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거병
가장 용감한 병사가 가장 먼저 죽기 때문인지, 아니면 육신보다 용기가 먼저 죽기 때문인지, 전투가 끝난 뒤 남은 것은 겁먹은 얼굴과 무기력한 얼굴, 그리고 자포자기한 얼굴뿐이었다.
“이래서 싸울 수 있나요?”
어린 집사가 고개를 푹 숙인 병사들을 보며 속삭였다. 창과 투구를 팽개친 자태가 한심하면서 안타까웠다.
“적도 비슷할 거야. 억지로 전장에 세우면 싸우긴 싸워.”
결과가 똑같을 뿐.
로벨은 뒷말을 하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 지휘관-호킨 페럿 경이 소문대로 유능하다면 무의미한 소모전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저쪽은 숫자가 많으니까, 계속 싸우면 이기잖아요?”
“도시를 점령할 병력이나 국경까지 후퇴할 병력을 남겨둬야 하니까. 소모전이 달갑지 않을 거야.”
기사들의 반발도 문제였다. 영지에서 징집해 온 농민인 만큼 병사 하나하나가 재산이었다. 피해가 크면 결속력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진짜로...”
어린 집사 얼굴에 불만이 보였다. 주로 손해 볼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난 그랜드 챔피언이자 볼탄 반도의 왕이야. 결투를 받아들이기 충분할 거야.”
그날 저녁 고전적인 결투장이 전달되었다. 내용도 단순했다.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말고 일대일로 승부하자는 내용이었다.
후대 역사학자는 기사 시대의 낭만이라 평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좀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전황을 뒤집을 기회요!”
“로벨 로드릭을 잡으면 우리가 승리한다.”
당연히 결투는 받아들여졌다. 모레 아침. 벼락 맞은 상수리나무로 기사 종자와 시동 하나씩만 대동하고 나올 것. 로벨은 답장을 고이 접어 포비아 국왕에게 보냈다.
결투 소식이 전해지자 고귀한 기사부터 코흘리개 농민병 꼬마까지 관심을 보였다. 양국을 대표하는 그랜드 챔피언의 대결이자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전이었다. 결과에 관심이 없는 무지렁이조차도 이틀간 전투가 없다는 것에 기뻐했다.
“우리 공왕 폐하가 질 리 없지.”
“호킨 페럿이란 기사 나리가 불쌍하구만.”
울프 용병단은 다른 이유로 좋아했다. 무적무패의 기사. 이 호칭에는 조금의 과장도, 허세도 없었다. 로벨이 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것은 페럿 가문의 병사들도 그리 생각한다는 것이다.
“촌구석에서 챔피언이라 으쓱대어 봤자...”
“그렉 페럿 경의 원한을 갚을 때가 되었다!”
그렇게 이틀이 훌쩍 지나 결투 당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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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동이 트자 부스스 일어났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와 옷매를 정리하고 어린 집사를 불렀다.
“앗! 일어나셨어요? 아침 식사는... 아앗...”
어린 집사는 물동이를 들이다가 흠칫했다. 로벨의 모습이 낯설고 낯뜨거웠다.
전장에 나오면 옷을 두껍게 입거나 아예 갑옷을 착용한 채 자는데, 오늘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얇은 튜닉 한 장만 입고 잠을 잤다. 어스름한 아침 햇살에 부스스한 머리와 반쯤 흘러내린 옷가지가 성숙미를 과시했다.
“이 양반이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어린 집사는 황급히 천막을 내리고 달려왔다. 로벨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걱정 마.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어.”
“말을 알아듣는 놈들이 아니잖아요! 왕부터 이렇게 제멋대로인데요!”
“호른 경이 있지 않아?”
어린 집사는 아침 댓바람부터 완전무장하고 서성거리는 자작나무 숲의 기사를 떠올렸다. 뭔 짓인가 했더니 로벨의 막사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럼 저한테도 말해주셔야죠!”
“집사는 걱정이 너무 많아.”
로벨은 물동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 세수했다. 병사와 가축이 쓰는 개울이 아니라 우물에서 길어온 깨끗한 물이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상대가... 그렇게 강해요?”
“그렉 페럿 경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어.”
“공왕 폐하가 이겼잖아요?”
“운이 좋았어.”
그렉 페럿 경과 싸운 것은 오래전이고, 로벨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지금이라면 늑대의 왕이 부활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잠을 설쳤다.
‘긴장? 아니야. 공포? 무섭지 않아.’
로벨은 자신의 감정을 읽지 못했다. 어린 집사가 아밍 더블릿을 가져와 끈을 조일 때도 딴생각했다.
“왜 자꾸 웃어요?”
“웃어?”
“지금 웃었잖아요. 제 눈은 못 속이죠.”
어린 집사가 입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벨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렇다. 분명 웃고 있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웃음은 오랜만이었다.
“아... 그런가?”
“뭐가 그래요?”
로벨은 마침내 깨달은 감정을 고백했다.
“나 흥분했나 봐.”
어린 집사가 흉갑을 떨구고 입을 벌렸다. 갑옷을 입기 전에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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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적수(敵手)에 굶주렸다.
전쟁과 살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로벨은 무예를 갈고 닦는 기사였고, 무예는 시나 노래와 달리 상대와 겨루어 이기기 위한 기예였다.
그런데 늑대의 왕을 꺾은 뒤로 오랫동안 적수가 없었다. 해가 갈수록 힘이 세지고 기량이 느는데 온힘을 다해 부딪칠 상대가 없었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이놈들아! 공왕 폐하가 네놈들의 친구냐!”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이 자식들이? 듣는 척도 안 하네?”
로벨은 포비아&볼탄 반도 연합군의 응원을 받으며 군영을 나왔다. 국왕과 국왕의 기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 모여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이 결투가 국가적 자존심이자 전쟁의 승패였다. 사실 로벨도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결투일이 되어 결투장에 나가자 생각이 바뀌었다. 개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가 생겼다. 호승심. 투쟁심. 승부욕. 과시욕...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인간 본연의 욕망이었다.
“그대가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상대를 확인하고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그렉 페럿 경의 친형제라더니 닮은 곳이 많았다. 키는 좀 작은데 어깨는 약간 넓었다. 병장기만 봐도 형보다 힘이 셀 듯했다. 7피트 길이 철제 창에 앞뒤로 도끼날이 달린 험악한 할버드였다.
“호킨 페럿 경이오?”
“호아-킨 페럿이오.”
“그럼 호킨 페럿 경이 아니오?”
“호킨이 아니라 호아-킨이오.”
본의 아니게 신경전을 치렀다. 호킨 페럿 경은 짜증이 난 듯 할버트를 붕붕 휘둘렀다.
“과연 듣던 대로 말이 안 통하는군!”
로벨은 유치한 승리에 만족하며 팔치온을 뽑았다. 포비아 국왕이 선물한 보검 중 하나였다. 아론다이트나 흐룬팅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거병 할버트에 맞서기 충분했다.
“본인은 준비되었소.”
“그거 좋군.”
과거 샘 포클과 제임스 공작이 싸운 그 자리에 로벨 로드릭과 호킨 페럿 경이 마주 섰다.
결투 방식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도보전이 되었다. 로벨이 그렉 페럿 경과 겨룬 것이 검술 시합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늑대의 왕이 목을 친 것이 도보전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흔히 화자되는 일대일 승부지만 소설과 다르고 토너먼트와 달랐다. 노래도 없고, 광대도 없고, 환호성도 없었다. 말 못 하는 말의 칭얼거림과 삭막한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로벨은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열처리된 판금갑옷도 심장박동을 막지는 못했다. 뜨거운 피가 차가운 머리로 흘러갔다.
“흠!”
호킨 페럿 경이 먼저 움직였다.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할버드를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거리가 멀다 생각하는 순간 자갈이 튀어 올랐다.
‘역시.’
싸우는 방법도 토너먼트와 달랐다. 비겁하다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팔치온의 넓적한 도신으로 안면을 보호했다. 그걸 노렸을 것이다. 호킨 페럿 경은 첫발을 도움닫기 삼아 뛰어올랐다. 도약력이 대단했다.
“죽으시오!”
예의 바른 말투였다. 하는 짓을 보면 ‘죽어랏!’ 내지 ‘뒈져랏!’ 해야 어울릴 텐데 에르나 왕국 기사라 뭔가 달랐다.
로벨은 머리 위로 날아드는 도끼를 피하지 않았다. 예상한 공격이라 충분히 피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로벨은 적수에 굶주려 있었다. 팔치온 칼등에 팔뚝을 붙이고 도끼를 막았다.
쾅-!
괴력에 체중을 실은 공격이었다. 아름드리나무도 단숨에 쪼갤 위력이었다. 그러나 로벨은 버텨냈다. 팔치온의 이빨이 한마디쯤 빠지고, 칼등을 받친 뱀브레이스가 종이처럼 꾸겨졌지만, 로벨의 몸뚱이는 아무렇지 않게 버티었다.
“늑대의 왕이오.”
“뭐, 뭐?”
“그렉 페럿 경을 참살한 것은 늑대의 왕이란 자요. 경의 나라에서는 늑대의 기사라 알려졌을 것이오.”
“그건...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괴물이오!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해도 볼탄 반도의 왕인 그대 수하가 아니오!”
로벨은 힘을 주어 할버트를 밀어냈다.
“착각하지 마시오. 싸움을 피하고자 변명하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요.”
로벨은 다시 미소 지었다.
“늑대의 왕이 왜 그리 강자(强者)를 찾아 헤맸는지 이해하게 되었소.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대체 뭐라는 거요? 알아듣게 말하시오!”
로벨은 마도의 수호자가 천 년 동안 품어온 갈증을 설명할 수 없었다. 로벨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자, 덤비시오. 바라건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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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챔피언의 대결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거병 중에 거병인 할버트가 회초리처럼 휘둘러졌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일격에 분쇄할 강공이 초 단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벨이었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칼 한 자루로 모조리 튕겨냈다. 아니, 더 나아가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화살비 속에서 티타임을 가질 수 있다는 에르나 왕국산 플레이트 아머도 계속되는 참격을 버티지 못했다.
호른 경은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태양을 흘겨보고 말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왜요? 왜? 이기고 있잖아요?”
어린 집사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허풍쟁이 등과 어울려서 역시 영주님은 무적이라는 둥 옛날 호칭을 두서없이 난발했다. 그러나 호른 경의 생각은 달랐다.
“장기인 마상창이 아니라 도보로 싸우는 것도 이상한데... 애병인 흐룬팅을 쓰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그 칼은 뭐가 다른가요?”
“흐룬팅을 뽑았으면 삼합 안에 승부가 났다.”
그 정도면 평복대결 수준이었다.
“흐룬팅이 그렇게 좋은 칼이에요?”
“말해 무엇 하나.”
“그런데 왜 안 쓰는 거죠?”
“...내가 먼저 의문을 표시했잖아.”
로벨이 지금 쓰는 칼은 평범한 롱소드였다. 처음에 뽑은 팔치온은 갑옷을 때리다가 부러졌고, 두 번째로 뽑은 시미터도 도끼날을 이기지 못해 부러졌다. 애초에 판금갑옷을 상대로 곡도(曲刀)를 사용한 것이 이상했다. 검술학회 공인 소드 마스터인 로벨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싸우기 위한 것처럼...’
호른 경은 순간 로벨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 않고, 가까이 간다 해도 투구 때문에 볼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 표정이 그려졌다.
“웃고 계신가?”
“누가 웃어요?”
“아니, 그럴 리 없지.”
호른 경은 초조해서 턱수염을 비볐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웃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늑대의 왕 같은 괴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