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7화 (337/605)

337화. 구호

전쟁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도 피폐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집사의 말대로 금전이었다. 곡물을 먹지 않는 몬스터는 가을에 수확할 밀과 귀리를 아낌없이 짓밟았다. 이제 겨우 싹을 틔운 작물은 기지개 한번 켜지 못하고 시들었다.

농작물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버그베어가 흘린 피가 목초지의 풀을 병들게 했다. 농사를 망쳐 건초가 부족한데 초목까지 상하면 올겨울 가축을 건사하기 힘들었다.

“우리 집사 머리 좋잖아? 무슨 방법 없을까?”

“이럴 때만 칭찬하지 말라구요...”

어린 집사는 한숨을 쉬고 강구책을 내놓았다. 우선 계약을 위반한 봉신들에게 금과 은과 보리로 배상하게 하고, 붉은 산의 광업을 풀어주는 대가로 12%의 세금을 바치게 하였으며, 기사들이 죽어 치안 공백이 생긴 북동쪽 영지에 울프 용병단 북군을 파견해 상인과 자유민을 착취했다.

“착취가 아니잖아. 정당하게 ‘보호세’를 받는 거지.”

“최소한의 도리 같은 거죠.”

어린 집사가 못되게 말은 해도 모질지는 않아 붉은 산의 피난민과 모몬트 성 영지민을 위해 구제안도 내놓았다. 우선 국경 책임자인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구호품을 요구하고, 폭풍성의 조단 랭스터 경 이하 동부평야 영주들의 ‘자발적인’ 성금도 부탁했다. 펄프 대장과 발가락 슈미츠가 울프 용병단의 남군을 이끌고 한 바퀴 순회하니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이걸로 바깥의 불은 껐는데...”

어린 집사는 펜을 굴려서 잉크를 말리고 오른쪽 귀에 착! 꽂았다. 그게 멋있어 보였는지 마녀 키르케가 입을 크게 벌렸다.

“와아, 어떻게 한 거예요?”

“뭐요? 뭐? 심심해서 죽을 거 같으니까 이딴 거나 연습하려고요?”

어린 집사는 속 편한 마녀 이하 로벨, 호른 경, 용병들이 얄미워서 목소리를 높였다. 수천 명의 영지민을 건사하느라 골머리 썩히는 것은 어린 집사뿐인 듯 했다.

어린 집사는 삐져서 뛰쳐나가는 마녀 키르케를 쳐다보고 다시 한숨 쉬었다. 영지 바깥 일은 마무리되었지만, 영지 안의 일, 그러니까 결원이 발생한 용병단이나, 거래가 끊긴 상단이나, 아비와 남편을 잃은 가정 문제가 남아있었다.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페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어.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페닝이 모자라서야.”

후대 자본주의자 사이에서 ‘세기의 명언’으로 칭송받는 어록이 이렇게 나왔다.

어린 집사는 지근거리는 머리를 식힐 겸 싸구려 종이투성이 집사방을 나왔다. 사실 저 중에 절반은 로벨의 집무실에 들어가야 할 영외 보고서였다.

“이놈의 영주님은 어디 간 거야? 또 몰래 술 마시러 갔나?”

어린 집사는 불경죄를 서슴없이 범하며 악당처럼 성내를 거닐었다.

오후가 반으로 꺾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호른 경 이하 영주들은 병사를 돌려보내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울프 용병단은 북쪽으로 남쪽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떠나서 성에 남은 것은 갈 곳 없는 부상병과 부상병을 돌보는 어린아이뿐이었다.

“그래서 항상 말하잖아. 흉터 하나 없는 놈은 둘 중 하나라고. 완전 샌님이거나, 미친 괴물이거나.”

“샌님은 알겠는데, 괴물은 뭐에요?”

“기사 나리 좀 봐라. 저게 사람이냐?”

로벨과 어린 집사의 관계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누이 비슷했다. 내가 내 누이를 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이 욕하면 참기 힘들었다.

어린 집사는 어떤 간 큰 놈이 영주의 성에서 영주를 욕하는지 낯짝을 보려고 다가갔다. 하지만 근거 없는 욕이 아닌 것 같았다. 연병장의 낡은 허수아비를 오체분시(五體分屍)하는 로벨의 모습이 보였다.

“와우...”

평범하게 해도 놀라운 볼거리일 텐데, 왼팔 하나로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번갈아 뽑으며 허수아비 세 개를 난도질했다. 손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칼끝은 오후 햇살에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화가 나는 것은 별개였다.

“영주님! 아프다고 해서 쉬라고 했더니!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볼탄 반도에서 가장 용감한 기사와 용병들이 움찔해서 눈알 굴렸다. 엄마 몰래 사고 치다 걸린 악동 같았다.

“키, 키르케가 적당한 운동이 회복에 좋다고...”

“술 마시지 말라는 충고는 귓등으로 듣고요? 치료를 골라서 받네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뭐에요? 여기가 무슨 야전 진료소에요? 부상자가 왜 죄다 여기 모여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마. 영광스러운 부상이야.”

로벨이 감싸자 철없는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늑대성의 실세를 잘못 판단했다. 어느 집단이나 예산을 짜는 쪽이 실세였다.

“그래서 뭐요? 보나마나 250% 정도 과장된 허무맹랑한 무용담이나 떠들 거면서? 뭐해요? 빨리 집에 가요! 집이 없으면 요새로 돌아가고!”

어린 집사는 혹여나 성 안의 식량을 축낼까 부상병을 쫓아냈다. 언덕길을 올라올 만큼 성한 부상병이라 구시렁거리면서도 알아서 걸어갔다. 로벨은 무용담을 나눌 친구들이 사라지자 시무룩해졌다.

“영주님도 놀지 말고 적자 메울 생각 좀 하세요. 이거 따지고 보면 영주님 일이에요. 전 일개 고용인이고요. 가만?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렇네? 내가 왜 영지의 재정을 걱정해야하는 거야앗!”

“집사, 집사, 나 좋은 생각이 있어. 진짜야.”

로벨이 히스테리 부리는 어린 집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좋은 생각이요?”

“화내지 않을 거라 약속해.”

“화나지 않을 말이라 약속하면요.”

로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삐진 듯했다. 어린 집사는 너무 쏘아붙였나 싶어서 배시시- 웃었다.

“화 안 낼게요. 안 내요. 페닝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요.”

로벨이 움찔했다.

“그... 조금은 나갈지도 몰라.”

“뭐라구요?”

“투, 투자 말이야! 투자! 그런 거 있잖아?”

“영주님이 투자하는 것은 죄다 무기 아니면 짐승이잖아요.”

“이번에는 달라. 병원이야.”

로벨이 말꼬리를 자르자 어린 집사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건 좀 관심이 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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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중 가장 강력한 기사단은 이교도와 마녀를 사냥하는 저스티스 기사단이지만, 가장 유명한 기사단은 호스피탈 기사단-일명 구호 기사단이었다.

약 2백 년 전 알베니아 왕국 출신의 성 요한이 창설한 기사단으로, 심판과 징벌을 사명으로 삼은 ‘보통의’ 기사단과 달리 치료와 봉사를 사명으로 삼았다.

구호 기사단은 고대 왕국의 의학서를 모으고, 먼 동방의 의사를 초빙-혹은 납치-하여 오랜 시간 의술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머리가 아프면 갓난아기의 오줌을 마시게 하고, 배가 아프면 성수 바른 망치로 배를 두드리던 기존 서양 의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지금도 병이 나고 몸이 상하면 구호 기사단을 찾아가 공물을 바치고 치료를 부탁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큰 도시는 구호 기사단이 운영하는 구호소가 있지만,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은 약초꾼과 약초꾼을 가장한 마녀가 환자를 치료하죠. 기사단의 라이벌이 마녀라니,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정말?”

“우리집 마녀도 써먹을 곳이 있잖아요.”

로벨은 심한 말이라고 생각해 눈을 흘겼다. 어린 집사도 예전 같지 않아 헛기침했다. 세월을 나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식충이니, 구더기니 하는 구박도 잘 하지 않았다.

“아무튼, 좋은 생각이에요. 전쟁 때문에 다친 농민도 많고, 복통을 호소하는 도시민도 많으니까요.”

사람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협소한 도시에서 그러했다. 로드릭 시티도 예외는 아니라 매년 두 자릿수의 병자가 발생했다. 어린 집사가 구호소를 생각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에서 질병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니까.

“치료비도 치료비지만, 약사와 약초꾼한테 세금도 거둘 수 있어요. 가만있자, 뭐부터 해야 하죠? 건물을 짓기는 좀 힘들고, 막사부터 세울까요? 어디가 좋을까요?”

로벨은 머쓱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그전에 키르케한테 부탁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키르케 혼자 못하니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 마녀야 좋다고 하겠죠. 흠. 약초꾼이 필요한데... 아, 숲지기 막내딸이 올해 16살이라죠?”

영주와 집사가 머리를 맞대자 점점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오랜만이라 재미있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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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구호소를 세운다는 말에 아주 좋아했다. 예전부터 마을을 돌며 환자를 봐주고 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로드릭 시티와 뉴 로드릭 마을을 넘어 인근 영지민까지 치료하려면 약재가 아주 많이 필요했다. 쪼들릴 때로 쪼들린 늑대성 재정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비싼 약초가 있으면 좋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약초도 잘만 쓰면 효과가 있어요. 예를 들어 민들레 뿌리는 관절염에 좋고, 달맞이꽃은 열이 날 때 좋고, 엉겅퀴는 피를 많이 흘렸을 때 좋아요.”

“그런 게 효과가 있어?”

“그럼요! 충분히 모이기만 하면요!”

로벨은 기뻐하며 로드릭 시티 북문 앞에 임시막사를 세우고, 구호 기사단의 이름을 슬그머니 빌려 병원(Hospital)이라 이름 지었다. 마녀 키르케는 고풍스러운 고대 왕국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제가 병원장인가요?”

“병원장이자 요리사이자 청소부이자 행정관이죠. 오늘부터 예산 집계할 테니까 제12시에 매일 보고서 가져와요.”

“으앙...”

로벨이 기획하고, 어린 집사가 추진하고, 마녀 키르케가 고생하는 병원 설립은 여러모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좋은 것은 물론이고, 농사를 망친 농민에게 일거리를 주었으며, 호기심으로 시작되는 활기가 생겨났다.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람이 사는 곳 다워졌다.

“좋은 일인데, 좋지만 않아.”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늑대남매를 돌봐주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린 집사의 구박을 심하게 받은 아야와 이야카는 서러움을 참지 못해 병원으로 내뺐는데, 거기서도 환자들이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정말 갈 곳이 없어진 늑대들은 성벽 위에 올라 구슬프게 울었다.

아우우우우...

로벨은 귓구멍을 한번 후비고 거리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인데, 표정이 훨씬 좋았다. 꼭 추수제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도 모두 좋아하니까...”

로벨이 생각한 일 중 가장 장한 일이었다. 깃발 보험보다 훨씬 좋았다. 이제 더 큰 집을 짓고, 더 많은 사람을 모을 것이다.

“아니잇! 왜? 왜 공짜로 치료한 건데요? 왜! 이게 자선사업인 줄 알아요?”

“그럼 어떡해요? 돈이 없다는데. ‘아, 예. 돈 없으면 계속 아프세요’ 하고 보내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럼 집이든 땅이든 받아야죠! 최소한 갚겠다는 각서라도 받던가! 이러면 적자가 더 커지잖아!”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의 한결같은 싸움을 보며 한숨 쉬었다. 어린 집사가 화난 거 봐서 올해는 힘들 것 같았다.

“시작이 반이고, 반쯤 진행했으면, 사실 다 된 거 아닐까?”

로벨은 그렇게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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