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5화 (405/605)

405화. 대관식

겔몬 족의 족장, 떡갈나무의 화신, 최초의 드루이드이자 최후의 예언가가 나무뿌리 같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것이 진정 구원이라 할 수 있는가?”

죽은 자의 왕, 어두운 밤의 주인, 야만인 학살자이며 뱀파이어의 군주가 냉혈동물처럼 웃었다.

“그가 보장했소. 헌데 무엇이 더 필요하오?”

숲지기와 아이들의 수호자, 장난꾸러기와 말썽쟁이의 친구, 시간을 여행하는 요정의 왕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천 년이야. 난 상관없지만, 너희들은 아닐걸?”

“영겁에 비하면 천 년쯤이야.”

“과연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전설 속에 나오는 반신(半神)들이 대화를 이어갔다.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로벨 로드릭’과 관련이 있었다.

‘로벨 로드릭... 그게 누구야...?’

필립 로드릭의 셋째 아들, 늑대성의 젊은 공작, 무적무패의 기사, 그랜드 토너먼트 챔피언, 그리고 300년 만에 돌아온 볼탄 반도의 유일한 왕.

“난 여전히 동의하지 않네. 허나,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잠시 두고 보지.”

드루이드가 양보했다. 뱀파이어가 송곳니를 보이며 말했다.

“현명한 판단이오, 잊혀진 족장.”

마도(魔道)를 수호하는 반신(半神)들이 결론을 내렸다. 이해와 양보는 대체로 옳았다. 실체하지 않는 ‘나’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

로벨은 눈을 뜨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쌍꺼풀을 짙게 그리고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나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야 했다. 대관식 중에 깜박 졸았다는 것이 알려지며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이다.

“아, 깼어요?”

어린 집사가 한심하게 물었다. 로벨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끝내 아무 말이나 했다.

“옛 신을 신(God)이 아니라 옛 신(Old God)이라 부르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옛날에 떠난 분이니까 옛 신이죠. 우리 곁에 있을 때는 그냥 신이라 불렀을 테고요.”

“그럼 옛 신보다 더 오래된 옛 신이나 앞으로 나올 새로운 신이 있을까?”

“신학이라면 리암 수사님께 여쭤보는 게 좋겠지만, 안 속으니까 그만해요. 그런 심오한 고찰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졸았잖아요? 어허, 다른 사람들도 봤으니까 발뺌하지 마요.”

로벨은 고개를 살짝 들어 맞은편을 보았다. 마녀 키르케와 외팔이 더치가 웃음을 참기 위해 서로를 꼬집고 있었다.

“...전부 봤어?”

“전부는 아니죠. 저분은 옛 신이랑 소통하느라 바쁘잖아요.”

로벨은 머리를 살짝 돌려 2계단 아래를 보았다. 인어해 건너 교단 본부-교황청에서 파견 온 늙은 주교가 볼탄 반도와 볼탄 반도의 왕을 축복하고 있었다. 성경 한 파트를 통째로 암송하는 축복이라 아주, 아주아주 오래 걸렸다. 단상 위에 무릎 꿇려놓은 ‘왕’이 깜박 조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이크, 이쪽을 봐요.”

너무 대놓고 떠들었을까. 주교가 로벨과 로벨 뒤에 시립한 어린 집사를 힐끔거렸다. 옹알이할 때부터 함께한 기사와 집사는 뻔뻔하게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았다.

교황청의 주교는 참된 성직자였다.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반성했다. 그래서 아홉 장 정도 남은 축언을 넘기고 핵심만 읊었다.

“옛 신의 거룩한 의지를 대신하여 볼탄 반도의 새로운 왕, 로벨 로드릭 공왕을 축복하나이다.”

하품을 참느라 눈알이 시뻘게진 허풍쟁이가 쟁반을 들고 냉큼 달려왔다. 밤마다 못살게 구는 마누라, 이웃 영지에 시동으로 보낸 첫째 아들, 빚 갚으라고 닦달하는 못된 상인 등을 생각하던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늘의 클라이맥스였다.

허풍쟁이가 무릎을 꿇고 쟁반을 높이 올렸다. 주교는 거추장스러운 양 소매를 접고 쟁반 위의 하얀 관을 들었다. 고전적인 디자인의 왕관이었다. 그러나 재질만큼은 남달랐다. 금이 아니라 은으로 만들었는데, 물처럼 깨끗하고 풀잎처럼 가벼운 은이었다.

“알루미늄...?”

어린 집사가 물고 빨며(?) 애지중지한 알루미늄 왕관이었다. 교황청의 주교는 오늘의 대관식이 역사뿐만 아니라 야사에도 길이 남겠노라 생각했다.

“옛 신이시여...”

교황청의 주교는 지저분한 노욕을 누르고 대관식을 계속 진행했다. 일생의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 머리에 살며시 왕관을 올렸다.

“이로써 이 땅의 왕이 탄생하였다.”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볼탄 반도 폐하 만세!”

호른 경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이 순간을 위해 월동준비마저 팽개치고 늑대성에 모인 기사들이었다. 늑대성의 홀과 안마당을 가득 채운 수백 명의 기사가 입으로 만세 소리를, 몸으로 쇳소리를 내었다.

“로벨 로드릭 만세! 볼탄 반도 만세!”

“공왕 폐하 만세! 우리의 새로운 왕 만세!”

쿵! 쿵! 쿵! 쿵! 쿵!

로벨은 값비싼 왕관이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났다.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어 불편했는데 다행히 티를 내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붉은 망토를 둘러주고 펄프 대장이 아론다이트를 칼집채 대령했다. 로벨은 칼손잡이를 잡아 다소 과장되게 뽑았다. 스르릉-! 수백 개 횃불과 수천 개 촛불이 칼끝에 집중되었다. 성 한 채 값의 왕관 탓인지, 아니면 전설 속의 요정검 탓인지 눈부시게 찬란했다.

“나는...”

예정대로면 여기서 왕의 맹세를 해야 했다. 기사들의 명예를 잘 챙기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맹세를 할 수 없었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로벨은 리암 수사가 밤새 써서 아침까지 달달 외우게 한 선서문을 집어치웠다.

“나는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이다.”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늑대성이 함성으로 날아갈 뻔했다.

@

일부러 날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볼탄 반도의 건국일은 놀기 참 좋은 날이었다. 가을추수가 끝나 먹거리가 풍부하고 겨울바람이 불지 않아 옷가지가 가벼웠다. 로드릭 시티의 주민들은 한 손에 거품 가득한 맥주를, 다른 한 손에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양고기를 쥐고 성대한 도시 축제를 만끽했다.

“와하하하! 우리 영주님이 어떤 분이냐면 말이야!”

“영주님 아니고 왕이요.”

“웁스! 우리 국왕님이 어떤 분이냐면...”

“국왕님 아니고 공왕 폐하요.”

“그래! 그래! 우리의 폐하가... 아니, 근데 왜 자꾸 시비야!”

누구를 흉내 내던 청년 양치기는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잘 익은 고기를 챙겨 도망쳤다. 이걸 모르는 걸 보니 공왕 폐하를 잘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우리 영주님이 이제 왕이라니...’

양치기는 꾸릿꾸릿한 냄새가 나는 양고기를 우물거리며 언덕 위 늑대성을 보았다. 고깔모자를 쓴 마녀와 함께 가축을 사러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지나 무려 왕이 되었다고 한다.

‘뭐, 그럴 수 있지.’

사실 그때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분’이었기에 호칭 빼고는 변한 것이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 백작인지 공작인지 왕인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치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영주님이 왕이 되었다고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먹고 마실 축제가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저기는 좀 다를까?’

비단옷을 입고 큼직한 말을 탄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분이 된 심정이 궁금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양치기는 어깨를 으쓱이고 시끌시끌한 축제현장으로 향했다.

@

추수제를 겸한 건국기념축제였다. 외국의 축하사절과 상인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당초 예정보다 하루를 더 놀았다. 그만큼 선물도 쌓여갔다.

“잉그비아 왕국의 에드워드 3세 폐하가 보낸 선물입니다.”

로벨은 우아한 동작으로 인사하는 잉그비아 왕국 대사와 사람 하나 담을 정도로 커다란 상자를 보았다. 진귀한 보물보다 당장 쓸 수 있는 재화가 도움될 거란 거만한 축하 메시지와 함께 은화를 가득 보냈다. 어린 집사는 무례함에 화를 내다가 은화무게에 감동했다. 참 솔직한 집사였다. 하지만 로벨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네일 공국의 흐롤프 야를이 보낸 선물입니다.”

누가 바바리안 나라 아니랄까봐 금도끼와 은도끼를 한 쌍으로 보냈다. 우정과 믿음 어쩌고 설명을 늘어놓았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혹시 도금이 아닐까 게슴츠레 살폈다. 로벨은 역시 감흥이 없었다.

“저스티스 기사단의 카를 브라운 경이 보낸 선물입니다.”

고급 양피지로 만든 성경과 황금으로 만든 옛 신의 상징물이었다. 로벨 옆자리에 앉은 교황청 주교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반면 어린 집사는 돈이 안 되는 거라고 혀를 찼다.

“검은 숲의 알버트 제임스 공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붉은 산의 튜터 하인즈 자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사트로 가문의 볼프 사트로 후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자유도시연맹의 아슬라 의장과 12인 의원이 진상한 선물입니다.”

“모나카 왕국의 압브라 술탄이 보낸 축하 메시지와 선물입니다.”

로벨과 친분이 있는 세력은 물론이고, 앞으로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세력까지 선물을 보내왔다. 어린 집사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다 못해 뒤통수에서 서로 만날 지경이었다. 금은보화는 기본이고, 후추나 샤프란 같은 진귀한 향신료, 진주나 산호 같은 희귀한 보물이 가득했다.

로벨은 지친 듯 몸을 기울였다. 알루미늄 왕관이 살짝 삐뚤어졌다.

“아직도 멀었어?”

“에르나 왕국에서도 축하사절이 올 거예요. 그쪽은 특별히 신경 써서 보냈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왜?”

“포비아 왕국의 1/5이 떨어져 나갔잖아요. 적국 입장에서 얼마나 좋겠어요?”

웃으며 할 이야기가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역시 보물의 힘은 대단했다.

“마침 편지도 왔어요. 가만 있자... 로벨 로드릭 공왕의 위대한 업적과 볼탄 반도의 무구한 영광을 기리며 뜻깊은 날을 축하하고자... 역시 에르나 왕국이네요. 혓바닥이 너무 길어요.”

과거 작은 나라가 그러했듯 국명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볼탄 반도 공국, 혹은 로벨 로드릭 공국이라 불렀다. 거기에 아쉬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어린 집사는 시큰둥하게 편지를 마저 읽었다.

“...가는 길이 같으면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이로운 바, 진의를 의심하지 않고 함께하기를 청하니... 이거 무슨 뜻이죠?”

어린 집사가 모르는 것을 로벨이 아는 경우는 드문데, 지금이 드문 경우에 속했다. 로벨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왕관을 고쳐 썼다. 지루함이 한 방에 사라졌다. 메인 홀을 서성이는 기사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였다.

“군사동맹 제안 같은데?”

“왜요?”

“적이 같으니까?”

“누구요?”

로벨은 대답을 하면서 곤혹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리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포비아 왕국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