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길드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기승을 부리던 태양은 제풀에 지쳤는지 남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졌고, 게으름 피우던 달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초저녁에 기상했다. 로벨은 펜을 잉크병에 꽂고 창밖을 지그시 보았다.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어.”
“앞으로 더 그럴 테죠.”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성벽 공사가 끝나고 정식으로 로드릭 성(Castle)이 되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 변화는 길드의 등장이었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유대를 다지고, 편의를 봐주고, 가격을 담합하는 수준에서, 정식으로 조합장을 뽑고, 상납금을 내며,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늑대성 입장에서 길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상인과 기술자를 관리하는 조직이 생기니 세금을 걷거나 조언을 구하기 편하고, 장인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니 기술이 발전하고, 제자를 받아 노하우를 가르치니 대가 끊기지 않았다.
국왕의 특허장으로 자치권을 행사하는 자유도시에서는 조합장의 권리가 귀족 못지않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제후의 도시에서는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세금을 올릴 때나 징발을 할 때 구시렁거리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애초에 조합의 허락을 영주에게 받아야 했다.
“포목 길드, 직공 길드, 석공 길드... 응? 대장장이 길드도 있어? 우리 마을에 대장장이는 한 명뿐이잖아?”
“언제 적 우리 마을이에요? 정식으로 허가 내준 대장간만 셋에요. 그 아래에 도제들까지 합치면 12명이나 되요.”
“아, 그래?”
로벨은 머리를 긁적였다. 동서남북으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느라 미처 몰랐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는 요새 건설이었다.
로드릭 시티 동쪽 성탑을 기준으로 울타리와 돌담을 쌓아 울프 용병단 주둔지를 건설했다.
이름은 요새지만, 비용 문제로 성벽을 쌓지는 못했다. 도시 외성이 뚫리면 늑대성이 2차 방어진이 되고, 늑대성이 함락되면 아성에서 싸우면 되니, 굳이 용병단 주둔지에 예산을 쓸 필요는 없다는 주장 때문이다. 당연히 어린 집사의 주장이었다.
“그래도 가을 전에 ‘이쪽’ 일은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에요.”
어린 집사가 악센트를 강하게 주어 말했다. 몇 년째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재정 상황이니 해결책이 필요했다. 로벨은 한결 그윽한 눈으로 창밖에 집중했다.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어.”
“아까 했어요.”
“앞으로 더 그럴 테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면서요?”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콧김을 뿜자 로벨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강철성은 많이 불편해. 집사도 알잖아. 그리고 광산이 송아지나 돼지도 아닌데 달란다고 줄 리도 없고.”
“누가 뺏어오라고 했나요? 거래를 하자는 거죠.”
어린 집사의 제안은 그럴 듯했다. 전쟁이 끝난 볼탄 반도에서는 강철의 수요가 많지 않으니, 잉그비아 왕국으로 판로를 개척하자는 제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채굴권를 주면 수익을 올려 나눠주겠다는 뜻이었다. 로벨이 가진 잉그비아 왕국 면세권을 생각하면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그거잖아. 내가 걔네하고 얼마나 오래 싸웠는데...”
“본인 입으로 인간이라잖아요. 에잇! 안 되면 마는 거죠! 뭘 망설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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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생각해 볼게’란 말로 일관한 후 모닝스타를 핑계로 도망 나왔다. 어린 집사는 ‘도망갔다’고 생각했지만, 영내를 순시하며 영지민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영주의 주요 업무였으니 결코 도망은 아니었다.
로벨은 늑대성을 나와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지붕은 빨간 것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었다.
“역시 밖이 좋아.”
로드릭 시티는 하루가 다르게 ‘진짜’ 도시가 되어갔다. 전쟁으로 집과 땅을 잃은 자유민, 자유를 찾아 도망 온 이웃 영지의 농민, 노스폴드 시티에서 소개장을 받고 찾아온 장인, 그 장인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농가의 아이들, 한평생 모은 돈으로 작은 가게를 내고 정착한 상인과 상인의 가족 등등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옛날에는 이름을 몰라도-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다- 얼굴은 전부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 보는 얼굴이 더 많았다. 그게 당연했다. 로드릭 시티 상주인구가 3천 명을 넘어섰다.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도시 안팎에 5, 6천 명이 모여 있었다.
“저저! 시내에서 누가 말을 타고...!”
“쉿! 쉿! 영주님이야!”
“어이구,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저 사람이 공작님이오?”
로벨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허리에 찬 칼과 부티가 좔좔 흐르는 모닝스타 덕분에 ‘높으신 분인갑다’하고 자리를 피해주어 불편하진 않지만, 공작의 권위를 느끼기에는 다소 심심했다.
‘이래서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는구나?’
로벨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도 혼자라 좋은 점이 있었다. 영지민과 상인들이 거리낌 없이 찾아와 안부를 묻고 고충을 늘어놓았다. 계란값이 너무 올랐다거나, 외지인 놈들이 너무 무례하다거나-반대로 외지인은 텃새가 너무 심하다고 하소연했다-, 용병이 밀린 외상을 안 갚는다거나...
“내 용병이 말이야?”
“예, 예, 이런 귀하신 영주님께 이런 말씀드리기가 송구하오나, 자신이 울프 용병단이 거들먹거리면서...”
로벨은 눈썹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응. 알아보고 해결해줄게.”
로벨은 기꺼운 마음으로 고충을 받아주었는데, 그것이 지나치자 탈이 되었다. 높은 성에 거주하는 영주님에게 사정을 고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로벨이 자상하게 굴자 너도나도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추레한 아낙은 겁도 없이 로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로벨은 특히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이거 놔.”
로벨이 참다 참다 못해 화를 내기 직전, 구원자가 나타났다. 로벨의 구원자인지 시민의 구원자인지는 옛 신만이 알 것이다.
“이보세요! 비키세요! 영주님께 무슨 무례에요? 저리 비키라고요! 옛 신이시여, 이자들의 죄를 사하소서!”
“기사님! 기사님! 여기서 뵙네요? 아이참! 비켜 봐요! 이이익! 밀지 마요!”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와 아야와 이야카가 저쪽에서 다가왔다. 시민들은 두 사람을 보고, 정확히는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늑대 남매를 보고 얌전히 물러났다.
“크르르릉...”
“푸히힝-!”
이야카가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리자 모닝스타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자존심이 상한 아야가 콧등의 주름을 잡았다. 늑대성의 네 발 식구들은 식습관이 달라서인지 통 친해지지 않았다. 반면, 나이대가 비슷한 두 발 식구들은 시시덕거리며 친한 척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어린 집사가 쫓아냈어요?”
“누가 들으면 집사가 내 상전인 줄 알겠어.”
“사실상 그렇지 않습... 웁스,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리암 수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사가, 그것도 공작쯤 되는 기사가 도보로 걷는 것은 자존심을 넘어 명예 문제였다.
“시내에서 말을 타면 위험하니까.”
괜히 주목받아서 사람이 몰리는 것도 문제였다. 마녀 키르케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입을 가리고 고양이처럼 웃었다.
“에이, 안 그래도 되는데... 이히힛!”
그리고 두 팔을 살짝 벌렸다. 예전처럼 겨드랑이를 잡아서 올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로벨은 못 보고 그냥 지나쳤다. 얄밉게도 모닝스타마저 푸힝! 하고 비웃고 로벨을 따라갔다.
리암 수사가 주케토를 벗어 정수리의 땀을 닦고 고쳐 썼다. 아침저녁 기도도 마지못해 하는 주제에 신앙심은 깊었다.
“시찰 나오신 건가요? 어디로 가시나요?”
“기왕 나온 김에 대장간이나 가 보려고. 이 녀석 편자를 갈 때가 됐거든.”
말에서 내리니까 주목은 덜 받는데, 다른 이유로 눈길을 끌었다. 기사와 마녀와 사제가 함께 다니니 안 보려도 안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리암 수사는 인기인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몇 달씩 싸돌아다니는 로벨이나 성안에서 행정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어린 집사와 달리 로드릭 마을 시절부터 영지민의 대소사를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리암 수사가 주관한 결혼식과 장례식, 탄생을 축복한 갓난아이와 가축이 못해도 두 자릿수였다.
최근에 정착한 상인들은 로벨을 몰라보고 리암 수사와 반갑게 인사했다. 리암 수사는 그때마다 당혹해 하며 로벨을 소개했고, 마녀 키르케는 깔깔 웃으며 로벨을 위로했다.
그렇게 세 사람과 세 짐승은 시내를 지나 도시 외곽에 위치한 대장간을 찾아갔다. 흐룬팅의 칼집을 만들어준 로드릭 시티 ‘원조’ 대장간이었다.
로벨은 처마 끝에 걸린 망치와 모루의 간판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이 간판이 보일 만큼 가까이 오면 큼직한 화로와 풀무가 먼저 보일 것이다.
“안에 있어?”
로벨은 고삐를 처마 기둥에 묶고 사람을 불렀다. 숯 자루를 옮기던 꼬마가 깜짝 놀라 뛰어왔다.
“마스터를 찾아오셨어요?”
“마스터?”
로벨을 꼬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대장장이가 들인 도제임을 깨달았다.
“네 마스터는 어디 있어?”
“잠깐 쉬러 가셨어요. 금방 오실 거에요. 혹시 급한 일이면...”
“아니야. 기다리지 뭐.”
로벨은 오랜만에 온 대장간을 쭉 돌아보았다. 예전부터 쓰던 기구도 있지만, 새로 만든 기구도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이 밟아야 하는 대형 풀무가 그러했다. 로벨은 잔불이 남아 타닥타닥 소리 내는 화로를 구경하다가 구석에 쌓인 뾰족한 것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뭐야?”
“그거요? 에이, 보시면 알잖아요?”
리암 수사가 움찔했다. 로벨의 성품이 착한 것은 알지만, 대장장이 제자 따위가 저리 대꾸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칼날하고 창날 같은데...”
“그 아랫것은 화살촉이에요. 앗! 만지지 마세요!”
로벨은 족히 서른 자루는 되는 병장기를 보고 심각해졌다. 영지내에서 무기가 만들어지는데 영주가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왜 이런 걸 만든 거야?”
“그야 주문이 들어왔으니까요.”
“누가 이런 걸 주문... 아, 펄프 대장이야?”
“펄프 대장님을 아세요?”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가 웃음을 참느라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상하관계를 설명하는 대신 칼날을 살폈다. 숫돌로 갈고 자루를 씌워야 확실히 알겠지만, 무게와 균형이 적당한 것이 제법 좋은 칼이었다.
“거기 누군데 남의 상품을 주물딱... 헉! 영주님 아니십니까?”
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벨은 미완성 칼을 치우고 대장장이 마스터를 보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안부를 물어야 교양 있는 기사 소리를 듣겠지만, 그런 기사는 핑크빛 유니콘보다 희귀한 존재기에 그냥 넘어갔다. 덤으로 영주님 소리에 깜짝 놀라 무릎 꿇는 도제와 기어코 깔깔 웃는 마녀도 무시했다.
“이 철을 어디서 가져왔어?”
대장장이는 뜬금없는 질문에 뜬금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시장인뎁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