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36화 (336/605)

336화. 궁리

동방의 마녀 바바 야가.

옛 신의 신앙이 전해지기 전에는 동방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위대한 존재. 그런 존재가 선물한 신물(神物)은 아주 경이로웠다. 창끝이 살짝 스치고, 생채기나 다름없는 피 몇 방울이 튀었을 뿐인데, 거인의 왼쪽 다리가 사라졌다.

우당탕- 탕-!

모닝스타는 급격한 방향전환에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로벨은 안장에서 튕겨 나와 데굴데굴 굴렀다. 이어서 버그베어도 허물어졌다. 덩치가 크니까 넘어지는 것도 오래 걸렸다.

쿠웅...

로벨은 두 바퀴 반을 구른 후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질어질하지만 두 다리로 서는데 지장 없었다. 망토를 벗어서 다행이었다. 모닝스타 몸뚱이에 망토가 깔렸으며, 추한 것은 둘째 치고 위험했을 것이다.

“버그- 베어-!”

아론다이트를 잡고 길게 뽑았다. 팔, 다리, 목, 손가락, 발가락 등이 멀쩡한지 검토하는 동작이었다. 허리가 욱신거리는 거 말고 멀쩡했다. 버그베어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이었다.

-이 간악한 놈...!

버그베어는 왼손으로 성치 못한 왼쪽 다리를 대신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회색곰을 무두질 없이 가죽으로 만들어낼 무시무시한 공격이지만, 엉뚱하게 로벨 앞 5피트 지점에 맨땅을 때렸다.

“...어디를 노리는 거야?”

로벨은 고대 야만인처럼, 혹은 이 시대 진정한 기사처럼 거칠게 웃었다. 버그베어는 몹시 화가 났다. 오른쪽 눈에 꽂혀있는 흐룬팅 때문에 거리감이 없었다. 저주 받을 요정왕의 검은 주인의 힘이 아니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로벨은 버그베어의 주먹을 피해 사선으로 뛰었다. 거리감에 더욱 혼란을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모닝스타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더 컸다. 전장에서 애마를 잃은 것은 한번으로 충분했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걸 왜 몰라?”

로벨은 슬라이딩으로 빗자루처럼 쓸어오는 버그베어의 왼팔을 피하고 방향을 바꿔 버그베어의 옆구리로 뛰어들었다. 아론다이트의 칼날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나 로벨 로드릭이 주인이야!”

뒷부분은 기합이나 다름없었다. 칼날이 질긴 가죽을 뚫고 1피트 쯤 박혔다. 핏물이 흘러나와 맨땅에서 지글지글 끓었다. 악령 중의 악령다운 저주였다.

-칭왕하는 자가 아직도 있는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놓고 버그베어의 등으로 굴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버그베어의 팔꿈치가 또다시 허공을 때렸다.

“왕 아니야. 공작이야.”

로벨은 버그베어의 무릎 꿇은 종아리에 뛰어올라 등에 매달렸다. 멀리서 보면 털가죽을 뒤집어쓴 아낙이 갓난아기를 업고 이삭을 줍는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라 비율이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모자의 애정 따위 없으니, 버그베어는 로벨을 붙잡기 위해 위아래로 손을 뻗어왔다.

로벨은 잡히지 않기 위해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어깨를 뛰어넘었다. 그곳에 미리 맡겨둔 무기가 있었다.

“내 칼이야. 가져갈게.”

베그베어 입장에서 한 치 과장 없이 ‘눈에 가시 같은’ 흐룬팅이었다. 로벨은 버그베어를 위해 흐룬팅을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역시나 과장 없이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크라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이 로드릭 시티 동쪽 전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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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이탈한 호른 경과 과묵한 몬트 등은 전투마를 세우고 세기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싸움이었다. 흉내쟁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냐...? 볼탄 반도 최강자들의 싸움인가...?”

서운해 할 기사와 괴물이 조금 있겠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묵한 몬트가 ‘염소발’을 꺼내 크로스보우를 장전하며 말했다.

“호른 경, 고블린이 옵니다.”

몬스터에게도 충성심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벨과 버그베어를 향해 약 3개 소대 규모 고블린이 몰려왔다. 기사와 거인의 팽팽한 싸움에 변수가 될 듯했다. 피리 부는 쟝이 이빨을 따딱따딱 부딪치며 졸랐다.

“기, 기사 나리를 태워서 도망갑시다요!”

그래도 우리끼리 가자고 안하는 거 보면 충성심이나 소속감이 있는 모양이다. 로벨이 살아 돌아가야 약속한 1천 페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끼어드는 것은 위험하다. 주군께 방해가 될 수 있다.”

“그, 그럼 어쩝니까요!”

“...주군을 믿어야지. 시간을 벌자. 고블린을 저지한다.”

기사 하나와 용병 일곱이 수백 마리의 고블린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흉내쟁이가 혀를 차고 진짜 모닝스타를 꺼냈다.

“내 이리 될 줄 알았다. 기사 나리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제기랄.”

“전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전쟁 전에 세운 전략이고, 전투 중에 가장 먼저 전사하는 것이 전투 전에 세운 작전이라지?”

용병들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각자 애용하는 병장기를 뽑았다.

“버그베어를 쓰러트리면 우리의 승리다.”

“기사 나리의 승리가 아니굽쇼?”

호른 경은 바이저를 내리고 웃음을 흘렸다. 고고한 호른 경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실은 들은 거지만 비슷하니까 넘어가자.

“지금 우리가 돕는 게 누구지?”

로벨의 승리가 울프 용병단의 승리고, 볼탄 반도의 승리이며, 인간의 승리였다.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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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세 곳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희생이 큰 곳은 로드릭 시티 공성전이었다. 후퇴 명령을 받지 못한 괴물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몸을 던졌고, 울프 용병단을 비롯한 기사와 병사들은 기꺼운 죽음을 안겨주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이 되었다. 이것 역시 과장이나 비유가 아니었다.

가장 치열한 곳은 목초지에서 충돌한 호른 경 일당과 고블린 100여 마리였다. 1대 10의 전력차지만, 기동력을 무기 삼아 끈질기게 버텼다. 고블린의 화살과 투창이 시원찮은 덕이 매우 컸다. 그러나 용감한 용병이 하나둘 쓰러질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가장 극적인 곳은 로벨과 버그베어의 싸움이었다. 규모도 작고, 치열하지도 않지만, 이곳에 승패가 걸려있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힘으로 모든 싸움을 보았다. 켈트 남작이 성탑 꼭대기에서 깃발을 흔드는 모습도, 호른 경이 플레일로 고블린의 머리를 부수는 모습도,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다가 낙마한 흉내쟁이의 모습도, 그런 흉내쟁이를 구하려고 달려가는 과묵한 몬트의 모습도, 로벨은 전부 보았다.

“널 용서할 수 없어.”

-용서는 자격이 있어야 하는 법... 네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시끄러. 개소리에 어울려줄 생각 없어.”

어린 집사가 보았으면 영주님이 품위를 잃었다고 좌절했을 것이다.

로벨은 흐룬팅을 정수(正手)로 고쳐 쥐고 중심을 낮췄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지고, 자잘한 타박상도 입었지만, 버그베어에 비하면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버그베어는 멀쩡한 부위가 거의 없었다. 얼굴은 절반이 사라지고, 손가락은 두 개가 모자라고, 옆구리에서는 핏물이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왼쪽 다리는 깨끗이 증발했다. 사람이었으면 쇼크로 죽거나 출혈과다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령 중의 악령, 죽은 자의 왕, 마도의 수호자 버그베어는 꿋꿋하게 멀쩡한 왼팔을 휘둘렀다. 바닥을 쓸어내는 공격이라 피하기 곤란했다.

‘에, 에잇!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진짜 개소리는 로벨이 했다.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된 탓일 것이다. 로벨은 미친 척 흐룬팅의 칼날을 세워 손바닥을 막았다. 거의 완벽한 방어자세지만 체급차이, 아니, 질량차이를 어쩌지 못했다. 말 뒷발에 차인 것처럼 1피트쯤 붕 떠서 날아갔다.

“컥-!”

최고의 갑옷 장인이 만든 최고급 필드 아머도 충격을 어쩌지 못하였다. 어깨뼈와 갈비뼈가 동시에 부러졌다.

-크르르르륵...!

흐룬팅의 칼날을 후려친 버그 베어도 무사하진 못했다. 손바닥이 세로로 찢어져 약지와 소지가 덜렁거렸다. 괴물도 고통은 느끼는지 주춤거렸다.

“남은 게... 쿨럭! 다리 하나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하얀 앞니를 억지로 보였다.

“난 아직 멀쩡한데.”

거짓말이다.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흐룬팅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파나케아 투구의 치유능력이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부러져도 영영 못 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버그베어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로벨이 가진 무기는 하나같이 전설급 무기라 회복이 되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한때 왕이었던 자의 자존심일 것이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내가 진 것인가...

“이번에도? 아, 샘 포클한테 패했지?”

로벨은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버그베어에게 다가갔다. 버그베어가 흘린 피가 흥건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차 굵어졌다.

-기뻐해라. 그러나 안심하지 마라. 죽음에서 돌아온 왕은 나 하나가 아니니, 그들은 나와 다를 것이다.

로벨은 흐룬팅을 곧게 세웠다. 왼쪽 다리를 미리 부순 덕에 높이가 딱 적당했다.

“걱정 마. 남은 왕도 금방 보내줄게.”

로벨은 태양을 찌르듯 흐룬팅을 치켜들었다. 칼끝이 버그베어의 심장에 닿았다. 저항은 없었다. 죽은 자의 왕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첫 포성이 울리고 정확히 열하루 째 되는 날, 거인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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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펜대를 빙글빙글 굴리다가 잉크통에 꽂았다. 고루한 수도사와 외로운 학생들이 부러워할 재주였다.

“깊은 골에서 시작됐으니 사실 반년이죠. 성이 몇 개나 함락되었는데요.”

로벨은 오른손으로 맥주잔을 잡으려다가 새된 비명을 지르고 왼손으로 바꿨다. 마녀 키르케가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잔소리했지만 로벨의 생각은 달랐다. 술은 상처를 소독하고 고통을 줄여주니 훌륭한 약이었다. 먼 동방에서는 곡물을 증류한 술을 ‘생명의 물’이라 부르니 확실했다.

“피해 집계는 끝났어?”

어린 집사는 거인 전쟁의 결과를 정리해서 보여주었다. 로벨이 고대숫자에 질겁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두로 설명했다.

“인명피해는 붉은 산 요새 때보다 적어요. 전사자가 100명밖에 안 되니까요.”

“...‘밖에’가 아니잖아.”

“싸움 규모에 비하면 적으니까요. 덩굴성을 생각해 보세요. 해자를 파고 대포를 모은 보람이 있었어요. 그래요. 인정해요. 영주님이 옳았어요.”

로벨은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좋은 결정이었어.” 어린 집사는 입술을 삐죽이고 말했다.

“하지만 재산피해가 심각해요. 성벽과 해자의 보수공사는 둘째 쳐도, 가을농사를 망치고, 목초지가 초토화되고, 강철성에 빚을 지고, 시장을 열지 못한 잠재적 손실까지 입었어요. 추정하길 약 27만 페닝이 증발했어요.”

“그, 그렇게 많이?”

“고블린 고기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나요?”

“...아니.”

“그럼 그렇게 많아요.”

전쟁은 끝났지만 일상은 계속되었다. 영주님의 일상에는 금화와 더 많은 금화가 필요했다.

“영주님?”

“으응? 왜?”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위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이제 돈 벌 궁리 좀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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