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5화 (415/605)

415화. 외침

로벨이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에르나 왕국 진영에서 백기가 올라왔다.

1만 2천 명이 약 1마일에 걸쳐 산개한 탓에 작고 가냘픈 깃발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항복은 아니겠고... 회담요청인가?”

깃을 든 기사와 기사 종자가 벼락 맞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신호를 보냈다. 로벨은 포비아 국왕이 있는 중앙을 보았다. 대범한 왕이라면 수행기사만 거느리고 회담에 응할 테고, 소심한 왕이라면 대리인을 보낼 것이다.

“국왕이 나왔습니다.”

“와.”

로벨은 입술을 모아 감탄했다. 옛 주인을 모욕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후자라 생각했다.

“그런데 좀 많군요.”

“...와.”

로벨은 괜히 한숨을 쉬었다. 직접 나오긴 나왔는데, 수행기사를 스무 명이나 거느리고 나왔다. 헬멧을 쓰고 창을 쥐었으면 선제공격이라 오해했을 것이다.

백기를 들고 나온 기사도 예상 밖의 숫자에 당황한 듯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게 보였다. 어린 집사가 한심하게 중얼거렸다.

“일찍 독립해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다른 제후들과 부끄러움을 나눴을 테니까.

인간과 짐승을 합쳐서 약 4만 개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로벨은 거리가 멀어 대화는 고사하고 표정조차 볼 수 없었다. 전쟁에서 항상 주역을 맡아온 탓에 지금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결론이 난 모양입니다.”

에르나 왕국 기사가 침을 퉤! 뱉었다. 대단한 무례이자 엄청난 용기였다. 포클랜드 기사들이 일제히 칼과 망치를 빼들었다.

“극적인 평화협상은 아니겠지?”

“누가 봐도 아닙니다.”

로벨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과 볼탄 반도 군대를 점검했다.

“펄프 대장! 맨앳암즈를 이끌고 왼쪽으로 가! 켈트 경! 바이란 경! 오른쪽을 지키시오! 본진과 단절되지 않게 사수해야 하오!”

왕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휘하 병사를 이끌고 이동했다. 최후의 회담이 모욕적으로 끝났으니 바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누가 먼저 공격하느냐인데...’

굳이 선후를 정하자면 모욕받은 포비아 왕국군이었다. 역시나 국왕이 본진에 합류하기 무섭게 공격 신호가 떨어졌다.

빠아아아아아-암-!

왕실 수비대가 쓰는 나팔은 황동나팔이었다. 울프 용병단이 쓰는-정확히는 과묵한 몬트가 쓰는-뿔나팔보다 가볍고 날카로웠다.

포비아 왕국 병사들이 길고 짧은 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창벽을 세워 전진하는데 여러 영주의 농민병과 급하게 고용한 용병이 뒤섞여 발을 맞추지 못했다. 정예화된 단일부대에 익숙한 로벨 일행에게는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이제 폐하가 한 말을 알겠어요.”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었다. 기사 3, 40명이 돌격하면 무너질 것이다. 조단 랭스터 경이 근질근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런 잡병이야 머릿수 채우기지! 야전의 승패는 기사들로 결정된다!”

로벨 일행이 있는 좌익에서는 검은 숲과 포클랜드의 기사들이 모인 우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에르나 왕국의 화려한 기사들이 집결한 적 우익이 잘 보였다.

부우우우우우웅-!

적진에서도 나팔소리가 울렸다. 세련된 갑옷을 입은 에르나 왕국 기사들이 바이저를 내리고 해비 랜스를 잡았다. 검은 숲과 포클랜드 기사들이 적 좌익을 뚫을 때까지 저들을 막아야 했다.

“역시 고의라니까.”

조단 랭스터 경이 혀를 차고 헬름을 뒤집어썼다. 제3차 에르나-포비아 왕국 전쟁이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진짜 봄이 시작될 거야. 집에 돌아가면 못다 한 신년파티를 하자.”

“아앗... 그런 말 하면 결과가 안 좋다구요!”

로벨은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어린 집사를 미소로 안심시키고 해비 랜스를 잡았다.

“자랑스러운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모두 나를 따르시오!”

양측의 기사들이 진영에서 벗어나 점차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요란하게 뒤섞여 산산이 깨졌다.

하늘에서 보면 거인이 두 손을 맞잡고 힘 겨루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피와 금속 파편이 튀는 살벌한 싸움이었다.

@

전쟁은 만(萬) 단위로 치를 수 있으나 전투는 백(百) 단위를 넘지 못한다. 수천 명의 회전도 자세히 보면 수십 명의 싸움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혹 무기가 발전해서 소대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수 마일 밖의 지휘관과 소통하는 기술이 생기면 모르지만, 말(馬)보다 빠른 것이 없는 지금의 전장에서는 각자 싸우는 게 당연했다.

“하아... 하아...”

로벨은 세 번째 랜스를 버리고 모닝스타를 세웠다. 숨이 찬데 땀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세 번 연속 돌격하여 에르나 왕국 기사의 대열을 깨트렸다. 아군의 좌익과 본진을 지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방으로 흩어진 기사들 탓에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지만, 켈트 경과 펄프 대장이 진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마돌격에 실패한 기사는 조금 사나울 뿐 싸울 만한 상대였다.

‘그건 우리도 같잖아?’

로벨은 주위에 남은 기사들을 살폈다. 호른 경, 아자르 경, 랭스터 경의 첫째 아들과 기사 종자, 그렇게 넷뿐이었다.

“마지막 돌격 때 갈라졌습니다.”

로벨의 생각을 읽은 호른 경이 바로 보고했다. 세 번째 돌격에서 전열을 갖추지 못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로벨이 제일 앞에서 적을 갈라 후열의 피해를 줄였다.

로벨은 파나케아의 힘을 빌려 시야를 한층 넓혔다. 아군의 본진이 적의 본진과 뒤얽혀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창벽은 허물어진 지 오래고, 단병기조차 휘두를 간격이 나오지 않아 몸싸움을 벌였다. 짱돌로 찍고 자갈을 뿌리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눈알을 찌르고 목덜미를 깨무는 병사도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군의 우익도 적의 좌익을 뚫지 못했다.

“저 무능한 놈들...”

호른 경이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을 했다. 제 역할을 못한 포클랜드 기사들이 경멸스러웠다.

‘세 곳 모두 교착상태란 거네.’

조금 유리하고 조금 불리한 곳이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결판을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벨이 이끄는 좌익만 봐도 알듯이 통제가 안 되었다. 기사나 농민이나 짐승처럼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하나야.’

꼭 필요하고 이해하기 쉬운 명령. 후퇴명령이었다. 병사통제가 안 되는 것은 적도 마찬가지라 추가 피해 우려도 없었다.

로벨은 랭스터 경의 기사 종자를 보았다. 지난 전쟁 때도 봐서 낯이 익었다. 나이도 제법 있고, 전쟁 경험도 충분히 쌓았으니 곧 기사가 될 것이다.

“경, 창을 빌려주시오.”

“예, 예?”

기사 종자는 하늘 같은 공왕 폐하의 요청에 그만 당황했다.

“저, 저는 아직 경(Sir)이...”

“오늘이 지나면 기사가 될 것이오.”

그걸 결정하는 것은 마스터인 랭스터 경이지만, 로벨은 기사 종자가 내일 기사가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 많은 기사가 죽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창은 빌려 달라 하시오.”

호른 경이 재촉하자 기사 종자는 정신을 번뜩 차리고 창 자루를 내밀었다. 값싼 물푸레나무로 만든 라이트 랜스였다. 어느 가문 출신인지 몰라도 그리 부유한 집은 아닌 듯했다.

로벨은 안장주머니에서 가장 큰 손수건을 꺼내 창끝에 묶었다. 호른 경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금방 알았다.

“지금입니까?”

“지금이 적당해.”

로벨의 예상은 항상 잘 맞았다. 에르나 왕국에서 길게 늘어지는 나팔소리를 내었다. 부우우- 부우우우- 공격 신호와 확연히 달랐다. 로벨은 깃 달린 창을 높이 들고 힘껏 소리쳤다.

“포비아 왕국 병사들은 저쪽으로! 저쪽으로 가라! 적을 따라가지 마라! 이 깃발이 가리키는 곳으로 와라!”

적과 아군이 뒤엉킨 상황에서는 어느 쪽이 아군진영인지,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 잊어버린다. 로벨은 하얀 수건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포클랜드의 장졸들아!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 후퇴하라!”

원래는 국왕과 국왕의 기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 경험이 부족해서, 혹은 전공에 눈이 멀어서 흩어진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로벨이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며 후퇴를 명령하지 않았으면 상당수가 전장을 이탈하거나 제 발로 적을 찾아가 항복했을 것이다.

“샘 포클의 후예들은 이쪽으로 오라! 이쪽으로 오라!”

로벨의 외침이 황량한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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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시티 토박이 기사가 당당히 외쳤다.

“절반의 병력으로 대등하게 싸웠으니 우리의 승리요!”

로벨은 물론이고, 평소 상식과 친하게 지낸 기사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상자의 숫자를 아시오?”

자신이 떨군 적의 숫자만 알지 아군의 피해는 모를 것이다. 아니,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역시나 말을 더듬었다.

“대, 대충 300명 정도...”

“전사자만 700명이오. 부상자는 그 두 배가 넘소.”

시신을 수습하며 확인한 거라 정확했다. 전체 병력의 1/3이 피를 흘렸다.

“적들도 그만큼 피해를 입지 않았소!”

“그게 바로 문제요.”

에르나 왕국군의 피해도 비슷했다. 그러나 애초에 2배 병력이었다. 세 갈래 강 출신의 기사가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악을 썼다.

“처음부터 작전을 잘못 세웠소! 가장 용맹한 볼탄 반도 기사를 우익에 두고! 검은 숲과 포클랜드 기사가 좌익에서 적을 막아야 했소!”

기사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우리가 볼탄 반도 기사보다 못하단 뜻이오?”

“뭐, 사실이 그렇잖소? 지난 몇 년간 볼탄 반도와 싸워 이긴 적이 있소?”

“이... 이이익...”

이성의 한 가닥이 남은 탓인지, 아니면 너무 지친 탓인지 결투 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비에 후작 실각 이후 구심점이 사라진 포클랜드 기사들과 오랜 반목으로 악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검은 숲 기사들이 으르렁거리는데, 야전 경험이 부족한 포비아 국왕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로벨이 말하면 양심에 찔리지만,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의 빈자리가 아주 컸다. 괜히 12기사 가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자.”

“뭣이? 뭐라고?”

성질난 포클랜드 기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가 무적무패 기사를 보고 슬그머니 아래로 숙였다.

직위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로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번 회전에서 유일하게 전공을 자랑할 수 있는 지휘관이기도 했다. 적의를 가진 기사조차 로벨의 발언에 집중했다.

“적의 우익에 호킨... 호아-킨 페럿 경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소. 좌익에서 그자를 보았소?”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순간 눈치를 보았다. 로벨이 한 번 더 묻자 나이 많은 기사가 고백했다.

“그렇소. 실로 무서운 자였소. 말 위에서 할버트를 휘두르는데, 상하좌우 빈틈이 없었소.”

“마상에서 할버트를?”

거병을 좋아하는 것이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그자에게 예봉이 꺾여 번번이 돌격을 실패했소.”

검은 숲과 포클랜드가 자존심으로 한마음이 되었다.

“꼭 그 자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선봉이었으면...!”

로벨은 손바닥을 보이는 거로 조용히 시켰다.

“우선 그자를 상대해야겠소.”

“어, 어떻게 말이오?”

로벨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랜드 챔피언은 그랜드 챔피언이 상대해야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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