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희망
쉬폰 가문의 혓바닥 성은 2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성 수비병은 성난 용병들이 달려오자 그제야 부랴부랴 성문을 닫았는데, 빗장을 채우고 버팀목을 세우기까지 시간이 부족했다. 성문 안팎에서 밀고 버티는 힘 싸움을 벌어졌다. 도끼로 찍고, 망치로 두드리고, 칼날이 비집고 들어가 사람의 살을 헤집었다. 결국, 잘 먹어서 힘이 좋은 용병들의 승리로 끝났다.
“다 죽여!”
“비열한 놈들!”
그 뒤로는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었다. 성 곳곳으로 도망간 병사들을 끄집어내어 목을 긋고 배를 쑤셨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탑 위의 깃발을 바꾸고 피해를 집계하니 무려 37명이 죽었다.
“정말 너무해요!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치료하며 싸움개에게 따졌다. 싸움개 일당은 귓구멍을 후비며 딴청을 피웠다. 고용주가 살해당할 뻔해서 흥분한 감이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여기저기 꼭꼭 숨어있던 놈들입죠.”
“...숫자를 물은 거야.”
“아, 앗! 10명쯤 됩니다!”
“그래? 내년 봄에 힘들겠어.”
쉬폰 마을의 남자들이었다. 광산 앞에서 죽은 병사와 오늘 죽은 병사를 합치면 마을의 성인 남자는 대부분 전사했다고 봐야 했다. 향후 몇 년 동안은 가혹한 날이 될 것이다.
“세금을 감면하고 노역을 면제해줘. 은퇴하는 용병이 있으면 이곳에 정착을 권하고.”
리암 수사가 잉크병을 꺼내 세필로 기록했다. 어린 집사도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한 수사지만 깜박한 게 있었다. 몰트 도너반 남작이 그걸 지적했다.
“이곳을 직접 통치하실 생각입니까?”
기사(knight)가 계급이 아니라 직업이던 시대, 한 뼘짜리 땅에서 왕이라 자칭하던 시대, 옛 신의 교리보다 겔몬 족의 관습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땅을 뺏기가 아주 쉬웠다. 죽이고, 그냥 살면 되었다.
그러나 관습이 법이 되고, 교리와 윤리가 자리 잡은 지금은 아니었다.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간 통치한 주인이 있는데 멋대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정통성 문제였다.
그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합법적으로 양도받거나 권리와 배상금만 챙겨서 땅은 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호른 경이 로벨을 옹호하며 말했다.
“쉬폰 가문의 사내는 모두 죽었소.”
“선대로 올라가면 후계자가 있소. 그들이 쉬폰 가문의 정통성을 내세울 거요.”
그러자 슐츠 경이 실소했다.
“설마.”
“설마?”
“아무 힘도 없는 시골 기사가 무적무패 왕에게 권리를 주장할 리가.”
쉬폰 가문의 부자(父子)가 나란히 박살났다. 비유법이 아니라 진짜 박살(撲殺)이었다. 얼굴이 뭉개져서 직계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 꼴을 보고도 몇 대 전에 상실한 토지권리를 주장할 간 큰 기사는 없었다.
“검은 숲의 사정은 남작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오. 그러니 솔직해집시다. 무엇을 걱정하는 것이오?”
기사와 수사와 마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검은 숲에서 태어났으나 볼탄 반도 왕에게 충성한 기사가 한숨 쉬었다.
“까마귀 성의 자작과 같은 걱정이오.”
“존 도너반 자작?”
깡통을 쓴 기사들이 머리를 한 바퀴 굴렸다.
“고작 성 하나 점령했다고 볼탄 반도와 싸우겠소?”
“경이 그리 말하면 안 되지. 검은 숲을 불 싸지르겠다고 했으면서.”
“그, 그건 그냥 한 말이었소. 공왕 폐하가 화내는 것보다 본인이 화내는 게 보기도 좋고...”
“어어억? 그러하다 것이었다?”
조용한 아자르 경까지 합류해서 떠드니 정신이 없었다. 로벨이 직접 교통정리 했다.
“제임스 공작에게 사정을 설명할 거야. 그리고 항의하는 검은 숲 영주도 하나하나 설득하겠어.”
“설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마구 싸울 순 없잖아.”
지금까지 막 싸워온 것 같긴 하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이 성의 관리는 누가 하나요?”
로벨은 주위에 모인 사람을 하나씩 보았다. 리암 수사, 마녀 키르케, 허풍쟁이와 싸움개 등은 기사가 아니라 제외되고, 호른 경, 슐츠 경, 도너반 남작은 이미 다스리는 영지가 있어서 곤란했다. 그런 로벨의 생각을 읽었는지 모두가 남은 한 사람을 보았다.
“나? 나는 왜입니다?”
아자르 경이 어울리지 않게 당황했다. 리암 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토를 하사할 때가 되긴 했어요.”
그동안 급료를 주긴 했지만 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종자를 들이고 말을 키우려면 작은 농장이라도 있어야 했다.
“작은 성, 가난한 마을이지만 그래도 ‘아자르 가문’을 일으킬 기반이 될 것이오. 이 땅을 받으시겠소?”
어눌한 말투 때문에 오해받지만, 아자르 경은 결코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유라피아 대륙에서 영지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로 귀족이 되는 것이다.
“나의 폐하! 아주 감탄입니다!”
아자르 경이 무릎을 꿇었다. 암살혐의로 죽을 뻔한 것을 살려주고, 기사로 명예롭게 대우하며 봉토까지 하사하니, 평생을 봉사해도 갚기 힘든 은혜였다.
“마침 기사 셋이 모였으니, 슐츠 경, 호른 경, 도너반 경이 증인이 되어주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기사 나마르 아자르가 혓바닥 성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정식으로 영주가 되려면 복잡한 서류 작업이 필요하지만, 그건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이 할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까마귀 성의 기사는 영지 하나를 하루 저녁에 꿀꺽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다. 뒷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주군께 보고 드려야... 하아...”
까마귀 울음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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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계곡 전쟁이 끝났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에서 10명을 자원 받아 아자르 경과 함께 혓바닥 성에 주둔시켰다. 전쟁 직후라 도적질하는 기사와 탈영병이 있겠지만, 아자르 경과 정예 울프 용병단이면 무난하게 지켜낼 것이다.
슐츠 경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광산으로 돌아갔다. 피리 부는 쟝을 비롯한 기존 파견 병력을 그대로 딸려 보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있었다.
몰트 도너반 남작은 기사 종자를 데리고 제임스 공작의 흑단성으로 향했다. 전쟁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혹시 모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
리암 수사는 남은 인원을 보고 한숨 쉬었다.
“결국, 이거밖에 안 남았네요.”
호른 경, 마녀 키르케, 리암 수사, 그리고 허풍쟁이를 비롯한 20명 남짓이었다. 공왕의 수행원치고 조촐했다. 그래도 로벨은 익숙했다.
“어린 집사랑 단 둘이 다닐 때도 많았어.”
“옛날 옛적 토너먼트 찾아다닐 때요?”
“지금 생각하면 가진 것이 없어도 그때가...”
로벨이 구름이 잔득 낀 하늘을 보며 추억에 잠기자 젊은 측근들은 ‘늙은이도 아니고...’ 중얼거렸다. 오해였다. 로벨은 불현듯 안장주머니를 뒤적이고 말했다.
“다시 생각하니까 지금도 가진 게 없구나? 딱히 그립지가 않아.”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다.
“기사님은 아직 젊잖아요. 추억을 파는 것은 흰머리가 잔뜩 나고 관절이 아야야 할 때쯤 하세요.”
“그거 내 얘기요?”
어엿한 중년이 된 허풍쟁이가 투덜거렸다. 나이 때문인지, 행군을 많이 해서인지 날씨가 안 좋으면 무릎이 쑤셨다.
“지금도 무릎이 아픈 게 비가 올 것 같수다.”
“이 계절에 무슨 비가 와요? 와도 눈이 오겠죠.”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하얀 눈송이가 나풀나풀 내려와 모닝스타 머리에 앉았다.
로벨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 뒤에 햇살이 아련하고, 바람 따라 휘날리는 눈송이가 찬란했다.
“어? 진짜 눈이 와요!”
마녀 키르케가 환하게 소리쳤다. 반대로 아야와 이야카의 꼬리는 아래도 축 처졌다.
“올해 첫눈이군요.”
호른 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격렬한 여름과 서글픈 가을이 지나 마침내 겨울이 시작되었다.
“올해도 다 갔구만요. 어휴! 이제 좀 쉬겠습니다요.”
허풍쟁이가 진저리치며 말했다. 올해는 유독 사건이 많았다.
로벨은 두 눈을 감고 이마와 뺨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느꼈다.
“응. 집에 가서 푹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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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희망사항이었다.
기사에게 성은 집인 동시에 직장이었다. 근 30일 만에 출근해서 쉰다는 것은 꿈이고 희망이었다. 더욱이 대형 사고를 치고 온 입장에서 말이다.
“기사들을 죽였다고요?!”
어린 집사가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그 일에 유감이 많은 마녀 키르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자질했다.
“기사님만 살해한 게 아니에요! 싸울 생각이 없는 병사도 마구 죽였어요! 저 싸움개 아저씨가요!”
어린 집사는 성인(聖人)이 아니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시선을 던진 후 말했다.
“병사는 아무래도 좋아요. 지 팔자죠. 근데 기사랑 기사 종자는 왜 죽여요? 몸값 받아야죠!”
“너, 너무해!”
“아니, 몸값이 없어도 그래요. 기사를 죽이면 여기저기서 반발이 심한 거 알잖아요? 검은 숲의 제후들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요? 제임스 공작은? 포비아 국왕은요?”
로벨은 대꾸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호른 경이 화를 냈다.
“시종 주제에 건방지군! 폐하께서는 암살당할 뻔했다! 일가친척을 모두 도륙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진데 주모자와 수하를 죽인 일을 타박하는가!”
까마귀 성 기사한테는 통했지만 어린 집사는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더욱 크게 화를 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화가 나서 싹다 죽였다는 소리잖아요? 그것도 점령할 영지의 주민까지? 이성이 있고 상식이 있으면 부끄러워해야죠! 지금 ‘나 무식하다’ 자랑하는 건가요? 끄아아악! 진짜 뭐야?”
전문용어로 맞불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호른 경 더 큰 화에 밀려 주춤했다. 늑대성의 실세가 누군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더 큰 문제는 검은 숲의 영주들이에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요. 다음 차례는 자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요.”
“에이, 설마...”
“그 설마가 얼마나 사람 잡았는지 알아요?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요?”
무적무패란 별명이 무색하게 풀이 죽자 리암 수사가 정수리를 한번 닦고 끼어들었다.
“몰트 도너반 남작이 흑단성으로 갔어요. 제임스 공작과 검은 숲 귀족원의 이해를 구할 겁니다. 그걸로 모자라면 각 영주들에게 선물을 보내 친목을 다져보죠.”
“설득이 안 되면? 그때는 어떡해요?”
자신 있는 분야가 나왔다. 로벨이 고개를 번쩍 들고 기쁘게 말했다.
“그건 걱정 마! 겨울이잖아? 내년 봄까지 못 싸워! 여유가 있어!”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어 빽! 소리쳤다.
“전쟁을 막을 방법을 생각하라고요!”
한편, 로벨의 귀환 소식을 듣고 찾아온 펄프 대장과 페리 행정관은 아성 밖에 쭈그리고 앉았다. 뿔난 어린 집사가 있는 성은 화난 용의 성만큼 위험했다.
“어라? 두 분 뭐하십니까요?”
“쉿! 쉿!”
그람 형제까지 네 사람이 쪼그리고 앉았다. 아성의 두터운 문짝 뒤로 어린 집사의 포효가 들렸다.
“이게 다 슐츠 경 때문이야! 아! 슐츠 경을 곱게 포장해서 검은 숲 귀족원에 보내요!”
“아, 안 돼... 친구잖아...”
“친구가 밥 먹여줘요? 페닝을 줘요?”
펄프 대장은 차가운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분위기를 보아 착석할 사람이 더 늘어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