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44화 (444/605)

444화. 결정

까마귀 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계곡 남쪽에 외성을 세우고, 계곡 북쪽에 아성과 내성을 지었으며, 가파른 절벽으로 사방을 차단했다.

성을 점령하고자 하면 11피트에 이르는 외성을 돌파 후 가파른 계곡길을 오르내리며 요새의 방어시설을 무력화하고 비좁은 아성을 점거해야 했다. 샘 포클과 성 마르틴도 살아생전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후퇴! 후퇴해라!”

“줄다리를 끊는다! 빨리 건너!”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성벽을 부수는데 크고 거추장스러운 투석기는 필요 없었다. 절구통 크기의 구포(臼砲, Mortar) 몇 개면 충분했다.

“재장전! 재장전!”

화약을 채우고, 포탄을 끼우고, 포각을 맞추고, 횃불을 잡았다.

포수는 제 할 일을 끝내고 멀찍이 떨어진 전우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섭섭함은 긴장과 공포에 녹아 금방 사라졌다. 두 눈을 꼭 감고 옛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제발 터지지만 마라...’

그러거나 말거나 일일 전투수당으로 12페닝을 지불한 기사는 냉혹하게 명령했다.

“Fire!”

포수는 발작적으로 화약접시에 불을 붙였다. 시꺼먼 악마의 모래가 타닥- 소리 내더니 불꽃이 되어 포신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광-!

폭발의 압력은 빈틈이 많은 포구에 집중되었다. 구멍을 막은 33파운드 돌덩이를 거세게 밀어냈다. 하늘로 하늘로 높이 솟구친 포탄은 곧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고도(高度)가 곧 파괴력이었다. 육중한 덩치에 안 어울리게 쒸에에- 소리를 내며 지상에 자리한 성벽을 들이박았다. 쿵-! 우르르르...!

까마귀 성 외벽은 계속되는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주저앉았다. 한 덩어리로 뭉쳐진 바위가 수십, 수백 개의 조각으로 쪼개져 흩어졌다. 기타 유기물도 섞여 있지만, 살아 숨 쉬는 것은 몇 개 안 되었다. 까마귀 성 수비대는 진작에 외성을 포기하고 계곡을 사이의 줄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존 도너반 자작, 이름값을 못하는군.”

밤나무 고을의 기사 다미앵 경이 수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주저앉은 성벽 너머로 도망가는 까마귀 성 병사들이 보였다.

“외성을 함락한 자는 많소. 지난 날 볼프 사트로 후작도 성공했었지.”

“계곡 너머의 저 요새가 진짜 철옹성이오.”

까마귀 성 병사들이 마침내 줄다리를 건넜다. 기사로 보이는 자가 무어라 외치니 반짝이는 도끼가 아래로 떨어졌다. 계곡을 지나는 지름길이 사라졌다. 다미앵 경은 아쉬운 듯 혀를 한 번 찼다.

“정공법으로 가야겠소.”

정공법(正攻法). 그럴듯한 말이지만 실상은 대책이 없다는 뜻이다.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무적무... 아니, 볼탄 반도 왕이 오고 있소. 자칫하면 계곡에 갇혀 제2의 쉬폰 경이 될 수 있소.”

별명을 애써 피하는 것은 반대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검은 숲 기사들 얼굴에 그늘이 졌다.

“보, 본인은 아직도 잘 모르겠소. 볼탄 반도 왕과 싸우는 게 잘하는 일인지... 경들도 알지 않소? 그자는 인간이 아니오. 괴물... 괴물이란 말이오.”

겁 많은 기사가 속내를 고백했다. 용감한 기사는 화를 냈지만, 신중한 기사는 동조했다.

“제임스 공작이 침묵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오.”

“어허! 침묵은 곧 긍정이오. 공왕에게 빚이 있어 동조하지 못할 뿐, 내심 우리를 응원하고 있을 거요.”

“제임스 가문의 도움을 못 받는 것은 사실 아니오. 우리 힘만으로 공왕과 싸워 이길 수 있겠소?”

다미앵 경이 수염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왕은 오지 못하오.”

힘을 너무 주었을까, 수염 몇 가닥이 뽑혀 나왔다. 그러나 아무 통증이 없었다.

“동방에서 온 용병들이 공왕을 막을 것이오.”

“그 불사신(The Deathless)인가 뭔가 하는 놈 말이오?”

검은 숲 기사들은 이제야 한 마음이 되어서 용병을 어찌 믿느냐고 항의했다. 공왕은 무서워도 동방의 용병은 무섭지 않은 듯했다. 다미앵 경은 무지한 동료들에게 현실을 일러주었다.

“그자도 공왕 못지않은 괴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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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기사의 기대대로 로벨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최신 무기나 압도적인 병사 때문이 아니었다.

“으악-! 나타났다!”

“제길! 또?”

수레를 끄는 가축이 죽어서 느려진 발에 잦은 기습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쏘는 저격과 소대 단위의 야습이라 물리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이... 이 비겁한 야만인놈들...!”

“이리 와라! 남자답게 싸우자!”

로벨은 새벽녘에 울려 퍼지는 고함에 한숨 쉬었다. 펄프 대장이 상황을 확인하러 나갔으나 기다릴 필요 없었다. 어제 그랬고 엊그제 그랬듯이 화살 몇 발 쏘고 도망갔을 것이다. 호른 경이 한숨 쉬듯 말했다.

“이번에도 실패군요.”

로벨을 따르는 기사와 용병도 바보가 아니었다. 적의 작전을 알고 대응책을 내놓았다. 크로스보우 소대를 먼저 매복시키기도 하고, 기사 종사와 기마 용병을 모아 재빨리 추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적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마냥 신출귀몰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곳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의심 많은 호른 경은 기사 종자와 수행원 중에 배신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로벨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왜 하필 기사 종자요?”

“기사들은 하사받은 봉토가 있으니 배신할 이유가 없습니다. 공왕 폐하를 오랫동안 따른 고참 용병-올드 가드(Old Guard)의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 없으며, 신참 용병은 작전을 알 방법도, 적에게 전할 수단도 없습니다.”

소거법으로 가지를 쳐내면 남은 것은 검은 숲에서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는 기사 가문의 종자들이었다. 허나, 로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호른 경이 배신했을 수도 있잖소?”

로벨은 괜한 의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로벨의 제1기사를 자처하는 호른 경은 크게 충격 받았다.

“어, 어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농담! 농담이오!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아, 아니라니까?”

호른 경을 달래는데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고 다시 대응책을 고민했다. 사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우직하게 전진하는 방법뿐이오.”

날이 밝을 때 이동하고, 해가 지기 전에 방어진을 구축하면 기습을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초봄이라 낮이 짧다는 것이다.

“지금 속도로도 보름이 걸립니다. 여기서 더 늦추시면...”

까마귀 성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병사와 무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성을 좀 먹는 것은 공포와 고독이었다. 로벨 로드릭이, 볼탄 반도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부대를 둘로 나눌 것이오.”

왕과 왕의 기사의 대화를 엿듣던 어린 집사가 움찔했다. 로드릭 가문의 가장 오래된 신하다웠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음... 일단 호른 경은 이곳에서 울프 용병단을 이끌어주시오.”

어린 집사보다 조금 늦지만, 호른 경도 알아챘다. 로벨의 무표정이 실룩이고 있었다.

“직접 별동대를 이끄실 생각입니까?”

“별동대라 할 것도 없소. 내 랜스(Lance=기사를 중심으로 한 소대)에 기사 종자 몇 명만 붙여주시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악동처럼 변한 왕을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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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도너반 자작은 계승권을 가지지 못한 차남과 삼남이 대개 그러하듯 행정관으로 교육받았다. 나이 많은 수사도 감탄할 만큼 셈에 밝았다. 그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이 자꾸 숫자로 인식되었다.

‘적의 병력은 1천 1백 명, 성의 수비병은 112명, 교환비가 1대 10이 나와야 이길 수 있다.’

가슴에 불이 붙어 허우적거리는 적과 허벅지에 꽂힌 화살을 뽑으려고 낑낑거리는 수비병과 투석에 박살난 파비스를 억지로 세우고 버티는 적을 차례로 훑어보고 다시 계산했다.

‘이제 111명. 시간당 3명씩 죽는다. 이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면 엿새 뒤 성문을 지킬 병사가 남지 않는다.’

적이 한낮에만 공격할 때 엿새였다. 게다가 병사보다 무기가 먼저 소진될 것이다.

‘수비병이 줄어들면 그만큼 사상자도 늘어나지. 길어야 사흘인가?’

무의미한 계산이었다. 존 도너반 자작도 알고 있었다. 전쟁은 산수가 아니었다. 무기보다 사기가 먼저 바닥날 것이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

존 도너반 자작은 항복을 생각했다. 승산 없는 싸움으로 피해를 늘릴 바에 목숨을 구걸하는 편이 나았다.

“기사답지 못하군.”

“주군?”

혼잣말치고 조금 컸다. 젊은 기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십...”

쾅-! 콰광-!

계곡 맞은편에 대포가 또다시 불을 토했다. 계곡 아래에 설치하면 포각이 안 나와 저곳에 설치한 모양인데, 바람까지 예측하지는 못한 듯했다. 명중률이 형편없어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저주받을 제임스 공작...”

“제, 제임스 공작 말씀입니까?”

젊은 기사가 의아하게 물었다. 로벨에게 화해할 것을 중용한 그 기사였다.

“저 대포 말이오.”

“예? 아, 예. 저주받을 무기지요.”

중임을 맡길 만큼 머리가 좋은 기사지만, 직업상 생각이 짧았다-생각이 많으면 용감하지 못하다- 존 도너반 자작은 계곡 바람에 빠르게 흩어지는 화약 연기를 보며 말했다.

“검은 숲의 가난한 영주들이 어디서 대포를 구했겠소?”

“그야... 뭐...”

요 며칠째 쏘아댄 포탄이 7, 80발이었다. 그것도 화약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구포였다.

“용병도 300명쯤 고용했지. 저들에게 그만한 재산이 있을 것 같소?”

“그, 그 말씀은... 제임스 공작이 저들의 편에 섰다는 겁니까?”

“직접적으로 돕지는 않았을 거요.”

제임스 공작의 결정도 이해되었다. 해가 갈수록 커지는 볼탄 반도의 영향력이 부담되었을 것이다. 특히 청옥성을 차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북부대로에 이어 북해 무역까지 독차지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검은 숲을 고사시킬 수 있었다.

“당사자도 깨닫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자금을 유통해줬을 거요. 사채업자를 끌어들이고, 대포의 관세를 없애고...”

존 도너반 자작은 자신이 했을 법한 일을 가정했다. 빗발치는 화살에도 용맹함을 잃지 않던 젊은 기사가 뱀 같은 음험함에 하얗게 질렸다.

“제임스 가문이 적이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존 도너반 자작은 젊은 기사의 심정도 이해했다.

“경이라면 어찌하겠소?”

“저 말입니까?”

“검은 숲의 공작과 볼탄 반도의 공왕 중 누구에게 충성하겠소?”

젊은 기사는 난색을 보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도너반 가문에 충성했다. 주인이 볼탄 반도에 충성하니 자신도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검은 숲에서 나고 자란 검은 숲 토박이였다.

“저는... 그저...”

젊은 기사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정체성과 관련된 일이니 당연했다. 존 도너반 자작은 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계곡 맞은편, 무너진 외성이 시끌시끌했다.

“나는 오래전에 결정했소.”

“어느 쪽을...”

젊은 기사는 질문하다가 아차! 했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지금 싸우는 상대가 누구지 뻔히 보였다.

“죽은 당숙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소. 그리고 내 선택도 틀리지 않았지.”

볼탄 반도의 왕, 무적무패의 왕, 로벨 로드릭의 깃발이 계곡 저편에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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