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6화 (386/605)

386화. 시련

로벨은 아무 답도 주지 못했다. 혼인하지 못할 수만 가지 핑계를 가지고 왔지만, 샛별처럼 반짝이는 16살 소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레이디는 상대하기 힘들어... 게다가 공주잖아?”

“카악! 다른 기사도 아니고! 영주님이 그러면 안 되죠!”

어린 집사가 답답해서 빼액-! 소리 질렀다. 가만 보면 레이디 출신(?)이면서 레이디를 유독 어려워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음... 그냥 못 들은 척하면 금방 잊을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내일 연회에는 빠질 거고, 집사가 일을 마무리하면 바로 늑대성으로 돌아갈 거니까, 아무 문제 없어.”

“제 일이 아니라 영주님 일이에요.”

로벨은 골이 난 어린 집사와 한숨 쉬는 호른 경을 달래기 위해 희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희망은 쉬이 이뤄지지 않아 희망이었다.

로벨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3일 차 연회의 불참을 통보했다. 로벨을 축하하는 자리에 로벨이 빠지니 모양새가 안 좋지만, 그렇다고 ‘감히!’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 4일 기간의 연회에서는 중간에 빠지는 사람과 중도에 참가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체력이 강철 같은 기사도 3일 내리 먹고 마시면 진이 빠졌다.

“오늘은 조용해서 좋아. 그치?”

로벨은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자비에 가문의 재산압류, 토지몰수, 권리회수 등 굵직한 일은 끝났고, 자잘한 일은 어린 집사가 마무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일정이 ‘갑자기’ 취소해서 약속도 잡혀있지 않았다. 무기를 손질하고, 갑옷을 수리하고, 모닝스타를 씻기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

“우와악! 영주님! 영주님! 큰일이 났어요!”

로벨이 손이 멈췄다. 기분 좋게 빗질 받던 모닝스타가 콧김을 뿜으며 훼방꾼을 노려보았다. 낯빛이 상기된 훼방꾼은 네발짐승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두 팔을 휘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객실로 가요!”

“왜? 무슨 일인데?”

로벨은 브러쉬에 엉겨 붙은 잔털을 떼어내며 물었다. 어린 집사가 호들갑 떠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공주님! 공주님이 찾아왔어요! 제니시 공주님이요! 뭘 잔뜩 싸들고 찾아왔다고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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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부인이, 그것도 ‘프린세스’의 작위를 가진 왕가의 귀부인이 외간 남자를 병문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니스 공주는 나이답지 않게 우아하게, 그래서 어설프고 귀엽게 말했다.

“대공께서 몸이 편찮은데, 어찌 연회를 즐길 수 있겠어요?”

로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즐겨도 되는데...”

진솔한 마음을 보였지만, 공주는 재미있는 농담이란 듯 깔깔 웃었다.

로벨은 옷매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집무실 밖을 보았다. 어린 집사와 우락부락한 용병 패거리가 자그마한 문틈에 겹겹이 쌓여 훔쳐보고 있었다. 용납은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공주도 신기한데, 공주가 고용주를 찾아왔으니 더욱 신기했다.

“기사 나리, 마실 것을 가져왔... 어? 어어? 왜 그래? 야! 때리지 마!”

외팔이가 평소처럼 맥주통과 맥주조끼를 가져왔다가 허풍쟁이 이하 패거리한테 두들겨 맞았다. 잠시 뒤, 펄프 대장이 직접 가서 와인 도자기와 유리잔을 가져왔다. 어린 집사는 그것도 탐탁지 않았다.

“차 없어요? 홍차? 동방차? 하다못해 허브차라도 가져와요!”

“기사 나리가 언제 차를 마셨다고...”

로벨이 지내는 곳은 도시 수비대 동문 요새였다. 군사 시설이라 귀부인을 접대할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서재도, 회랑도, 화원도 없었다.

로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공주에게 뭘 보여줘야 하나 고민했다.

“제 칼을 구경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갑옷? 프란시스 시티의 장인이 만든 갑옷이라 디자인이 조금 다릅니다. 자세히 보시면 어깨와 상박이 이어지는 곳에 철판이...”

집무실 밖에서 이마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영주님만 좋아한다고요!’

공주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로벨이 16살 때는 최고급 필드 아머를 구경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그, 그럼 말을 보여드릴까요? 유니콘의 피가 흐르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제 친구지요.”

“와! 유니콘이요?”

다행히 말(馬)은 통했다. 저 나이대가 대부분 그러하듯 동물을 좋아했다.

“이름은 모닝스타입니다. 방금 씻겨서 아주 멋질 겁니다. 자, 가실까요?”

로벨은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모닝스타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잘 아는 어린 집사와 용병들은 혹여나 고귀한 공주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모닝스타는 어리고 어여쁜 공주를 무척 좋아했다. 겁쟁이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저거 말 아닐지도 몰라.”

모닝스타의 정체가 무엇이든 공주를 즐겁게 하는데 성공했다. 시내에서 요리사를 고용-납치-해서 점심식사를 거하게 대접하고, 메튜 경과 울프 용병단 스무 명을 동원해 왕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니 초저녁이었다.

“아... 힘들다...”

로벨은 한나절 만에 녹초가 되었다. 레이디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기사 서너 명과 싸우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래도 잘했어요. 이만큼 했으면 국왕 폐하가 불러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래? 그렇지?”

로벨은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시련은 이제 시작이었다. 공주는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그 다음날과 다음날에도 찾아왔다. 로벨은 고귀한 레이디와 놀아주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거기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로벨 로드릭 대공과 제니시 고른 공주가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런 사이?”

“속된 말로... 으... 후계자를 약속한 사이라고요.”

로벨도 어린 집사도 공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다. 어물쩍거리며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어떡해? 정통성 찾다가 시집가게 생겼어.”

“시집이 아니라 장가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어린 집사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퉤! 뱉었다.

“꼼수는 안 되겠어요. 그냥 솔직히 말하죠.”

“뭐?”

“지, 진심인가?”

로벨과 호른 경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린 집사는 왜 저러나 하다가 조금 늦게 오해를 알아챘다.

“아뇨. 아뇨. 영주님 정체 말고요. 그건 진짜 큰일 나죠. 공주님이랑 결혼할 생각 없다고 밝히자고요.”

“그래도 될까?

“그래야 하죠. 국왕 폐하를 만나서 단호하게 이야기해요.”

“조금 실망할 텐데?”

“많이 실망할 걸요. 하지만 이대로 버티는 것보단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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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틀렸다. 국왕 폐하는 어린 집사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아주 많이 실망했다. 그리 좋아하는 델 포니산 와인마저 치우고 침음을 흘렸다.

“내 여동생이...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오?”

로벨은 측근들과 장시간 연습할 핑계를 꺼냈다.

“공주님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않겠습니까. 옛 신에게 귀의한 영혼이라 그리할 뿐입니다.”

로벨이 수도원에 몸에 담았으며, 지금도 수도승처럼 경건하게 지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왕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대공도 후계를 생각해야 할 나이 아니오. 대공의 가문과 봉토를 생각하시오.”

“가문의 일은 가문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려치 마시지요.”

미소를 띠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남의 집안에 신경 끄라는 소리였다. 국왕은 움찔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한 신하라도 타인의 가문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었다.

“본인이 너무 앞서갔군. 미안하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시답지 않은 잡담을 하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공주 이야기를 꺼냈다. 로벨은 그때마다 정중히 거절했다. 겉보기에는 정다운 담화지만, 내용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담판이었다. 결국 저녁때가 되어서 한발 물러났다.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보시오. 왕실과 대공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오. 결심이 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오.”

로벨의 결심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나 현세에 하나뿐인 주군을 무안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로벨은 누가 뭐라 해도 기사 중의 기사였다.

“수일 내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기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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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담판을 지은 것이 효과가 있었다. 공주의 발길이 뚝 끊겼다.

허풍쟁이가 주워들은 소문에 의하면 소박(?)맞은 충격에 밤새 울다 기절했다는데, 본디 소문에는 허위, 왜곡, 과장이 섞이니 아마 아닐 것이다. 조금, 아주 조금 우울할 수야 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영주님, 늑대성에서 편지가 왔어요.”

로드릭 항에서 포클랜드 항으로 건너온 상인이 편지를 가져왔다. 로벨을 대신해 영지를 다스리는 리암 수사의 편지였다.

로벨은 고향 소식에 반갑게 편지를 받다가 멈칫했다. 어린 집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나 해서 봉투의 인장을 살피니 뜯겨져 있었다. 주인보다 먼저 읽은 것에 화내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단지 어두운 표정이 걸렸다.

“무슨 내용이야?”

“호수성의 몰트 헤르만 백작이 죽었어요.”

로벨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가벼운 안부 편지가 아니었다.

“호수성 백작이 급사할 나이는 아닌데?”

로벨은 편지를 펼쳤다. 글씨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간단히 요약해주었다.

“결투였어요. 강철성의 어린 도트넘 자작이 결투 중에 헤르만 백작을 살해했어요.”

“뱀파이어 군주의 양자 말이야?”

로벨이 늑대성을 떠날 무렵 도반 도트넘 백작 일당은 버팅거 시티로 향했다. 그 뒤로 여러 사건이 있어 신경 쓰지 못했는데 대형사고가 터졌다.

“헤르만 백작은 직접 칼 들고 싸울 기사가 아니야. 결투를 해도 대리인을 세우지. 어쩌다가 기사 서임도 치르지 못한 풋내기와 싸운 거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데, 여자 문제 같아요.”

편지를 쓴 게 하필 리암 수사라 표현이 두리뭉실했다.

“헤르만 백작 딸한테 몹쓸 짓이라도 했나?”

“혹은 눈 맞아서 도망가다 칼부림 났을 수도 있죠.”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시나리오를 그렸다.

“북부와 남부의 오랜 갈등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키르케가 좋아할 장르네요. 하지만 흡혈귀가 있으니 호러에 가깝지 않을까요?”

어이가 없어서 농담을 하지만,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강철성과 호수성의 싸움은 검은 성과 늑대성의 싸움이 될 수 있었다.

“볼탄 반도로 돌아갈 때가 됐어요.”

“응. 그래야겠어.”

로벨은 고향에 돌아간다는 기쁨과 새로운 전란의 불안 속에서 고심하다 문뜩 어제 일을 떠올렸다.

“폐하에게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 그대로 말하... 필요는 없죠? 귀족들이 알면 집안 단속을 못한다고 비웃을 테니까요.”

비웃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애써 눌러놓은 포클랜드 영주들이 기회를 틈타 준동할지도 몰랐다.

“그냥 조용히 떠나요. 소식이 전해질 때쯤이면 정리될 테니까 아무 말썽 없을 거예요.”

“응. 그게 좋겠어.”

로벨은 조용히 기사들을 소집해 귀환 명령을 내렸다. 다년간의 전쟁으로 단련된 기사와 병사들이라 썰물 빠지듯이 포클랜드 시티를 빠져나갔다.

그 소식을 들은 귀족과 상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수도를 장악한 대공이 이렇게 갑자기 철수할 줄 몰랐다. 온갖 추측이 생겨나고, 기뻐하는 사람, 아쉬워하는 사람, 재미있어 하는 사람 등이 나타났다. 그중에는 몹시 언짢아 사람도 있었다.

“대공이 떠났다고?”

로벨을 기다리던 국왕이 까칠하게 되물었다.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고향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무적무패의 기사요. 급할 것이 무엇이오?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어.”

국왕은 왕좌에 기대서 못마땅한 턱을 괴었다.

“내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면 내 제안이 우스워서 그런 것이 아니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드릭 대공은 충직한 기사입니다. 의심치 마시지요.”

“정녕 충직하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날개를 꺾지 않았겠지.”

“폐, 폐하...!”

“그냥 하는 소리요. 그냥. 대공과 척질 생각은 없소. 안심하시오.”

국왕은 근심 가득한 시종장에게 물러가라 손짓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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