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4화 (424/605)

424화. 제독

청옥성의 이름은 기만(欺瞞)이었다.

마구간보다 조금 큰 아성에 30가구 될까 말까 한 작은 마을이 전부였다. 청옥은 고사하고 쇠붙이조차 보기 힘들었다. 혹자는 푸른 바닷물이 청옥과 같아 청옥성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곳은 차디찬 북해라 바닷물도 묵빛이었다.

“그럼 왜 청옥성이에요?”

“초대 맥켈런 남작이 블루 사파이어를 팔아서 이 섬을 샀다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 설이야.”

그래도 북해안의 섬 중에서는 큰 편에 속했다. 잉그비아 왕국으로 가는 항로와 가까워 해적에게 쫓기거나 풍랑을 만났을 때 오아시스가 되기도 했다. 특히 주드 멕켈런 남작이 이끄는 청옥성 함대는 해적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 감히 검은 깃을 자랑하지 못했다.

“저기 검은 깃이 많은데요?”

“......”

얼마 전까지 그랬다는 뜻이다.

청옥성 앞바다에 십 수 척의 무장선이 떠다녔다. 시위라도 하듯 검은 바탕의 해골기(=졸리 로저)를 높이 걸고 간간이 대포를 쏘았다.

“영웅의 빈자리란 건가?”

“슬프구만.”

“우리 기사님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해적이 가진 대포는 참새도 못 잡을 소구경 화포고, 그마저도 화약이 부족해 많이 쏘지 못했다. 싸구려 목숨을 적극 활용한 백병전도 불가능했다. 해적선보다 2배쯤 큰 바다사자 호가 항로를 막고 있었다. 가까이 오면 화살과 포탄을 쏟아 부었다.

“저 앞까지 가면 안전하긴 하겠는데...”

“거기까지 어찌 가느냐가 문제 아니오.”

거리가 제법 있는데 청옥성을 둘러싼 해적들은 벌써부터 견제를 시작했다. 더 다가가면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로벨이 일당백 무적무패의 기사라도 십 수 척의 해적선을 모두 무찌를 수 없었다.

“싸울 필요 없어.”

로벨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로벨의 모습을 종종 본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은 기막힌 작전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럼요?”

로벨은 전리품이 된 하이델 남작의 갤리선을 보았다.

“배웠으면 써먹어야지.”

@

로벨의 명령으로 기(旗)가 바뀌었다.

“내 배에 졸리 로저라니! 내 배에 졸리 로저라니!”

12년 경력에 코그 선장이 기가 막혀 한탄했지만, 목숨이 귀한 선원과 용병은 듣지 않았다. 북풍에 휘날리는 해골기가 웅장했다.

“이게 통할까요? 해적놈들은 상도덕이 없어서 같은 해적도 털어먹는데...”

“큰 먹이가 있으니 욕심내지 않을 거야.”

로벨은 북해를 호령하는 사자에서 승냥이의 먹잇감이 된 섬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포로를 데려와.”

“포로요?”

“갑판에 일렬로 세워. 무기는 주지 말고.”

싸움을 피할 때는 반드시 상대보다 강할 필요가 없다. 싸우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란 위협이면 충분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똑같았다. 스무여 명의 용병이 늘어서자 해적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어설프게 피를 보면 또 다른 해적의 먹이가 될 수 있었다.

“정말 야생이네요. 동족상잔하는 상어떼도 아니고.”

상어떼를 무사히 뚫었으나 성난 고래가 남아있었다. 로벨의 기(旗)발한 작전이 계속되었다.

“이제 됐어! 깃발을 바꿔!”

졸리 로저를 내리고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올렸다. 혹시나 못보고 불을 당길까봐 백기도 함께 올렸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화낼지도 모르는데...”

“응?”

“청옥성이 우리 편이란 증거가 있나요?”

청옥성 내부에도 청옥성의 주인 자리를 탐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 남작만큼이나 로벨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어린 집사의 무서운 상상력이 전파되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외해를 향한 새까만 포구가 괜히 불길했다.

“쏘, 쏘지 않겠죠?”

“뭐하냐! 백기 흔들어! 더 세게 흔들어!”

제때 바꾼 로드릭 깃발 때문인지, 아니면 땀을 뻘뻘 흘리며 흔든 백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다사자 호의 대포가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푼돈 좀 벌려고 기사 일행을 태운 선장과 선원은 스릴 넘치는 모험에 지쳐 숨을 헐떡였다.

“내 다시는 기사들을 태우지 않으리라!”

선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러나 똑똑한 항해사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저 기사 나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라 주먹을 불렀다. 나이 지긋한 고급 선원들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사이, 코그 선과 나포된 해적선은 바다사자 호의 후미를 지나 항구로 들어갔다.

마을 규모에 비해 정비가 잘 된 부두였다. 한쪽에는 고기잡이배가 줄지어 묶여있고, 다른 한쪽에는 청옥성 함대가 닻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장한 기사와 병사 십 수 명이 있었다.

“멕켈런 가문의 기사야. 이름이 아마...”

“이름이 중요해요? 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죠!”

어린 집사 히스테리에 선원과 용병이 모두 동조했다. 무기를 꼬나들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배가 부두에 닿았다. 갑판장이 긴가민가하며 밧줄을 던지자 병사 하나가 달려와 말뚝에 감았다. 항구 밖으로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마침내 다리를 놓고 배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땅을 밟았지만 감격할 여유가 없었다. 청옥성의 기사 펠릭스 경이 다가왔다.

“로벨 로드릭 공왕 폐하?”

“그렇소. 본인이 로벨이오.”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돌연 무릎을 꿇었다. 철푸덕-! 호른 경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쥐었다가 머쓱해서 바다 풍경을 감상했다. 우습지만 이 극적인 순간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폐하! 폐하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나이다!”

어린 집사의 추리가 맞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은 자존심 강한 기사가 ‘남의 왕’에게 무릎을 꿇을 리 없었다.

“맥켈런 남작은?”

“그분의 뜻에 따라 북쪽 바다에 수장(水葬)했습니다.”

옛 신의 교리를 따르는 나라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자는 심판의 날에 부활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먼저 간 선원들과 함께 영원토록 청옥성을 지키겠다고... 크윽...”

감동적이지만 서운한 이야기였다.

‘작별인사를 못 했어...’

로벨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어린 집사가 ‘북쪽은 좀 더 왼쪽이요’ 라고 충언할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펠릭스 경이 주섬주섬 일어나 말했다.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폐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로벨은 그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고인의 유지요?”

“예.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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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숨을 고를 겸 목상을 올려다보았다.

이곳 북부에서는 영주가 죽으면 영주의 생존 모습을 조각으로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옛 신의 교회에서는 이교도의 의식 같다고 질색하지만, 천 년 가까이 이어진 풍습이라 쉬이 바뀌지 않았다. 그 덕분에 검은 성의 화려한 조각 정원이 생겼으니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보통은 돌로 만드는데...”

“여긴 섬이니까. 나무가 더 귀할 거야.”

혹은 조각사의 솜씨가 조약해서 목재 밖에 못 다루는지도 모른다. 생전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아 유력했다. 로벨은 목상에서 눈을 떼어 유언장을 읽었다.

“...뒤셀 남작은 우수한 기사지만 위대한 영주가 아니고, 푸센 남작은 유능한 뱃사람이지만 훌륭한 지휘관이 아니며, 하이델 남작은 상재에 밝으나 싸울 줄 모르니, 청옥성과 북해의 안전을 맡기기 마땅치 않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결심하는바, 나의 벗 로벨 로드릭 공왕에게 청옥성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양도한다.”

로벨은 점차 흐려지는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내 아들을 빼앗아 갔으니, 왕이 아들 역할을 해주어야겠소.”

중간에 글자가 튀었다. 어린아이처럼 낄낄거린 모양이다. 그리고 잉크를 새로 묻힌 듯 진지해졌다.

“지금껏 육지를 지켜온 것처럼, 부디 북쪽 바다도 지켜주시오.”

그걸로 끝이었다.

로벨은 양피지에 쓴 유언장을 고이 접어 목상 앞에 놓고 돌아섰다. 청옥성의 기사들이 엄숙한 얼굴로 롱소드를 빼들었다.

“기사 펠릭스, 청옥성의 주인이신 공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 야울, 청옥성의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 니콜라스, 청옥성의 적법한 계승자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 다니엘, 청옥성의...”

칼을 맞댄 기사도 있고, 말머리를 나란히 한 기사도 있었다. 저들이야말로 북해의 사자가 남긴 유산이었다.

“무릎을 꿇으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수직으로 세웠다. 기사들은 칼자루를 거꾸로 쥐고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충성서약식이었다.

“나 로벨 로드릭은 주어진 생이 다 하거나 심판의 날이 도래할 때까지 한 치 부끄러움 없는 명예로 경들을 대할 것을 약속하오.”

정석대로 하면 옛 신의 사제와 원로 기사, 성경과 성물 등이 필요하지만, 전시라서 간략하게 치러졌다. 그렇다 해도 왕인 로벨의 정통성이 있으니 아무도 무효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 일어나시오.”

청옥성의 기사들은 감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제 늑대성의 기사들이었다. 새로운 주인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보였다. 속물적인 자는 향후 청옥성의 관리인 자리를 탐내기도 했다. 공왕인 로벨이 외딴 섬에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 욕심낼 만했다. 그러나 당장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기사들이 칼을 회수하기 전에 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저 밖의 무도한 해적과 욕심 많은 세 남작을 처리합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빙그르 돌려서 칼날을 곧게 뻗었다. 유언장을 읽기 위해 밝혀둔 조명에 검광이 번쩍였다.

“고인이 된 남작에게 배운 것이 많은데...”

기사들은 자신의 애병이 초라해져서 슬그머니 내렸다. 로벨은 하얀 칼날로 검은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중 하나가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것이오. 출격을 준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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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변변치 않은 청옥성의 진짜 재산은 사람이었다. 바닷바람에 단련된 사내들은 물론이고, 여인 중에도 뛰어난 뱃사람이 많았다.

“인어해 남쪽에서는 여자가 배에 타면 불길하다고 하는데...”

“그쪽 남자들도 보름에 한 명씩 실종되면 생각이 바뀔 걸요?”

“잘난 척하는 뱃놈이 제일 먼저 상어밥이 된다니까.”

청옥성의 여인들은 깔깔 웃으며 노를 저었다.

바다사자 호 같은 대형 범선은 혼자 힘으로 부두를 떠나지 못했다. 보트에 밧줄을 엮어 정박지까지 견인하는데, 그 일을 여자들이 맡아 했다.

“남자들은 뭐하고?”

“거시기 달린 놈은 싸워야죠!”

14, 5살쯤 된 소년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 억지로 끌려온 것 같지 않았다. 육지에서 온 로벨과 호른 경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뱃사람 기질이란 걸까요?”

“청옥성 기질일지도...”

육지와 달리 노를 젓거나 밧줄을 당길 줄 알면 싸울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무장이 빈약해도 훌륭한 전투원이었다. 그 덕분에 고작 200명 남짓한 마을에서 70여 명이 전투에 나섰다. 해전에 한해서 울프 용병단 못지않은 정예였다.

“기함 뒤에 바짝 붙어! 꼬리를 내주면 안 된다!”

“가장 먼저 오는 놈을 박살낸다! 다른 놈은 신경 쓰지 마라!”

각 함선에 배치된 기사들이 쩔렁쩔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로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땅에서 싸운 게 정말 다행이었어...”

바다사자 호의 선장 펠릭스 경이 활짝 웃었다. 무적무패로 명성 높은 기사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기함 바다사자 호 외 전함 4척이 전투준비를 마쳤습니다. 제독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호칭이 낯설고 간지러웠다. 로벨은 선교에 올라서서 먼 바다에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세 배 많지만, 지휘체계가 없었다. 청옥성이 공세에 나서자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난 배를 몰 줄 모르오. 그러니까 잘못된 명령이 있으면 즉시 말리시오.”

선장과 선원이 시원하게 웃었다. 새 주인이 나타난 탓일까, 아니면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 분위기에 감화된 탓일까, 사기가 매우 높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초상집 분위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애써 근엄하게 명령했다.

“전 함대, 전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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