이 동시에 반응했다.
“마른하늘에 천둥은 아니겠고.”
“검은 숲 나으리들이 대포를 가져왔군.”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용병들은 두 가지를 깨달았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 그리고 짧디짧은 휴식이 끝났다는 것. 로벨은 손바닥에 물을 받아 모닝스타에게 먹이고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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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챔피언이라 해도 기사 종자와 기마 용병 20기로 1천 명이 넘는 적을 물리칠 수 없다. 오합지졸 농민이면 사기를 꺾어 흩어지게 할 수 있지만, 전쟁을 업으로 삼은 기사와 용병이 상대면 불가능했다.
“대포를 무력화하자.”
그래서 계곡 아래 적진을 돌파하는 대신 계곡 위 포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합리적이고 실리적이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에게 손짓했다. 이심전심일까, 아니면 기사 종자 대행을 오래해서일까, 숏-스피어 한 자루를 뽑아 건네주었다. 로벨은 이름대로 6피트가 안 되는 짧은 창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말했다.
“화약 상자는 건들지 마. 자칫 폭발하면 휘말릴 수 있어.”
“저, 폐하? 화약 상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상자처럼 생긴 건 다 건들지 마.”
그거 말고도 당부할 것이 많았다. 대열을 이탈하지 말 것, 퇴각 신호에 무조건 따를 것, 화살에 맞아도 바로 뽑지 말 것 등등. 기사 종자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자잘한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했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대포를 지키는 병력도 적지 않았다. 칼을 찬 하인을 제외해도 기사와 기사 종자, 전쟁 전문 용병이 쉰 명 가까이 되었다.
“가자.”
포격으로 무너진 외성을 넘었다. 줄다리가 있던 자리에 설치된 절구 모양 대포와 장전봉으로 포신을 긁어내는 용병이 보였다. 요새 공략에 정신이 팔린 듯 뒤에서 다가오는 로벨 일행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랑말’이 히이이잉-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면 뒤통수를 긁어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으잉? 너희들 뭐야?!”
거리는 약 32야드. 대(對)보병전으로 돌격하기 딱 좋았다. 로벨은 숏스피어를 길게 내밀고 모닝스타 옆구리를 걷어찼다.
“Charge!”
검은 숲 연합군에게 날벼락이었다.
사실 검은 숲 기사들도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 볼탄 반도 군대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짐말이 떼로 죽은 것도, 잦은 기습으로 발목이 잡힌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 뒤에 도착할 거라 확신했다.
“울프 용병단이다!”
“로벨 로드릭 왕이다!”
로벨이 고작 20기의 기마병만 이끌고 정찰병보다 먼저 까마귀 성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세상의 어느 왕이 이런 무모한 작전을 벌일까. 포대를 지키는 기사는 성벽 너머에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볼탄 반도 병사가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싸울 생각을 포기했다.
“후퇴해라! 본진으로 후퇴해라!”
전술 병기를 지키는 정예 용병들과 치열한 싸움을 각오한 로벨 일행에게 행복한 오해였다. 횃불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포수 등에 창날을 깊숙이 담갔다가 빠르게 뽑았다. 핏물이 창끝을 따라 길게 뽑혀져 나왔다.
“우아악-!”
“도, 도망쳐라!”
과묵한 몬트 이하 기마 용병들도 창을 찌르거나 힘껏 던졌다. 삽시간에 예닐곱 명이 쓰러지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와서 말해봐야 소용없지만, 대포를 엄폐물 삼아 방진을 구축하고 본진에서 기사들이 올 때까지 버텼으면 20명 남짓한 별동대에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하앗!”
로벨은 대포의 주둥이를 잡고 허리와 허벅지 힘으로 끌어당겼다. 제정신인가 의심되는 행동인데, 곧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심했다. 대못으로 고정된 발판이 뿌리 뽑히며 모닝스타 꽁무니를 따라 질질 끌려갔다.
“오, 오우거도 저 짓은 못 하겠다.”
로벨은 콧김을 한번 뿜고 청동제 구포를 계곡 아래로 집어던졌다.
앞서 한 말을 정정해야겠다. 660파운드짜리 금속을 악력으로 날리는 인간이나, 그런 인간의 기행을 네발로 버티는 짐승이나 정상이 아니었다. 방진을 짜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대포를 모두 치워!”
로벨이 숨을 몰아쉬며 명령했다. 괴력에 넋이 나간 부하들이 더듬더듬 대꾸했다.
“시, 시범을 보여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저희는 평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대포를 무력화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힘으로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대못과 망치, 혹은 그와 비슷한 용도의 병장기로 점화구를 망가트렸다.
“적이 올라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계곡 아래로 도망간 용병들이 지원군과 합세해 올라왔다. 다급해진 기사 종자는 값비싼 단검을 점화구에 쑤셔넣고 워 해머로 후려쳤다.
“그쯤 하면 됐어! 가자!”
거의 대부분의 대포가 망가졌다. 빚을 내서 최신 무기를 장만한 검은 숲 기사 입장에서 통탄할 노릇이었다.
로벨은 가문의 깃발을 높이 흔들고 왔던 길로 빠져나갔다. 성공적인 기습이었다. 강행군으로 지친 말들도 기분이 좋아 푸히힝- 웃었다.
“우리 집 말을 죽인 복수다!”
누가 복수는 덧없는 거라 했던가.
이처럼 신나고 즐거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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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공략에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그래도 최고급 전술병기였다. 적의 기습으로 대포가 무력화되자 사기가 뚝 떨어졌다.
“무적무패 왕이야.”
적의 정체 또한 두려움이었다. 용하게 살아남은 포수가 몸을 떨며 ‘전설’을 전했다.
“괴물 왕이 입김을 부니까 대포가 서리 맞은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어... 그때 망치로 내려치니 유리처럼 깨진 거야...”
로벨이 소리치는 것과 과묵한 몬트가 망치질한 것을 동시에 본 모양이다.
“괴물 왕이 나타났으면 울프 용병단도 코앞에 왔다는 거잖아?”
작년 겨울에 생각없이 고용된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무적무패 왕은 옛 신이나 뿔 달린 악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소문이 무섭기야 하지만, 기사 나으리와 용병 대장을 두고 하필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울프 용병단은 현실적인 공포였다. 고참 용병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과거에 함께 싸웠기 때문이다.
“이거 줄을 잘못 선 것 같은데...”
스코어로 따지면 1대1이었다. 소수의 정예로 적의 본진을 방해하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시기가 안 좋았다. 까마귀 성을 점령한 후라면 검은 숲 연합군이 유리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로벨의 본진이 도착하면 계곡에 갇혀 몰살될 것이다.
“공왕이 못 올 거라 하지 않았소!”
“저, 저 미친 왕이 기사들만 이끌고 올 줄 누가 알았겠소?”
“이게 다 동방놈 탓이오. 불사신인가 뭔가 하는 놈 말이오.”
검은 숲 기사들은 책임을 미루다가 성 밖으로 물러날 것을 결정했다. 사나흘만 더 밀어붙이면 존 도너반 자작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니 실로 아쉬운 일이었다.
한편, 까마귀 성 병사들은 기적을 본 신자처럼 기뻐했다.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존 도너반 자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문과 쇠창살을 활짝 열고, 시체와 무기와 그을림이 가득한 계곡길을 바삐 치우고, 두 발로 직접 마중 나와 무릎을 꿇었다. 전장에서 기사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의였다.
로벨은 자신을 믿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주위 사람이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래도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잘 버텨주었소! 잘 싸워주었소! 이제 벗이 왔으니 안심하시오!”
자작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성벽 위 병사들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병사들은 하루 종일 소리쳐서 쉰 목으로 다시 환호했다.
“무적무패 왕 만세!”
“로드릭 폐하 만세!”
로벨은 존 도너반 자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까마귀 성에 입성했다. 용병과 영지민을 위한 쇼는 이걸로 충분했다. 이제 현실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이 어디로 가겠소?”
“지금 물러난 곳은 서쪽 평야입니다. 과거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 주둔한 곳이지요.”
새삼스럽지 않았다. 네 자릿수 군대가 집결할 수 있는 곳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적의 본진이 후퇴했으니 ‘불사신’도 물러날 것이오. 호른 경은 유능한 기사라 속도를 내어 달려올 것이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행군속도를 계산했다. 정상속도면 엿새 이상이지만, 호른 경과 어린 집사가 최선을 다해 닦달할 테니 사나흘로 가정했다.
‘선발대만 와도 수비진을 구축할 수 있으니까, 일단 남쪽부터...’
로벨은 평지에서 펼쳐질 다음 전투를 구상했다. 전쟁의 달인다운 모습이었다. 존 도너반 자작은 전쟁을 모르지만 정치는 조금 알았다.
“제임스 가문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로벨은 대꾸하지 않았다. 존 도너반 자작은 왕의 얼굴을 훔쳐보고 더 이상 충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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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예상대로 사흘 후 선발대가 도착했다. 애꾸눈이 이끄는 울프 용병단 북군과 종군상인 스무 여 명이었다.
“어린 집사가 말과 나귀를 모으고 있습니다. 기사들의 전투마까지 뺏으려 들고 있으니 며칠 안에 수레를 끌고 올 겁니다.”
“급한 불은 껐으니까 조금 천천히 와도 돼.”
애꾸눈이 끌고 온 북군이 355명, 로벨의 호위병 21명, 까마귀 성 수비대 110명, 전사자 유품과 전리품으로 징집한 영지민 17명으로 총 503명이었다. 적군에 비하면 절반이 안 되지만, 수비의 이점과 무적무패의 명성이 있어 싸울 만했다.
“우리 남군(南軍)하고 봉신 나으리들이 오면 간단히 이기겠구만!”
외팔이가 히쭉히쭉 웃었다. 전쟁이든 도박이든 이기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로벨은 자신하지 않았다.
“전술적으로 불리한 것은 없어.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는데...”
“불사신 코셰이 말씀입니까?”
애꾸눈이 속마음을 짚었다. 로벨은 정체가 들통 난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구체적으로?”
애꾸눈은 안대를 어루만졌다. ‘그것’에게 크게 당한 후 ‘그것’을 말할 때마다 불편해했다.
“늑대의 왕 같은 괴물이란 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