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3화 (403/605)

403화. 본때

크고 장엄한 궁성의 홀에서 금은보화로 치장된 화려한 왕관을 쓰고,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함께 고층 발코니에 올라 거리를 가득 메운 수천, 수만 명의 추종자의 환호를 받으며, 일국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지문상의 이유로, 연극에서는 무대의 제약으로 흔히 생략되는데, 대관식은 당일보다 준비과정이 복잡하고 험난했다. ‘나 왕 할래’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옛 신의 교단을 설득해서 최소 주교급을 모셔 와야 해요. 옛 신의 대리인이 공증하지 아니면 왕위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어요. 막말로 왕관 씌어줄 사람은 있어야 하잖아요?”

“어? 어라? 그러고 보니까 왕관은 어쩌죠? 왕이면 왕관이 있어야 하잖아요?”

“왕관도 종류가 많아요. 대관식에 쓸 것은 좀 더 권위적이고 상징적인... 아니, 왕관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주변국의 대사도 미리 만나야 해요. 우리끼리 ‘왕이다!’ 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지금도 왕 비슷한데 왕이라 못하는 게 그거잖아요?”

정치적인 준비 외에도 물질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외국인에게 얕보이지 않을 만큼 성과 도시를 꾸며야 하고, 새로이 충성맹세할 기사들에게 선물을 줘야 하며, 볼탄 반도 전체까지는 아니어도 로드릭 시티 주민들은 하루 종일 먹고 마시게 해줘야 했다. 이 정도는 해야 건국왕의 위엄이 바로 섰다.

“크레타 시티의 세금이랑... 가을 추수 작물이 있으니까... 으으... 충분할까...”

로벨은 한껏 들뜬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운 호른 경 이하 기사들을 향해 헛기침을 발사했다.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잖아.”

로벨 로드릭 군은 아직 얼음성에 있었다. 국왕의 확답을 기다리면서 얼음성을 비롯한 점령지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세를 읽지 못하고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많았다.

“쟤네는 언제까지 저기 있을 거지?”

로벨은 성 밖에서 와- 와- 소리 지르는 반(反)로벨 로드릭 연합군을 지적했다. 굳이 성탑에 올라가지 않아도 뭘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볼 때... 우리를 포위했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요?”

“4천 8백 명을 고작 1천 명이?”

“숫자가 또 늘었습니다. 지금은 1천 5백 명쯤 됩니다.”

“그래봐야 한 줌도 안 되는 오합지졸이죠. 아니, 뭘 믿고 저러는 거예요?”

1천 5백 명의 병력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지방 하나를 도모할 수 있는 대군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로벨 로드릭이었다. 무려 무적무패의 기사였다. 2배 많은 병사를 끌고 와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텐데, 반의반도 안 되는 병사로 포위씩이나 하니 가소롭다 못해 안쓰러웠다.

“그냥 두고 보기도 불편한 상황입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선동하는 말본새가 갈수록 저질스러워집니다요.”

호른 경과 허풍쟁이가 불만을 표시했다. 볼탄 반도 역사에 둘도 없을 기념적인 날에 똥물을 뿌리는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핏물로 바꿀 수 없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목을 움츠리고 중얼거렸다. 기사들의 까맣고 파란 눈동자가 대공의 불그스름한 입술을 향했다.

“하얀 숲은 아직도?”

“예.”

기사들과 용병들은 왜 저리 하얀 숲을 신경 쓰는지 이해 못했다. 12기사 가문이라고 하지만 위세가 대단하지 않았다. 프란시스, 사트로, 자비에 등을 거꾸러트린 로벨이 경계할 필요 없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만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 없소. 그리고 왕이 되기로 결심했으면 고른 가문의 사절이 오기 전에 저 시끄러운 강아지들을 쫓아내는 게 좋소. 포클랜드의 배부른 돼지들이 헛된 망상을 가질 수 있잖소.”

어린 집사를 포함한 일부 기사들이 ‘아하?’ 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답신이 늦다 했네요.”

“설마 저것들한테 기대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도 집에 가려면 해치워야지.”

로벨은 길지도 짧지도 않게 고민한 후 말했다.

“기사들과 맨앳암즈를 부르시오. 농민병은 필요하지 않소. 기사 종자는 16살 이상만 참전시키시오.”

그렇게 모으면 5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몸을 꼿꼿이 하고 흉갑을 두드렸다.

“왕의 명을 따릅니다.”

@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필드 아머를 완전히 갖췄다.

풀 플레이트 아머 중에서도 최첨단 기술을 모아 만든 필드 아머는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었다. 어깨와 팔꿈치는 작은 철판을 여러 장 겹쳐 만들어 동방대륙의 부채처럼 접었다가 펴지고, 오른쪽 겨드랑이와 왼쪽 가슴에는 랜스와 방패를 걸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궤를 달리하는 풋 컴뱃 아머와 비교하면 사타구니와 하체가 다소 부실하지만, 그 부분은 마갑(馬甲)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좋아요. 다 됐어요.”

어린 집사가 등짝과 허벅지를 두드려 고정 상태를 확인한 후 말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가죽장갑 위에 컨틀렛을 끼웠다.

“영주님은 이제 영주님이 아니에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그게 뭐야? 호칭이 이상하잖아.”

“음... 폐하라고 부르기 어색해서요. 그리고 아직은 왕이 아니잖아요?”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미소 지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전투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건지, 왕좌에 오르는 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걱정 많은 소꿉친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방을 나섰다.

로벨이 아성에서 나오자 마녀 키르케가 모닝스타를 끌고 왔다. 아니, 끌려왔다. 자꾸 친한 척하는 기사들 때문에 심기 불편하던 하프 유니콘은 주인을 보고 반가워 꼬리를 흔들었다. 홍당무로 달래주던 말구종 마녀는 뒷전이 되었다.

“저게 진짜!”

로벨은 입술을 뒤집고 혓바닥 날름거리는 모닝스타와 인사하고 마구를 점검했다. 사람 손을 많이 가리는 말이라 로벨이 직접 확인해야 했다.

“주군, 기사들이 기다립니다.”

호른 경이 은근히 재촉했다. 이런 준비는 원래 아랫사람이 해야 했다. 로벨은 안장끈을 두 번 꼬아 처리한 후 등자를 밟았다. 어린 시절 처음 말을 탈 때는 체고가 너무 높아 오라비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근 60파운드의 갑옷을 입고도 가뿐했다.

“랜스.”

허풍쟁이 제이콥이 기병용 해비 랜스를 올려주었다. 로벨은 창자루로 무게를 가늠한 후 수직으로 세웠다. 로벨이 등장했을 때부터 눈치를 보던 문지기가 기회다 싶어 내성의 문을 열었다.

“기사 나리가 나오셨다!”

“정숙! 정숙해라!”

로벨을 기다리는 300여 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럴싸한 호버크(=기장이 긴 전신 사슬갑옷)를 입은 용병도 있고, 파츠가 부족하지만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용병도 있고, 동방의 기사처럼 스케일 아머를 입은 용병도 있었다. 울프 용병단 소속의 맨앳암즈였다.

로벨은 휘하 병사들을 쭉 보고 좀 더 먼 곳을 보았다.

로벨의 보호를 받는 귀부인과 어린 공자들이 외팔이 소대 옆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 기도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로벨 만큼 화려한 필드 아머를 갖춘 기사와 수염이 거뭇거뭇한 기사 종자들이 말을 타고 대기 중이고, 성벽 위에는 애꾸눈과 겁쟁이가 지원사격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긴장한 눈빛과 나지막한 기도 소리. 살인 직전의 표정과 갑옷 부딪치는 소리. 숨을 깊이 들이 마시자 전쟁의 냄새가 났다.

“가자.”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울프 용병단 사이를 지나갔다. 펄프 대장이 철저히 훈련시킨 터라 꼴사납게 멈추거나 비키라고 소리칠 필요 없었다.

“뒤로-! 돌앗-!”

로벨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울프 용병단이 반전했다. 사열식을 처음 본 농민과 인질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10년 동안 하나의 집단으로 운영된 군대는 희귀한 것이었다. 무장수준과 실전경험을 더하면 도저히 패할 것 같지 않았다.

“성문 열어.”

“성문을 열어라!”

체격 좋은 외성 문지기 셋이 도르레를 감았다. 쇠사슬이 불쾌한 마찰음을 내며 돌아갔다. 어지간해서 꿈쩍하지 않는 쇠창살이 올라가고, 떡갈나무로 만든 굵은 성문이 좌우로 열렸다.

“가자.”

로벨은 모닝스타의 목덜미를 두드려 앞으로 나갔다. 로벨의 뒤로 호른 경 이하 기사들이 우람한 전투마를 몰며 따랐다. 그리고 깃발을 높이 든 기사 종자와 병장기 소리가 요란한 울프 용병단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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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문이 열렸습니다! 리히터 경! 얼음성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반(反)로벨 로드릭 연합군 진영에 소란이 일어났다. 보름 넘게 꼼짝도 안 하던 얼음성이 크게 기지개를 켠 것이다. 그러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갖은 헛소리를 하던 세 갈래 강의 에드가 리히터 경은 초병의 보고에 껄껄 웃었다.

“그 천한 대공이 이제야 사람을 보내나 보군!”

에드가 리히터 경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여러 기사들이 질 수 없다는 듯 더 크게 웃었다.

“국왕 폐하를 비롯해 이렇게 많은 기사가 잘못을 지적하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암! 작은 전쟁에서 몇 번 이겼다고 오만방자한 것이 어찌나 꼴불견인지 모르겠소!”

보고를 한 초병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뭔가를 꾹 누른 후 좀 더 소상히 말했다.

“전령이 아닙니다! 수백이 넘는 군대입니다! 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 보고해야 했다. 기사들은 깜짝 놀라 술잔을 던지고 일어났다.

“기, 기습인가!”

“내 갑옷을 가져와! 내 갑옷!”

술기운이 날아가 이성을 찾은 에드가 리히터 경은 우선 막사 밖 경계초소로 달려갔다. 얼음성의 남쪽 성문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초병의 말대로 흙먼지가 자욱했다. 대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족히 4, 5백 명은 되었다.

“그, 그래도 저 정도 숫자면...”

에드가 리히터 경은 아군 병력이 1천 5백 명이란 것을 떠올리고 빠르게 진정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기사들에게 언제 놀랐냐는 듯 허세를 부렸다.

“훗. 별 거 아니외다. 겁 많은 대공이 직접 나서기 전에 탐색전을 벌이나 보군.”

“저 숫자가 탐색전이면 그게 더 문제 아니오?”

생각보다 똑똑한 기사가 반문했다. 하지만 진짜 똑똑하면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저쪽이 병사가 많다고 하나 대부분 볼탄 반도의 농민병이오. 죽은 병사를 보충할 수 없고, 소모된 무기를 보급할 수 없소. 겁먹지 마시오.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승리하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무슨 짐승의 소리냐고 따졌을 것이다. 자기들도 외지에서 온 처지고, 징집이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나 거듭 말하지만 그 정도 상식이 있는 기사는 애초에 이곳에 모이지 않았다.

부우우우우웅-!

부우우- 부우우웅-!

성 밖에서 대열을 갖춘 로벨 로드릭 군이 나팔을 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기사들에게 보내는 도발이었다. 에드가 리히터 경은 홀랑 넘어갔다.

“경들 모두 전투 준비하시오. 저 볼탄 반도 촌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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