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2화 (402/605)

402화. 선언

북해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여름내 머물던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자 높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한 해 농사를 끝낸 가축들은 잘 익은 순무와 양배추, 푹 삶은 귀리와 콩으로 배를 채웠다.

“천고마비의 계절이군요.”

“천... 뭐라고?”

“동방대륙의 속담이에요. 가을에는 말이 살찌니까 열심히 운동시키라는 뜻이죠.”

“아하, 동방대륙인은 부지런하구나.”

의미가 달라도 교훈은 되니까 그냥 넘어갔다. 게다가 지금은 이역만리의 격언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펄프 대장이 지나간 세월을 잊고 버럭버럭 소리쳤다.

“애꾸눈! 서둘러! 북문은 됐어! 이쪽부터 해결해! 야, 임마! 뭐하냐! 1소대 오른쪽! 2소대 왼쪽! 뭐? 당연히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이지! 겁쟁이는 어디 갔냐! 대포 올린지가 언젠데 아직도 장전이 안 됐냐고!”

노장은 죽지 않았다. 신참 고참 가리지 않고 엉덩이를 걷어차 어수선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적의 파발이 오기 전에 그럴듯한 수비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나는 강과 호수의 땅 리히터 가문 장남 에드가 리히터다!”

“강과 호수의 땅?”

로벨은 성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기사를 보고 중얼거렸다. 어린 집사가 친절히 설명했다.

“세 갈래 강을 그렇게 부르기도 해요. 그래 봐야 볼탄 반도의 반의반도 안 되는 촌동네죠.”

로벨이 왕이 될 거란 소문이 퍼지자 지금껏 귀한 병사가 상할까 눈치 보던 제후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호의보다 적의가 많았다.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 귀족들이 이걸 노리고 자치권을 운운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자를 어찌합니까?”

호른 경이 속삭이듯 물었다. 속뜻은 좀 더 순수했다. ‘죽일까요, 살릴까요?’

“기사답게 대하시오.”

호른 경은 들릴 듯 말듯 한숨을 짓고 여장 앞에 섰다.

“본인은 볼탄 반도 공작의 수행기사이자 로드릭 항과 자작나무 숲의 주인 패트릭 호른이오! 이곳에 온 목적을 밝히시오!”

“거룩한 옛 신과 위대한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은혜를 모르는 로벨 로드릭 대공의 부도덕함을 바로 잡고! 300년 역사가 깃든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로벨은 원색적인 비난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요 며칠째 비슷한 소리를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로벨보다 어린 집사가 무안해서 코밑을 쓱쓱 긁었다.

“그래도 저만한 군대를 끌고 온 기사는 처음이죠?”

“먼저 왔다가 간 기사들이 합세한 거야.”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가문이 연합하여 1천 명 가까운 군대가 되었다. 로벨 로드릭 군의 반의반밖에 안 되니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하얀 숲이 오지 않았어.’

로벨은 12기사 가문 중 하나인 하얀 숲의 노릭스 후작을 경계했다.

노릭스 가문은 비밀스러운 하얀 숲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가문인데, 가장 큰 비밀을 꼽자면 현 당주인 둠 노릭스 후작이 300년 전 샘 포클에게 귀순해 작위를 받은 ‘둠 노릭스’ 본인이란 것이다.

‘정복왕 샘 포클의 기사. 하얀 숲과 신수(神樹) 파나케아의 주인. 최초의 드루이드자 최후의 예언가. 그리고 인간의 편에 선 마도의 수호자.’

로벨은 마지막에 집중했다. 하나 같이 전설적이고, 죽여도 죽지 않는 반신(半神)이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은 천차만별이었다. 요정왕과 늑대왕이 같은 종속으로 보이면 그것은 지능에 문제가 있었다. 당연히 뱀파이어 군주와 드루이드 족장도 달랐다.

로벨이 하얀 숲과 마도의 수호자를 생각하는 사이, 세 갈래 강의 리히터 경과 호른 경의 언사가 점점 과격해졌다.

“이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깡촌 기사가 볼탄 반도의 대공을 모욕하는가!”

“드, 듣지도 보지도 못해? 그러는 대공이야 말로 근본을 따지면 하찮은 세습 기사 가문이 아닌가!”

“대공의 가문은 300년 역사의 명문이다! 세를 키운 것은 대공의 힘이지! 하하핫! 가문 말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경하고 다르지!”

갖은 비난에도 무덤덤하던 로벨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진짜 내 힘일까?’ 로벨은 자신의 과거에 자신이 없어졌다.

“저... 저... 떡갈나무 숲의 호른 경! 결투를 신청한다! 겁쟁이가 아니면 성 밖으로 나와라!”

“떡갈나무 숲이 어딘지 몰라 안 되겠군! 자비를 보일 때 경의 깡촌으로 돌아가 말젖이나 짜라!”

“와아...”

마녀 키르케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기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이었다. 로벨 앞에서 항상 점잖은 척하는 호른 경이라 더욱 놀라웠다.

“역시 사랑의 힘은...”

“응? 뭐라고?”

로벨은 딴 생각하느라 마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마녀는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니에요! 아주아주 평범한 마녀 키르케의 걱정이에요!”

로벨은 성문을 향해 랜스 차칭할 자세를 취하는 세 갈래 강 기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할 만하네.”

로벨에게 대적하는 군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로벨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기어이 폭발할 것이다.

기사를 ‘기사답게’ 대해주고 온 호른 경이 잔뜩 쉰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군의 뜻을 잘 이해했습니다.”

“...어딜 봐서 영주님이 뜻이에요?”

머릿속에 말똥이 가득한 기사라도 성을 상대로 창질할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로벨이 대응하지 않자 쒸익쒸익! 거리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벨 로드릭 군의 승리라면 승리였다. 하지만 로벨의 기사 중 표정이 밝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로드릭 가문의 기사로 알려진 기사 중 가장 성질이 급한 것은 폭풍성의 랭스터 경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로벨에게 충성맹세한 기사들은 로벨이 머무는 메인 홀에 차마 발을 들이지 못하고 뒤뜰에 옹기종기 모여 불만을 성토했다. 로벨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가시성의 바이란 경이 폭풍성을 진정시켰다.

“하얀 숲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오. 다음 전투로 마무리하려는 것이지.”

“그 말이 아니잖소. 적? 적이 어디 있소? 저 오합지졸이 우리 볼탄 반도의 상대가 될 것 같소? 지금 내 말은...”

“진정하시오. 가볍게 꺼낼 언사가 아니니까.”

기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니, 그렇게 알려진 구릉성의 마튼 경이 제지했다. 연륜을 무시하지 못하는 나이가 된 랭스터 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최고 연장자인 기사는 개의치 않았다.

“볼탄 반도의 왕이 되실 거요.”

강철성의 도트넘 백작이 대놓고 ‘왕’을 거론했다. 그 과감성에 젊은 기사들이 환호했다.

“진짜요? 맹세코?”

도트넘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내심 듣고 싶었던 대답인지라 기사들 모두 표정이 환해졌다. 이 자리에 없는 파도성과 호수성의 기사들은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어찌하여 그리 확신하시오?”

의심이 많은 바위성의 켈트 경이 바늘처럼 찔렀다. 도트넘 백작은 손가락을 두 개 내밀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을 끝내야 하니까.”

켈트 경이 어이없어서 성벽을 가리켰다.

“주군이 왕이 될까 배 아파하는 작자들이 저리 많은데?”

“저들은 하찮은 들개무리요. 중요한 것은 고른 가문이지. 통제할 수 없는 부하를 둔 심정이 어떻겠소? 이대로는 의심이 풀리지 않을 테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싸우게 될 것이오.”

국왕이나 왕가가 아니라 ‘고른 가문’이라 칭했다. 그러나 계속 싸운다는 대목에 집중한 기사들은 새겨듣지 않았다.

“주군이 왕이 되면 싸우지 않아도 되오?”

“당장은 그럴 것이오. 몇십 년 뒤는 모를 일이지만.”

국왕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왕이 되라 부추기는 것은 호의가 아니라 손을 끊겠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는 친구보다 확실한 적이 낫다는 것이군.”

“적어도 자신의 왕위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기사들이 납득할 정도니 똑똑한 로벨과 어린 집사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오?”

첫 번째 이유로 만족하지 않은 늪지성의 매튜 경이 다시 물었다. 도트넘 백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저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왕이 되지 않으면, 대공의 지난 업적이 모두 거짓이 되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로벨의 고뇌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반 도트넘 백작뿐이었다. 그렇기에 로벨의 선택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위를 거부하는 것은 지금껏 쌓아온 명예와 명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전부 마도의 수호자가 만들어준 것이 되니까. 허나,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기사 중의 기사, 기사의 왕이니까.’

이 사실을 말해줄 수 없기에 미소만 지었다. 그때 경륜이 짧아 침묵하던 몰트 도너반 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백작은 왜 여기 있는 거요? 백작은 사트로 가문 봉신이잖소?”

“그러게? 가만 보니까 자연스럽게 합석했잖아?”

뱀파이어 군주는 순간 진심으로 서운했다.

“이제 와서 이러기요? 지금까지 같이 싸워놓고?”

“그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이상하잖소?”

“주군하고 사이가 안 좋기도 하고...”

“거, 미안한테 좀 나가 주겠소?”

“......”

악마가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는 다 있었다.

@

기사들이 악마 하나를 따돌리는 시간, 로벨은 결심했다.

“나 왕할래. 그러니까, 공왕이지?”

갓 구운 빵을 고기국물에 찢으며 선언했다. 역사상 가장 평온한 왕위선언이었다. 로벨과 함께 저녁을 먹던 늑대성 식구 + 호른 경은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다행히 로벨의 베프 어린 집사가 확신을 주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암요! 왕이 되셔야죠!”

어린 집사의 호들갑이 현실감을 깨웠다.

호른 경은 입에 넣은 빵조각을 퉤 뱉고 감격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드디어! 마침내!’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정말 왕이 되는 거요? 무슨 왕이지?’, ‘볼탄 반도의 왕이지!’ 등의 헛소리를 환한 웃음과 함께 떠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박수를 치면서 물었다.

“기사님이 왕이에요? 어?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작위는 그대로예요. 프린스죠. 하지만 호칭은 조심하세요. 기사님(Sir)이나 영주님(My Lord)이 아니라 전하(Your majesty)라고 해야 해요.”

“와! 로벨 전하! 전하 만세!”

마녀는 아마 장난삼아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흥분한 호른 경과 허풍쟁이 등은 장난이 아니었다.

“Long live the king! Long live the king!”

호른 경의 환호가 아성 밖까지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왕위 선언을 들은 것은 경계근무를 교대하는 초병들이었다.

“기사 나리가 왕이 되나 봐.”

“제기럴... 결국 이럴 것을 왜 시간 끈 거야?”

“기사 나리는 나리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가만? 우리가 제일 먼저 들은 거지?”

지금 막 근무를 마친 초병 얼굴에 의미심장함이 떠올랐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다.

“기사 나리가! 왕이 되셨다! 우리 나리가! 왕이시다!”

소문은 순식간에 얼음성을 채우고, 성벽을 넘어 포비아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정복왕 샘 포클 이후 300년 만에 볼탄 반도의 왕이 탄생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