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무도회
포클랜드 연회는 볼탄 반도와 달리 교양이 넘쳤다. 기사 기준에서 교양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에서 교양이었다.
술잔을 집어 던지는 기사도 없고, 고기 기름을 치마에 닦는 귀부인도 없었다. 심지어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뼈다귀를 한곳에 모아 시종이 치우게 했다. 켈트 경 등은 무심코 바닥에 버렸다가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이거 적응이 안 되는데...”
“그래도 저건 예의가 아니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훌륭하진 않았다. 볼탄 반도 토박이 기사들은 나이프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연회 참석자가 많으니까 호스트가 일일이 고기를 썰어주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손님이 직접 고기를 썰어 먹는 것은 이상했다. 네일 공국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로벨은 썩 괜찮게 생각했다. 호스트는 아니지만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로벨을 찾아왔는데 칼을 쥐고 인사하는 것과 그냥 인사하는 것은 달랐다. 가령, 사자성의 돌체 백작과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이 그러했다.
“대공, 축하하오.”
“왕좌 빼고 다 가지셨군. 대단하시오.”
로벨과 두 백작은 미묘한 인사를 나눴다. 아이언베어 요새에서는 어깨를 나란히 한 전우지만, 왕위계승전쟁 때는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이었다. 마냥 반가울 수도, 무작정 미워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백작의 성을 방문해야 했는데, 포스트 포레스트를 여러 번 지나다니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했소.”
그래서 로벨의 말도 해석하기 어려웠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이웃이니 잘 지내자는 뜻이고, 나쁜 쪽으로 해석하면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니 처신 잘하라는 뜻이었다.
‘둘 다 같은가?’
두 백작은 서로를 한번 보고 물러났다. 대공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은 둘째 쳐도 가진 힘은 진짜였다. 지금 밉보여서 좋을 것 없었다. 그 후로도 여러 귀족과 상인이 찾아왔다. 로벨의 손에 칼이 들렸으니 대놓고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로벨은 반도 못 먹은 고기 위에 나이프를 내려놓고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사흘 동안 이러면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반평생 ‘높은 분’의 시중으로 살아온 시종장이 로벨의 불편함을 알아채고 속삭였다.
“하루만 참으시지요. 내일은 무도회가 개최될 겁니다.”
위로가 목적이면 실패했다.
“무도회? 춤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사와 귀부인이 춤을 추는?”
로벨은 당황해서 두 번 물었다. 시종장은 보는 사람이 기분 좋을 만큼 인자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기사끼리 춤을 추면 이상하겠지요. 생각하신 무도회가 맞습니다.”
시와 노래. 그리고 간단한 춤은 기사의 교양이었다. 물론, ‘교양있다’는 말을 칭찬보다 모욕으로 여기는 기사가 많아 수박 겉핥기로 배우는 편이지만, 그래도 시동과 종자 시절에 한두 가락 정도는 필히 배웠다. 레이디를 꼬시는데 살인기술을 뽐낼 수는 없으니까. 따라서 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트너가 문제였다.
‘키, 키르케를 불러올까?’
기사라면 100명이라도 소집할 수 있지만, 춤을 출 레이디는 왕국 전체를 탈탈 털어도 없었다.
로벨의 외모와 직위와 명성을 생각하면 우스운 걱정이었다. 아무 레이디나 붙잡고 요청해도 흔쾌히 승낙할 테니까. 하지만 로벨은 자신의 저력(?)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종장은 다르게 오해했다. 로벨이 격이 맞는 상대가 없어서 걱정한다고 여겼다. 지극히 왕실다운 오해였다. 그래서 준비한 방책을 내놓았다.
“걱정 마시지요. 공주 전하께서 파트너가 되어주실 겁니다.”
“공주 전하라면...”
로벨은 고른 가문의 레이디들을 떠올려보았다. 노부인들을 제외하면 사실 몇 명되지 않았다.
“제니시 데오니스 고른 공주님? 그분은 이제 15살 아니오? 16살인가?”
“혼기가 꽉 찬 나이지요.”
로벨은 나이프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 쓸 기회가 남아있을 듯했다.
“내 나이를 아시오?”
실제로는 서른하나지만, 공식적인 ‘로벨 로드릭’의 나이는 서른다섯이었다. 이르면 손주를 볼 나이였다. 갓 성인식을 치른 영애와 어울리지 않았다. 시종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부담 가지지 마시지요. 그저 무도회일 뿐입니다. 그리고 대공의 외모는 스무 살이라 해도 믿어지니 공주 전하와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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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은 시간, 로드릭 가문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로벨의 정체를 아는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초대되었다.
“그런 의도였군요.”
호른 경이 이제야 납득된다는 듯 주억였다.
“어쩐지 순순히 작위를 수여한다 했습니다. 주군을 왕실의 일원으로 받을 생각이었군요.”
시종장은 ‘그저 무도회’라 말했지만, 결단코 그냥 무도회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의 의도가 보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축하할 일이지요.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으니까요.”
거짓말이다. 로벨이 정말 결혼하면 가장 뒤집어질 사람이 호른 경이었다. 하지만 로벨의 처지도 정상이 아니었다.
“마녀가 알면 펄쩍펄쩍 뛰겠네요. 힛!”
“웃을 일이 아니다, 집사.”
“맞아. 난 심각하다고.”
로벨은 투덜거리다가 이번 일의 원흉이 어린 집사란 것을 생각해냈다.
“설마 이러려고 대공이 되라 한 거야?”
“예? 에이, 제가 미쳤어요?”
어린 집사가 정색하자 더 따지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이고 말했다.
“그냥 춤 한 번 추고 피곤하다고 빠지세요. 에르나 왕국식 무도회가 될 거라는데, 파트너가 계속 바뀌니 어차피 한 번은 춰야 해요.”
“하지만 난...”
“몸이야 감추면 되죠. 붕대 두르고, 브리간딘을 입으세요. 예식용이라 뭐라 할 사람 없어요. 술 취해서 난장 부리지만 않으면요.”
“내가 언제 난장 부렸어? 그리고 춤을 못 추는데...”
“늑대성 기둥이랑 춤 잘 추잖아요. 그냥 그렇게만 추면 돼요.”
어린 집사가 로벨의 흑역사를 거론했다. 하지만 로벨도 할 말이 있었다.
“우리 성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없는걸...”
같은 기사도 실소하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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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나 왕국풍 무도회는 포비아 왕국의 전통 무도회와 달랐다.
사실 ‘전통’은 포장을 잘한 표현이다. 그냥 술 먹고 고성방가하다가 눈 맞으면 아무렇게나 춤추는 게 포비아 왕국의 일반적인 연회였다. 하지만 까탈스러운 에르나 왕국 연회는 달랐다.
“로벨 로드릭 대공과 제니시 데오니스 고른 공주의 입장입니다!”
에르나 왕국풍으로는 처음부터 남녀가 함께 입장했다. 보통은 부부나 연인이지만, 드물게 모자(母字)나 부녀, 혹은 남매가 함께 입장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연회와 다른 부분이었다.
음식이 뒷전인 것도 색달랐다. 연회장 구석에 고기와 과자, 말린 과일 등이 준비되어 있으나 ‘교양 없이’ 자리 잡고 퍼먹는 사람은 없었다. 아, 있긴 있었다. 주로 볼탄 반도 기사들이었다.
“오, 주군이 오셨소. 그만 처먹고 박수 좀 치시오.”
“누가 처먹었단 말이오! 얌전히 먹고 있잖소! 얌전히!”
어디까지 볼탄 반도 기사 기준이다. 호른 경은 고향 전우들을 남인 척 무시하고 로벨과 공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른 탄성을 질렀다.
“...잘 어울리는군.”
거기에는 질투심이 담겨있었다. 주군의 옆자리에 자신이 있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주군의 아내도 아니고, 주군을 사랑하는 기사가 세상 어디 있는가.
“하지만 안 된 일이야.”
한 가지 안심이 되는 것은, 저 아름다운 공주도 승리자가 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로벨은 끼리끼리 모여 감탄하는 기사와 귀부인을 보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하기도 하고, 주책없이 엄지를 들어 보이기도 했다.
“선남선녀란 것이 이런 것이군! 정말 잘 어울리오.”
“위대한 영웅과 고귀한 공주라니, 이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디 있는가?”
아무래도 국왕 폐하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를 리 없었다.
“제가 많이 불편하신가요?”
로벨은 선남선녀 중 선녀 역할을 담당하는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오른팔에 살며시 팔짱 끼고 우울해 하였다.
프린세스 제니시 데오니스 고른. 국왕 폐하의 친동생이자 왕실의 유일한 미혼 공주였다. 왕국의 귀부인 중 첫 손에 꼽힐 지체 높은 귀부인인데, 신세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첫째 오라비를 쫓아낸 둘째 오라비의 보호를 받으며, 둘째 오라비의 정치적 협력자-그것도 나이가 두 배 많은-에게 팔려가는 신세이니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로벨은 ‘나도 원한 게 아니야!’라 외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기사도에 너무 심취했다.
“그럴 리가요, 공주 전하. 더 없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조명에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 우울해하던 공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그럼 다행이에요.”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까 신세가 아주 나쁘진 않았다. 아무튼 잘생기긴 잘생겼다.
로벨과 공주가 자리 잡자 기다렸다는 듯 국왕 폐하와 왕비가 입장했다. 올 사람은 다 왔다는 뜻이었다.
샘 포클의 업적을 기리는 서사곡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서로서로 인사를 나눴다. 로벨과 공주도 국왕 내외를 찾아가 인사했다.
“오오! 대공! 잘 어울리오! 오늘의 주인공답소!”
“마상시합에만 나오지 마시고, 가끔은 이렇게 무도회에 참석해 주세요.”
로벨은 어색하게 칭찬을 받았다. 그 외 고위 귀족 가족을 두엇 만나고 나니 곡이 바뀌었다. 경건한 서사곡과 다른, 경쾌한 무곡이었다. 춤을 출 시간이 되었다.
“국왕 폐하, 왕비 전하.”
첫 번째 커플은 국왕 내외였다. 아직 젊은 남녀라 빠른 곡조에도 빙글빙글 돌며 금방 춤을 추었다. 가벼운 박수가 나오고, 하나둘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주님? 한 곡 추실까요?”
로벨은 팔짱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어색한 목소리가 소란에 조금 감춰졌다. 공주는 얼굴을 붉히고 손을 맞잡았다.
“영광이에요, 대공.”
로벨의 춤 솜씨는 권력을 동원해 최대한 호평해도 어설펐다. 상대의 발을 밟지 않는데 모든 신경을 기울여 회전할 때나 붙잡을 때나 한 박자씩 늦었다. 그래서 16살 철부지 공주를 즐겁게 했다.
“이게 뭐예요? 깔깔깔!”
완벽함을 강요하는 가정교사를 상대하다 모든 것이 서툴러 쩔쩔매는 잘생긴 기사를 상대하니 재미있을 법도 했다.
“고향과 춤이 달라서... 정말입니다.”
로벨은 애써 변명했다.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연회를 가장한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다시 잔잔한 서정곡으로 바뀌었다. 숨 돌리는 겸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할 시간이었다. 로벨은 예정대로 자리를 뜨기 위해 공주를 놓았다. 실제로도 피곤했다. 분위기를 보니 굳이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계획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공주가 로벨의 팔을 붙잡았다.
“대공은... 소문과 다르신 분이군요.”
“제 소문 말입니까?”
“아주 무서운... 아니, 엄하고 진지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제가... 엄해요?”
로벨은 조금 충격 받았다. 평생 듣지 못한 평가였다.
“하지만 오늘 보니까 아니네요. 오라버니가 말한 것보다 훨씬 좋은 분이에요.”
로벨은 귀부인 사이에서 헤프게 웃는 국왕을 슬쩍 보았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벨이 고개 숙여 화답하자 공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섣부르지만, 그래도 결심했어요. 전 대공을 따르겠어요.”
로벨은 순간 충성맹세로 오해했다. 지금껏 기사들을 만나 한 일이 그거라 그럴만했다.
“저기, 무슨 말씀인지...”
“대공이 사는 곳이 볼탄 반도라고 했지요? 포클랜드에 비하면 많이 낙후되었다고 들었지만... 괜찮아요. 대공이 보살펴 주실 테니까요.”
“제가 왜 보살...”
로벨의 녹슨 눈치가 번뜩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공주가 선언했다.
“오라버니의 뜻을 따라 대공과 결혼하겠어요.”
‘제 뜻은 그게 아닌데요?’ 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