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37화 (437/605)

437화. 연어

근 백 년 동안 연어를 잡아온 연어의 고장답게 온갖 연어요리가 있었다. 굽고 찌고 말리고 훈연하는 것은 기본이고, 살을 발라내 타르트로 만들거나 뼈째 가루 내어 스튜로 만들기도 했다.

“저기, 나으리, 입에 맞으십니까?”

쉬폰 마을의 촌장이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싹싹하게 물었다. 온몸에 강철을 두른 기사 패거리와 흉악한 외모의 용병 패거리를 맞이한 시골 촌장의 기본자세였다.

사실 적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마을 주민을 아성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전술이고 상식이다. 그러나 이곳 기사 가문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연어잡이가 더 중요했는지 여자와 아이들을 마을에 그대로 두었다.

“응. 맛있어.”

로벨이 생선뼈를 깨끗이 발라 뒤로 던지며 말했다. 이만하면 가장 깐깐한 수도원의 가장 꼬장꼬장한 수도사도 아무 말 못 할 교양이었다. 외해에서 온 아자르 경은 삶은 연어를 머리부터 뼈째 씹어 먹었고, 호른 경과 슐츠 경은 이상한 경쟁이 붙어 연어파이를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게걸스럽게 집어갔다. 손이며 얼굴이며 기름 범벅인데, 손수건이 없어 대충 갑옷에 문질렀다. 참으로 기사다운 자태였다.

‘그래도 저것들에 비하면 낫지...’

울프 용병단은 한술 더 떠서 상대방의 입안에 있는 것도 빼먹으려 들었다. 주먹질이 몇 번 오가고, 사나운 웃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심지어 팔뚝만한 연어의 꼬리를 잡고 북채처럼 휘두르는 용병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주민은 겁을 잔뜩 먹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로벨 일행 모두가 지저분한 것은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와 리암 수사는 그릇을 앞에 두고 얌전히 살을 발라냈다. 아야와 이야카도 두 발을 얌전히 모으고 품위 있게 생선 대가리를 씹어 먹었다. 아드득- 콰드득-

“뭐가?”

“음... 마을에 먹을 것이 풍족하니까 성 안의 사람들과 싸울 필요 없잖아요.”

로벨이 의도한 것과 같지만, 발상이 조금 달랐다. 로벨은 혓바닥 성의 식량을 빼앗아 항복을 받아낸다 생각했는데, 마녀 키르케는 마을의 식량을 나눠줘서 회유한다 생각했다. 기사와 자유민의 차이인지, 영주와 마법사의 차이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이 연어는 본래 기사의 것이 아니지.”

“응? 당연하잖아요? 연어는 자유로운 강과 바다의 짐승인걸요. 그걸 잡은 것은 저 사람들이고요.”

저 사람들은 험상궂은 용병 탓에 마을 공용 식탁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손가락만 빨았다.

로벨은 새로 가져온 연어를 가만히 보다가 허풍쟁이를 불렀다. 뭣 때문인지 피리 부는 쟝을 두들기던 허풍쟁이가 나중에 보자고 눈알을 부라린 후 로벨에게 달려왔다-껄껄 웃는 쟝을 보아 부당한 구타는 아닌 듯하다-

“저 사람들한테 이걸 나눠줘.”

로벨은 은화 주머니를 꺼내주었다. 허풍쟁이의 두 눈이 솔방울만 해졌다.

“고작 물고기 몇 마리인데요?”

“...몇 마리가 아니잖아.”

로벨이 자비로운 것은 알지만, 이렇게까지 선심을 쓸 줄 몰랐다.

먼 후대의 자본주의자라면 ‘처먹었으면 당연히 값을 치러야지!'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기사 시대의 칼잡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연어를 바리바리 싸들고 떠난다면 양심상 은화를 조금 주거나 쓸모없는 차용증을 끊어줄 수 있지만, 마을에 머물며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굳이 페닝을 지불할 필요 없었다. 기사라면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이었다. 심지어 농민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칼 찬 야수를 굶기면 사나워져서 그런 감도 있긴 하지만...

“며칠을 머물지 아직 몰라. 우리 얘들이 소식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페닝은 내야지.”

상식보다 체면이 중요하고, 법보다 칼이 빠른 시대에 로벨은 성자라 할 만했다. 허풍쟁이는 새삼스레 존경 어린 눈빛을 보인 후 마을 주민을 찾아갔다. 은화자루를 높이 흔들며 무어라 설명하는데, 대충 로벨의 자비심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엄지손톱만한 은화를 하나씩 받은 마을 주민이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볼탄 반도 왕 만세’를 외쳤다. 호칭이 정확한 것은 허풍쟁이의 공로였다.

그 광경을 본 슐츠 경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저렇게 착한 기사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로벨이 화내는 모습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다음 날 아침 로벨이 크게 화를 냈다.

“중재?”

로벨의 가느다란 눈썹이 최고 경사를 그렸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거푸집에 부어진 쇳물처럼 잔잔하면서 화끈했다. 이 분노는 식어도 뾰족하게 남아 상대를 해칠 것이다.

까마귀 성에서 온 도너반 가문 기사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제 주인이신 존 도너반 자작의 뜻입니다.”

그 말에 충성스러운 로드릭 가문 기사 호른 경이 실소했다.

“하, 어이가 없군. 까마귀 성은 폐하의 기사가 아니었소? 지금 주인을 향해 짖는 중이오?”

아자르 경이 철퇴를 꽉! 쥐었고, 싸움개 패거리가 출입구를 슬그머니 틀어막았다. 주인의 분노를 감지한 아야와 이야카가 송곳니를 보이고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자연친화적인 촌장집에 각종 살의가 넘실거렸다. 까마귀 성 기사는 필사적으로 주군의 설명을 기억해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 평소 이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갔다.

“공왕 폐하께서 뱀의 계곡을 차지할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난 계곡을 가질 생각 없소.”

로벨이 차갑게 말했다. 쇠붙이가 점점 완성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초조함이 감돌았다.

“폐하께서 그럴 의도가 없어도 검은 숲의 영주들이 볼 때 침략처럼...”

“이 전쟁은 제임스 공작도 이해해 준 일이오.”

“검은 숲에는 제임스 가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로벨 역시 볼탄 반도의 수많은 영주를 통제할 수 없었다. 충성 서약에 의거해 소집령을 내려도 안 올 영주는 안 오는 것이 실태였다.

“이것은 충심으로 올리는 조언이자 우정으로 드리는 제안입니다. 쉬폰 가문과 화해하시고 광산개발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약속해 주십시오.”

호른 경이 기어이 폭발했다. 워 해머를 뽑아 뾰족한 머리로 기사를 겨냥했다.

“우리의 왕보고 일개 기사와 화해하라?”

작위를 가진 기사에게 지나친 무례였다. 하지만 아무도 호른 경을 말리지 않았다.

“혓바닥 성을 무력으로 점령할 경우 여우 강 일대와 떡갈나무 숲의 기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까마귀 성은 당연히 공왕 폐하의 편에 설 것이나, 자칫 검은 숲과 볼탄 반도의 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렇다면 검은 숲을 깡그리 불태울 뿐이다!”

호른 경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저리 화를 내니 당사자가 나설 건더기가 없었다. 로벨의 눈썹이 조금 내려왔다.

“나도 체면이 있소.”

“그 말씀은...”

“생각을 잘해서 제안하란 말이오.”

로벨의 분노가 가라앉자 도너반 가문 기사 얼굴이 살짝 펴졌다.

“제 주인이신 존 도너반 자작이 중재하여 쉬폰 가문의 장자 첼스 쉬폰 경이 자비를 구할 겁니다. 그럼 폐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그리하면 검은 숲의 영주는 모두 안심하고 폐하의 아량을 칭송할 겁니다.”

로벨은 의자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쉬폰 가문 일당이 굶주림을 못 참고 나오면 조금, 아주 조금 비웃은 후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존 도너반 자작의 제안도 나쁘지 않았다.

‘몸값을 못 받아서 어린 집사가 서운해 하겠지만...’

검은 숲의 여러 영주와 싸우는 것보단 나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소.”

거푸집에서 나온 칼을 잘 갈무리했다. 아자르 경을 비롯한 여러 기사와 용병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죽다 살아난 까마귀 성 기사는 한숨처럼 외쳤다.

“과연 현명하고 자비로우십니다. 볼탄 반도 폐하 만세!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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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한 것과 다르지만 종전 분위기가 되었다.

까마귀 성 기사는 쉬폰 마을과 혓바닥 성을 여러 차례 오가며 의견을 조율했다. 겨울이 시작된 터라 양쪽 다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쉬폰 가문의 6대 당주가 된 첼스 쉬폰 경이 성문을 열고 내려와 무릎 꿇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저기 나와요! 저기요!”

혓바닥 성의 성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백기를 높이 든 기사와 기사 종자 세 명이 말을 타고 나왔다.

로벨은 촌장에게 빌린 그루터기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 뒤로 호른 경, 아자르 경, 도너반 경, 슐츠 경이 시립하고, 울프 용병단이 반원 모양으로 주위를 감쌌다.

쉬폰 가문의 젊은 기사, 체인 쉬폰 경의 장남 첼스 쉬폰 경은 삼엄한 경계에 머뭇거리다가 전투마에서 내렸다.

“공왕 폐하...?”

그리고 로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헬멧을 벗고 산발된 머리를 대충 묶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폈다. 피부가 희고 고우며 턱선이 가늘었다. 30대 중반답지 않게 동안이었다. 많아야 25살? 고급스러운 필드 아머가 아니면 늦깎이 종자라 여겼을 것이다.

“본인이 로벨 로드릭 왕이오.”

첼스 쉬폰 경은 안도했다. 이방인 왕을 가까이서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체인 쉬폰 경의 아들 첼스 쉬폰입니다.”

소문처럼 괴물 같지도 않았다. 계집처럼 곱상해서 무적무패의 신화가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안도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비를 구하는 입장에서 아부와 찬양은 당연하지만, 어감이 이상했다.

“제 부친의 빚을 이제야 갚을 수 있겠군요.”

호른 경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급히 워 해머를 잡았다. 하지만 이미 움직인 사람보다 빠를 수 없었다.

“가문의 원수! 죽어라!”

세상에는 명예로운 기사만 있는 게 아니다. 항복을 가장한 암살시도는 흔한 일이었다. 불과 닷새 전에 부친을 잃은 아들이라면 충분히 시도할 만했다.

팔뚝 길이의 숏소드가 로벨의 가냘픈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암살교본 같은 게 있는지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우수시범으로 삼을 만큼 깔끔했다. 그러나 젊은 암살자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가 많았다. 슐츠 경의 롱소드가 빛살처럼 튀어나와 암살검을 쳐냈다. 그리고 아자르 경의 메이스가 무방비한 얼굴을 후려갈겼다. 눈코입이 모두 세 마디쯤 함몰되었다.

“쉬, 쉬폰 경!”

까마귀 성 기사가 소리쳤다. 그러나 허풍쟁이와 싸움개 외침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암살자다!”

“이 비겁한 놈들! 쏴라!”

쉬폰 가문의 닷새짜리 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그를 따라온 기사와 기사 종자가 남아있었다.

“자, 잠깐! 우리는 모르는...!”

“경! 도망치십시오!”

말머리를 급히 돌렸으나 쿼럴보다 빠르지 못했다. 허풍쟁이가 쏜 첫 번째 쿼럴이 채찍을 높이 든 기사의 겨드랑이를 뚫었다. 이어서 쏘아진 쿼럴이 기사와 기사의 말을 무차별로 두드렸다. 갑옷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안장에서 굴러 떨어지며 머리를 찍고 기절했다. 반면 갑옷이 부실한 기사 종자는 허파와 창자에 구멍이 숭숭 나서 사격개시 7초 만에 절명했다.

“아, 아...”

까마귀 성 기사가 침음을 흘렸다. 표정을 보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로벨은 그루터기 의자에서 일어나 얼빠진 까마귀 성 기사에게 다가갔다.

“경이 증인이오.”

“...예?”

“자작의 충언대로 화해하고자 했으나 쉬폰 가문은 명예롭지 못하게 함정을 팠소.”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부정할 수 없었다. 까마귀 성 기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은 싸움개에게 손짓했다. 시체 한 번. 그리고 혓바닥 성 한 번.

“해가 지기 전에 점령해.”

주인 잃은 성이었다. 싸움개는 죽은 쉬폰 경 얼굴에 침을 퉤! 뱉고 용병들에게 외쳤다.

“비겁한 쉬폰 가문 놈들을 해치운다! 가자!”

화가 잔뜩 난 용병들이 화를 풀기 위해 떠났다. 삽시간에 주위가 휑해졌다. 로벨은 볼품없는 몰골로 방치된 쉬폰 경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이럴 생각은 없었소. 경이 선택한 길이오.”

왠지 변명처럼 느껴져서 조그맣게 한마디 덧붙였다.

“...미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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