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6화 (406/605)

406화. 사랑

어린 집사의 예상대로 에르나 왕국의 사절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은화 상자보다는 작지만, 내용면에서 곱절은 더 나가는 금화 상자.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호박 등 일곱 가지 보석으로 장식한 왕의 지팡이와 어린 집사 키만한 크기에 백옥처럼 하얀 상아 한 쌍이었다. 저 중에 하나만 받아도 로드릭 시티 축제를 열흘쯤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관찰했다. 고기 냄새를 맡은 아야와 이야카처럼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냉정했다. 정치적 퍼포먼스라 하나 비교적 순수한 앞 선물과 달리 의도가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저기, 알폰소 경이라 했소?”

“공왕 폐하의 존귀한 입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이름이라 감격, 또 감격스러우나 감히 정정하는 바, 하비엘 알론서 경이라 합니다.”

에르나 왕국의 축하사절은 외해 출신 아자르 경과는 다른 의미로 알아듣기 힘든 공용어를 구사했다.

“아, 미안하오. 에르나 왕국의 이름은 익숙지 않소.”

로벨은 이름을 정정한 후 슬그머니 덧붙였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이름만이 아니오.”

로벨은 직,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동맹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강대국인 에르나 왕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전제조건이 종주국인 포비아 왕국과 싸우는 거면 말이 안 되었다. 그러나 정치감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사가 재빨리 만류했다.

“오늘은 공왕 폐하의 즉위를 축하하는 날이요. 경의 뜻은 잘 알겠으나 훗날 논의하는 게 옳을 듯하오.”

호른 경이 아슬아슬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1초만 늦었어도 주군의 말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늑대성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알론소 경은 눈알을 바삐 움직였다.

‘오호라?’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중에서도 특히나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왕 ‘무적무패’가 화내지 않았다. 저자가 공국의 2인자라 확신했다.

“경의 고명함을 듣고 싶소.”

“자작나무 숲의 기사 패트릭 호른이라 하오.”

알론소 경은 호른 경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인 후 로벨을 향해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공왕 폐하, 가까운 시일에 다시 배알하도록 하겠나이다. 이만 물러갈 것을 허락해 주시지요.”

에르나 왕국의 궁중예법은 무척 까다로운 모양이다. 로벨은 피곤함을 담아 짧게 말했다.

“허락하오.”

그러나 알론소 경은 한동안 로벨을 찾지 않았다. 로벨을 설득하기에 앞서 최측근이자 2인자인 호른 경을 먼저 설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다만, 대상을 잘못 파악했다.

어린 집사는 알론소 경이 떠나자 다시 헤벌쭉 웃었다.

“아참! 폐하의 용돈을 올려드릴게요.”

“와, 진짜?”

“그럼요. 이제 왕이잖아요. 하루에 3페닝 어때요?”

“그렇게 많이? 난 좋아!”

로벨 로드릭 공국의 2인자는 경제권을 꽉 쥔 어린 집사였다. 어쩌면 그냥 실세였다. 알론소 경 이하 에르나 왕국의 외교관은 아무것도 아닌 호른 경에게 2만 페닝 상당의 선물 공세를 한 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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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축제가 끝나자 겨울이 찾아왔다.

농가의 아낙들은 주렁주렁 매달린 소시지와 선반 위의 치즈를 사랑스럽게 보았고, 바깥일을 마친 사내들은 겨우내 사용할 장작을 쌓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시장의 상인들은 어제와 그제에 이어서 오늘도 장사 접겠노라 목청 높여 소리쳤고, 술집의 한량들은 징수관 몰래 세금을 너무 많이 걷는다고 투덜거렸다.

볼탄 반도 공국, 혹은 로벨 로드릭 공국이 건국된 지 보름이 지났으나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새해에 보내는 공물은 어떡해?”

“그것도 그대로 보내야죠.”

“나도 이제 왕인데?”

“공왕이잖아요. 작위를 내려준 게 포비아 국왕인데 보내야죠.”

“뭐야, 공작일 때랑 같잖아.”

“그러니까 공왕이라고요.”

로벨과 어린 집사의 일과도 변한 것이 없었다.

로벨의 경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체력단련하고, 펄프 대장과 리암 수사가 오전 보고를 위해 찾아오면 빵과 스튜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어린 집사의 감독 아래 행정업무를 보다가 아야와 이야카가 배고프다 칭얼거리면 마녀 키르케를 불러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날씨가 좋으면 배를 꺼트릴 겸 시내, 외로 순시를 나갔다.

“저쪽에 마시장을 열거에요.”

어린 집사가 공사 막바지의 공동 마구간을 가리켰다. 늑대성의 마구간도 여러번 증축해서 규모가 상당한데 이곳은 더 했다.

“저렇게 크게 만들 필요 있어? 유지비가 많이 나가잖아?”

말은 비싼 가축이었다. 기사의 보물 1~2호를 다투는 전투마는 물론이고, 별다른 훈련이 필요 없는 농마와 짐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소와 당나귀에 비해 대여섯 배 값이 더 나갔다.

“그만큼 힘이 세고 일을 잘하니까요. 꼭 사고팔지 않아도 빌려주는 거로 페닝을 벌 수 있어요. 로드릭 항을 오가는 상인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뉴 로드릭 마을 옆에 새로 개간하는 땅에도 농마가 필요했다. 볼탄 반도는 자갈이 많고 뿌리가 억센 땅이라 힘센 말이 아니면 갈아엎기 힘들었다.

“저쪽은 가구공방이에요.”

가구(家具)라고 하지만 목수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다 만드는 곳이었다. 집도 짓고 마차도 굴리며 유사시 창이나 화살도 만들었다. 빗물에 젖지 않게 지붕과 받침을 놓은 야외창고에는 북쪽 숲에서 벌목한 참나무와 떡갈나무가 가득했다.

“검은 숲에서 온 목수들이 일을 잘 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떡갈나무로 대포도 만들어봤데요.”

“나무대포? 가능해.”

“어어? 진짜요?”

“응. 엄청 커야 하고, 몇 번 못 쏘지만.”

값비싼 청동 대신 나무를 쓰자고 주장하려던 어린 집사가 입을 다물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북쪽으로 올라가자 로드릭 시티의 명물 중 하나인 병원이 보였다. 천막 몇 개 쳐놓고 환자를 받던 옛날 모습은 사라지고 그럴 듯한 2층 목조건물이 들어섰다. 저 건물을 짓느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한동안 티격태격했다. 누가 이겼는지는 지금 보이는 건물로 알 수 있었다.

“아닛, 영주님... 이 아니라 공왕 폐하! 이 누추한 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햇살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시던 닥터 줄리안이 기사와 기사의 우람한 말과 말구종 집사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전시가 아니면 외과 의사가 바쁠 일은 없었다. 뼈 좀 다쳤다고 팔을 절단하는 환자는 없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는 예산을 잔뜩 잡아먹은 건물과 그에 비해 한가한 책임자를 보고 배알이 상했다.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지어놓고 누추하다니요? 노안이 온 건가요?”

“집사, 본인도 잘 아는데 너무 그러지 마.”

정작 닥터의 신경을 긁는 것은 사심 없는 로벨이지만, 어느 쪽이든 화낼 수 없었다.

닥터 줄리안은 차를 권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기사 중의 기사인 공왕 폐하가 차를 마실 것 같지 않았다. 술이라면 모르지만. 짐작대로 로벨은 찻주전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요즘 어때?”

닥터 줄리안은 텅 빈 병원 건물을 힐끔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아주 좋습니다.”

“이게 좋은 거야?”

“여긴 병원이지 않습니까. 환자가 없으면 좋은 거지요.”

“음... 그건 그렇네.”

고뿔에 걸리거나 배앓이를 하는 환자가 종종 있지만 비싼 약을 쓸 바에 혼자 참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마녀 키르케가 보이지 않았다. 시내를 돌며 환자를 봐주고 있을 것이다.

“자기 돈 아니라고 펑펑 쓴다니까요.”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자 닥터가 정색했다.

“그건 아닙니다. 질병과 화재는 조기에 잡는 것이 최고지요. 그냥 두면 전염병이 되어 더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투자라고 생각하시지요.”

“키르케가 그걸 생각하고 치료하진 않을 걸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새삼스럽게 어린 집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뭐가요?”

“언제부터 키르케를 이름으로 불렀어? 예전에는 마녀라고 불렀잖아?”

로벨이 순박한 눈초리로 묻자 어린 집사는 그만 당황했다.

“저,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예의를 차려야죠! 게다가 영주님 폐하의 직속 집사고요! 제가 마녀라고 외치고 다니면 옛 신의 사제랑 신도들이 뭐라 생각하겠어요?”

“나 왕 되기 전부터 그랬는데?”

“그것보다 영주님 폐하는 무엇인지...?”

어린 집사는 별것도 아닌 일에 얼굴 빨개졌다.

“에, 에잇!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키르케가 오면 폐하랑 제가 다녀갔다고 하세요!”

“어? 벌써가?”

“이런데 오래 있으면 병 생겨요!”

끝까지 닥터 가슴에 못질했다. 닥터 줄리안은 허허 웃으며 빨리 가라고 욕지거리했다. 고상한 수도원 선생님도 늑대성 사람이 다 되었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시외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짐이 많은 상인들은 시내를 관통하는 늑대도로를 이용하고, 농사를 짓는 영지민은 남쪽에 몰려 있어 북쪽으로 잘 오지 않았다.

“저기 새끼 양이야.”

길 잃은 새끼 양 한 마리가 메에에- 메에에- 울다가 모닝스타를 보고 도망갔다. 어느 집 양인지 몰라도 그 집 아이들은 속이 꽤 썩을 것이다.

“그리고 그람 형제네요.”

로벨이 우격다짐으로 고용한 징수관 형제가 새끼 양을 쫓다가 로벨을 보고 멈칫했다. 좌우로 구르는 눈동자를 보아 도망갈까 말까 갈등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눈을 마주쳤다.

“으아닛! 공왕 폐하!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십니까!”

“저 멘트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죄다 누추함 타령이네. 그리고 여기는 폐하의 도시거든요? 우리 폐하가 누추한 곳을 다스린다는 거예요?”

로벨이 칼싸움의 천재라면 어린 집사는 말싸움의 천재였다. 장사꾼을 활동한 적 있는 그람 형제가 쩔쩔매었다.

로벨은 말라깽이 그람 품에서 애타게 엄마를 찾는 새끼 양을 보고 물었다.

“급료가 부족해?”

“예?”

“그래서 훔친 거야?”

그람 형제는 무슨 뜻인지 3초쯤 고민하다 펄쩍 뛰었다. 과거에 지은 죄가 있어 예민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이건 어디까지 업무의 일환입니다요!”

“징수관 업무에 새끼 양을 훔치는 게 있어?”

“훔친 게 아니라니까요!”

말라깽이 그람이 어버버하자 땅딸보 그람이 빠르게 설명했다.

“가끔씩 양을 풀어놓고 자기 게 아닌 척하는 놈들이 있습니다요. 가축은 2년에 한 번 조사하니까 이렇게 속여서 세금을 안 내는 겁니다요. 나중에 걸리면 그 사이 낳은 새끼라고 우기지요.”

“오! 똑똑한데?”

“...폐하가 칭찬하면 안 됩니다요.”

로벨은 새로운 탈세 방법에 감탄한 후 해결책을 물었다. 어느덧 노련한 징수관이 된 그람 형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수 있습니까요. 이렇게 잡아놓고 주인이면 찾아가라 해야지요. 세금이 높아 봐야 양 한 마리 값보다 못하니 울면서 찾아갑니다요.”

로벨은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예산을 책임진 어린 집사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말해야죠! 본보기로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면 되는데!”

늑대성은 영외 수익이 많아서 영내 세금은 낮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탈세를 저지르니 못마땅했다.

“증거가 없습니다.”

“정말로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요.”

그람 형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로벨은 흥분한 어린 집사를 달래고 열심히 일하는 징수관을 치하한 후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아, 생각난 김에 양치기를 만나러 가자.”

“그 목동 꼬마요?”

“집사랑 같은 나이야.”

“저도 아직 꼬마니까요.”

로벨은 목초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양치기 소년을 생각했다. 혹시 로시난테 4세나 5세가 있으면 마녀에게 선물하자고 했더니 어린 집사가 크게 좋아했다.

“역시 이상해.”

“또 뭐가요?”

“음... 그냥 이상해.”

로벨은 어느덧 훌쩍 커서 사랑을 하는 어린 집사를 흐뭇하게 보았다. 꼭 왕이 되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한 것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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