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일도양단
코그 선(船)은 강 하구와 해안을 오가는 작은 운반선이었다.
수 세기 전에는 수천 명의 기사를 태우고 인어해를 건너 동방원정을 가기도 했지만, 초대형 갤리선과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카락선이 등장하면서 고기잡이 내지 근해무역용으로 바뀌었다.
로벨 일행이 빌린 코그 선도 그러했다. 가까운 섬과 어촌에 생필품을 나르는 배였다. 대포나 바리스타 같은 대형병기는 당연히 없고, 활이나 쇠뇌 같은 투사무기도 변변치 않았다.
“안 좋은데...”
로벨 일행과 선원 7명이 전부인데,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전력에 포함이 안 되고, 호른 경은 낯빛이 창백한 게 쇳덩이를 휘두를 상태가 아니었다. 선원이 가진 무기는 짤막한 작업용 망치와 단도였다.
“도망칠 수 없어?”
“바람이 왼쪽에서 붑니다. 배를 돌리려면 해적놈들 쪽으로 돌아야 하죠. 그리고 저쪽은 갤리선입니다. 연해에서 노 젓는 놈들을 따돌릴 수 없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선장과 선원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로벨은 성큼 가까워진 ‘가짜’ 해적선을 보며 지시했다.
“모두 선실로 들어가.”
“예, 예?”
“선실로 들어가서 입구를 막아. 식탁이든 나무통이든 아끼지 말고 바리게이트를 만들어.”
선장은 농성하자는 뜻으로 이해했다.
“저, 저기, 나으리,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요. 여긴 바다입니다. 나으리의 성이 아닙니다요. 숨어서 해결되지 않아요.”
배를 통째로 끌고 가거나, 천공을 내어 가라앉힐 수 있었다. 뱃일을 모르는 로벨도 그 정도는 알았다.
“착각하지 마. 걸리적거리니까 숨어있으란 뜻이야.”
“거, 걸리적...?”
선장은 역시나 이해를 못했다. ‘저 해적들을 혼자 해치우겠다는 거야?’ 아무리 갑옷을 입은 기사라도 말이 안 되었다. 칼솜씨가 좋으면 대여섯쯤 해치울 수 있겠지만, 결국은 지쳐서 사로잡힐 것이다. 그럴 바에 미리 항복하고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 현명했다. 반면, 로벨의 힘을 잘 아는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기쁘게 물었다.
“오오! 저희도 숨으면 됩니까요?”
“너희는 싸워야지.”
“에이... 저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중년의 용병들은 구시렁거리며 무기를 챙겼다. 이심전심일까. 크로스보우와 쿼럴을 들고 까마귀 둥지(crow's nest, 돛대 위 망루)에 올랐다.
“내가 사수고, 네가 부사수다.”
“왜? 사격실력은 내가 낫잖아?”
“어허? 누가 그래?”
“하긴, 장전속도도 내가 빠르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러냐고?”
십 수 년 동안 칼밥 먹은 용병이라 전투를 코앞에 두고도 투닥거릴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믿음직스러웠다.
“공왕 폐하, 저는...”
호른 경이 워 해머를 꺼내 들고 다가왔다. 로벨은 식탁을 뒤집고 의자를 쌓아 반쯤 틀어막은 선실을 보고 말했다.
“내 친구를 지켜주시오.”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자상하게 전했다. 호른 경은 유능한 기사였다. 유능하다는 말은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 쓸데없는 고집과 호기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준비하는 사이, 망원경이나 파나케아 투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졸리 로저가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전부 들어가! 빨리!”
선원들은 닻을 풀어 던진 후 후다닥 선실로 뛰어갔다. 바닷물에 미끄러져 벌러덩 넘어져도 아픈 줄 모르고 벌떡 일어나 뛰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선실로 들어가자 문을 닫았다. 어린 집사의 응원 비슷한 것이 들렸지만, 마녀 키르케의 목소리와 뒤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로벨은 외날의 손도끼를 던졌다 받았다. 두 바퀴쯤 굴리자 무게와 균형이 파악되었다. 그래서 가짜 해적이 갈고리를 걸고 난간에 오를 때 사뿐히 집어 던질 수 있었다. 휘리리릭- 퍽-!
손도끼가 아니라 포탄이었다. 기세 좋게 난간을 밟은 가짜 해적은 두 배쯤 빠르게 갑판으로 돌아갔다. 달라진 점은 눈알이 뒤집힌 것과 핏물이 한줄기 뿌려진 것, 그리고 가슴에 반쯤 파묻힌 도끼날이 생겼다는 것이다. 두 겹으로 촘촘히 엮은 체인메일이 아무 소용없었다.
가짜 해적들의 함성이 조금 잦아들었다.
“저, 저자가 바로...!”
“겁먹지 마! 3만 페닝이다!”
전문 해적도 아니고, 전문 암살자도 아니었다. 저렇게 대놓고 ‘나 고용되었음’을 강조하니 말이다.
‘고작 3만 페닝이라니...’
로벨은 조금 서운했다. 명색이 그랜드 챔피언이고 볼탄 반도의 왕인데 3만 페닝은 너무 적었다.
‘그 정도는 소싯적에 토너먼트만 뛰어도 벌었다고.’
로벨의 서운함을 알아주듯 망루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의 일제사격이었다. 낑낑거리며 난간에 오르던 가짜 해적이 차례로 떨어졌다.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이 머저리들아! 우리도 쏴!”
“크로스보우 앞으로!”
가짜 해적 중에도 크로스보우와 아바레스트를 가진 자가 있었다. 난간 위에 등자를 올리고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전쟁이 잦은 볼탄 반도 출신답게 솜씨가 좋았다. 표적이 열처리된 빗살무늬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라면 필히 사살했을 것이다.
티틱- 팅! 깡-!
쇠촉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거나 빗겨나갔다. 심지어 타격조차 거의 주지 못했다. 로벨은 벌레에 쏘인 것처럼 몸을 털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저 빌어먹을 갑옷!”
“계속 쏴! 계속!”
가짜 해적은 기사와 싸운 경험이 있는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눈구멍이나 사타구니처럼 장갑이 약한 곳에 맞으면 효과가 날 수 있고, 그렇지 못해도 위축시킬 수 있기에 계속 쏘았다.
로벨은 자세를 낮추고 얼굴을 보호했다.
“지금이다! 넘어가라!”
로벨이 꼼짝도 않자 가짜 해적들은 신이 나서 판자를 걸고 코그 선으로 넘어왔다. 전술적으로 말하면 실착이었다. 중장갑의 기사가 무서워하는 것은 창과 화살이 아니었다. 깊은 물이나 진창이었다. 로벨이 움츠린 것도 화살 때문이 아니었다. 뱃전에서 싸우다 떠밀릴까봐 조심한 것뿐이다.
“자, 와라.”
로벨은 병장기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가짜 해적을 보며 자세를 고쳤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하는 짓이 곰이나 사자에게 달려드는 것보다 무모한 짓이란 걸 말이다. 애초에 괴물이 있는 곳에 올라타서 안 되었다. 멀리서 대포나 총을 쏘아 배를 가라앉혔으면 차라리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로벨이 한 발을 내딛고 아론다이트를 수평으로 휘두르자 바로 증명되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가짜 해적 눈이 거꾸로 뒤집혔다. 안구가 돌아간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상하가 뒤집혔다. 좀 더 정확히는 상반신이 붕 떠서 반 바퀴 회전했다. 골반 아래쪽은 여전히 갑판에 붙어있었다.
“히, 히이이익-!”
일도양단(一刀兩斷)이란 말을 사람에게 적용할 줄 몰랐다. 피와 내장이 갑판 위에 뿌려지자 뒤따르던 가짜 해적이 전부 멈춰 섰다. 유독 감이 좋은 자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항복하라고 해도 안 듣겠지? 숫자가 줄면 생각이 바뀔 거야.”
공수가 바뀌었다. 로벨이 먼저 가짜 해적에게 달려들었다. 가엾은 희생양이 어설프게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소용없었다. 칼날이 맞닿기 무섭게 부러졌다. 크고 두꺼운 쇠붙이도 소용없었다. 그대로 찍어 눌러 자기 칼에 몸이 절단되었다.
“이, 인간이 아니잖아!”
“항복! 항복입니다!”
가짜 해적 하나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조금 늦었다. 천하의 로벨도 휘두르는 칼을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또 한 명이 명을 달리했다. 몸을 돌려 도망가는 가짜 해적은 허풍쟁이 쿼럴에 잡아먹혔다. 일제사격 이후 2인 1조 사격으로 바꿔서 쉼 없이 저격했다. 로벨에게 짓눌린 가짜 해적들은 응사할 생각을 못했다. 아니, 쿼럴에 맞은 당사자 외에는 쿼럴을 쏘는 두 용병을 인지조차 못했다. 그만큼 로벨의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하, 항복이라고! 항복! 으아악! 살려줘!”
호른 경이나 펄프 대장이 옆에 있었으면 ‘무기를 버려야 항복이지! 멍청아!’라고 조언했겠지만, 뱃멀미가 희생자를 크게 늘렸다. 아니, 꼭 뱃멀미 탓도 아니었다. 피 칠갑한 로벨의 모습을 보고 무기를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성난 곰 앞에서 무기를 버리란 것과 비슷했다.
결국 여섯 명의 희생자가 추가로 발생한 후 간신히 항복이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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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해적 60여 명 중 살아남은 자는 반이 안 되었다. 로벨의 칼에 죽은 자가 12명이고, 허풍쟁이가 쏜 쿼럴에 죽은 자가 5명이며, 겁에 질려 바다에 뛰어든 자와 도망가다 밟혀 죽은 자가 나머지였다.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도망가다 죽은 사람이 많은데요?”
“원래 그런 거야.”
정확히는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전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코그 선장과 선원은 참사 현장을 보고 질려버렸고, 마녀 키르케는 숨이 붙어 있는 가짜 해적을 치료했다. 어린 집사가 그냥 두라고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기사님을 노린 나쁜 사람인 건 알지만, 그래도 살 수 있으면 살아야죠.”
“그놈 때문에 착한 사람이 죽어도요?”
“그건... 그건 모르겠어요.”
저 딜레마는 천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호른 경은 부상 입지 않은 가짜 해적을 모아 심문했다. 그리 어려울 것 없었다. 악마와 진로상담 한 것처럼 넋이 빠져 있었기에 조금만 윽박질러도 덜덜 떨며 자백했다.
“폐하, 이거 참, 어이가 없어서... 저들의 고용주가 누군지 아십니까?”
로벨은 아론다이트에 묻은 핏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뒤셀 남작 아니오?”
“...어찌 아셨습니까?”
“본인을 노리고 습격한 것이 명백한데, 본인의 거취를 아는 북부 영주가 뒤셀 남작뿐이잖소. 마침 숫자도 3개 소대 규모고.”
“과연 폐하십니다. 헌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칭찬은 악마도 춤추게 한다. 로벨은 콧대를 살짝 올리고 마저 잘난 척했다.
“저 배는 푸센 남작의 갤리선이겠지. 선원을 잡아와 심문하겠소.”
호른 경은 뱃멀미로 찌푸린 인상을 잠시 폈다.
“저 배는 하이델 남작의 소유입니다.
로벨의 짐작이 빗나갔다. 칼날을 닦는 손이 멈칫했다.
“차녀의 사위 집안 말이오?”
“그렇습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고 텅 빈 갤리선을 보았다. 선원과 노잡이 노예가 남아있지만, 가짜 해적이 갈고리를 걸어놓은 탓에 도망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뒤셀 남작, 푸센 남작, 하이델 남작이 모두 한통속이라고?”
로벨의 짧은 머리로 선뜻 이해가 안 되었다. ‘청옥성의 주인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게 아니었어?’ 여러 개의 퍼즐이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애초에 청옥성 때문이면 제3자인 로벨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다시 말해 로벨은 제3자가 아니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부고를 알린 게 검은 숲의 브릭 자작이었어.’
그때는 충격이 커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검은 숲보다 청옥성이 더 가까웠다. 맥켈런 가문과 세 남작은 왜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까. 로벨이 나타났을 때 눈에 띄게 당황한 뒤셀 남작의 모습이 그려졌다.
‘대체 뭘 숨기는 거지?’
그 답은 간단히 나왔다.
“아하? 공왕 폐하가 청옥성의 새 주인이에요!”
어린 집사가 뱃멀미를 잊고 활짝 웃었다. 저 웃음은 큰돈이 생겼을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역시 바다사자는 영웅이군요! 북해를 지킬 사람을 제대로 골랐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로벨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어린 집사는 자신의 추리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유언장이요! 그냥 유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죽기 전에 남긴 게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뭐를?”
“아이참! 공왕 폐하께 청옥성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유언이요! 뒤셀 남작 패거리들은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숨긴 거죠! 군대를 모은 것은 무력으로 청옥성으로 차지하기 위해서고요! 제 말이 맞아요!”
로벨은 앞뒤 사정을 잰 후 그럴듯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당장 청옥성으로 가야죠! 악랄한 세 딸과 세 사위로부터 우리 땅을 지켜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