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눈치
초심자의 행운일까, 아니면 옛 신의 안배일까, 마녀 키르케가 쏜 총알은 흉내쟁이의 정수리를 스치고 로벨의 등을 지나쳐 와이트의 머리를 정확히 맞혔다.
새끼손톱만한 쇠구슬이 300년 묵은 살가죽을 갈기갈기 찢고 텅 빈 두개골을 으스러트렸다. 총성에 놀라 납작 엎드린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더듬더듬 물었다.
“언제 그런걸...?”
보통은 화약접시의 화약을 관리하기 힘들어 미리 장전하지 않는데, ‘마법사’ 키르케는 총강 안쪽에 바로 불을 붙일 수 있기에 상관없었다. 마녀는 아쿼버스 손잡이를 꼭 쥐고 소리쳤다.
“그게 중요해요?”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로벨은 오른발을 왼쪽으로 옮기고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았다. 검술교본에는 없는 동작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공격이었다. 온몸을 회전하며 칼날을 휘둘렀다. 훨윈드의 외날 버전이었다. 크고 무거운 롱소드에 원심력이 담겨 와이트의 허리를 두 동강냈다.
“와우...”
생긴 게 좀 부실하지만, 그래도 사람 체구였다. 칼질 한 번에 허리가 가로로 두 동강나는 광경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지 않...
괴물은 괴물이라 머리가 터지고 허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다. 로벨은 회전하는 몸을 비스듬히 눕혀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이번에는 세로로 두 동각이 났다. 이 정도면 신위(神威)라 할 만했다. 한평생 칼질한 용병들도 입을 딱 벌렸다.
-이대로... 이대로...
“그대로 있어!”
로벨은 허물어진 와이트를 발로 밟고 땅바닥에 꽂힌 흐룬팅을 뽑았다. 머리도, 허리도 없어서 어디를 더 공격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 하나 있지.’
뱀파이어 군주가 인정한 약점이 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역수로 쥐고, 와이트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죽은 자’의 왕답게 피는 튀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비명만 있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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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폐에 가득 찬 공기를 가늘고 길게 토했다. 왜냐하면 300년 묵은 미라의 잿가루를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왕은 마법이 깨져 사라졌다. 마도의 수호자라 해도 존재감이 천지차이라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
“이제, 이제 괴물 소동은 해결된 겁니까요?”
“응. 최악의 경우에도 펄프 대장을 보냈으니까 괜찮을 거야.”
로벨은 영차! 소리를 내며 바닥에 꽂힌 두 자루 칼을 회수했다. 그 사이 애꾸눈은 흉내쟁이를 살피고 과묵한 몬트와 발가락은 와이트가 흩뿌린 귀금속을 챙겼다.
“와아, 저주받은 물건일지도 모르는데 막 만지네요?”
마녀가 중얼거리자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불꽃을 만드는 마법보다 더 마법 같았다. 마녀는 아쿼버스와 손가락으로 장난이란 제스처를 취했다.
“헷! 농담이에요.”
“...재미없으니 그런 농담 하지마소!”
2층 침실을 꼼꼼히 뒤졌지만 나온 것은 와이트가 사라지면서 흘리고 간 보석 몇 개와 녹이 뚝뚝 떨어지는 대거 몇 자루와 누렇게 삭은 양피지 몇 장이 전부였다.
과묵한 몬트는 관례대로 전리품을 로벨에게 바쳤고, 로벨도 관례대로 가장 비싼 거 하나만 가지고 나눠주었다.
“진짜 왕관이네요?”
금으로 된 왕관이었다. 순금이란 것을 제외하면 수수한 디자인이었다. 금화로 만들면 100개 닢은 족히 나올 것 같았다. 금화의 가치가 금의 가치는 아니지만...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지?”
로벨은 빙그레 웃고 벨트 주머니에 걸었다.
죽다 살아났음에도 물욕이 가시지 않은 흉내쟁이는 2층으로 만족하지 못해 지하실을 뒤져보자고 주장했다. 로벨은 위험하다고 기각했다. 조사를 하려면 인부를 불러와 바닥과 계단을 쥐어뜯으며 안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덩굴성이 걱정되었다.
“영주님, 이것 좀 보십시오.”
성을 나서기 전, 애꾸눈이 미처 못보고 지나친 벽걸이 그림을 발견했다. 제대로 관리를 못해 물감이 녹고 곰팡이가 번졌지만 그럭저럭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왕의 초상화인가?”
“옆에 사람들은 가족일까요?”
숫자는 세어보니 다섯 명이었다. 책상을 등지고 모여 앉았는데,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닌 듯 비율이나 원근감이 엉망이었다. 사람은 강조되고 사물은 축소되었다.
마녀가 까치발을 듣고 그림을 올려보았다.
“가족 같지 않은데요? 죄다 수염 난 아저씨잖아요.”
“형제와 아들일 수 있지.”
“그건 아닌 것 같아.”
로벨이 허리에 찬 왕관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 모두 왕관을 쓰고 있어.”
로벨의 말에 모두 머리에 집중했다. 샘 포클 시대 이전에는, 비속어 좀 써서 개나 소나 왕을 자칭했다. 이 성의 주인 또한 그런 왕 중 하나였다.
“설마?”
“에이, 설마.”
쇳가루와 말똥가루로 딱딱해진 추리력이 모처럼 가동되었다. 왕이 다섯이면, 와이트도 다섯 마리일지 모른다.
“덩굴성으로 가자. 전황을 확인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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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왕은 다섯이지만, 다섯이 모두 와이트가 된 것은 아니었다. 샘 포클과 12기사에게 패하여 왕위를 내려놓고 지방사령관(=백작)을 자처한 왕이 두 명 있었다. 파도 해안의 페르젠과 버팅거 호수의 헤르만이었다.
“아, 그 집안이 원래 왕이었군요?”
“그 시절의 왕은 부족장 비슷한 거라, 지금의 백작보다 못하지만...”
“두 가문이 틈만 생기면 반기를 드는 이유가 있네요.”
그리고 남은 왕은 셋인데, 그중 하나를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퇴치했다.
“아직 2명이 남은 건데...”
“꼭 와이트가 되었다는 근거는 없잖아요? 세상사에 초탈해서 욕심을 버리고 편안하게 가셨을지도 몰라요.”
로벨은 한숨을 쉬고 덩굴성 안뜰을 지났다.
성문은 세 쪽으로 쪼개져서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그 옆에는 버려진 충차가 여러 대 쌓여 있으며, 피에 젖고 불에 탄 바리게이트가 망가져서 굴러다녔다. 펄프 대장이 지휘하는 울프 용병단 본대가 정리 중이지만, 시체부터 치우느라 시설까지 손대지는 못하고 있었다. 로벨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괴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 그럴지도.”
로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피해보고를 받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상자가 102명이라고?”
전사자만 50명이 넘었다. 용병일이 불가능한 중상자를 포함하면 덩굴성 파병 중대의 절반이 손실되었다.
호른 경은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로벨은 착잡한 얼굴로 다른 이를 보았다. 외팔이 더치와 싸움개 닥스가 호른 경을 비호하기 위해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로벨이 불같이 화를 내고, 호른 경이 모욕을 못 참아 결투를 신청하면, 둘 중 하나가-대단히 높은 확률로 호른 경이- 죽기 전에 말리기로 결심한 듯했다. 두 기사의 성품을 오해한 결심이었다.
“덩굴성의 피해는 어떻소?”
“여자와 아이들은 지켰으나, 장정은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앞으로 힘든 나날이 이어지겠군.”
어린아이가 커서 한 사람 몫을 하기까지는 못해도 10년이 걸렸다. 그동안은 살아남은 사람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릴 것이다. 로벨은 호른 경의 어깨를 두드리고 속삭였다.
“고생이 많았소. 그나마 절반이라도 무사한 것이 경 덕분이오.”
로벨은 마녀가 이야기한 와이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해결해야 했다. 와이트뿐만이 아니다. 악마추종자와 마도의 수호자 모두 이 세상에서 몰아내야 한다. 작디작은 로드릭 마을의 영주 시절에는 불가능했지만, 볼탄 반도의 군주가 된 지금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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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펄프 대장의 울프 용병단과 호른 경의 울프 용병단을 통합해서 늑대성으로 귀환했다.
승리한 전쟁이지만, 패배한 것마냥 어두웠다. 사상자가 많은 탓도 있지만, 소득이 없는 탓도 있었다.
몬스터와의 싸움은 이겨도 남는 것이 없었다. 농사를 안 지으니 땅이 늘지도 않고, 몸값을 안 내니 재물이 불지도 않았다. 전리품도 돈이 안 되는 원시적인 무기가 대부분이었다. 로벨이 전쟁수당을 챙겨주니까 그나마 탈영하지 않을 뿐이었다.
“늑대성에 도착하면...”
로벨은 패잔병처럼 털레털레 따라오는 울프 용병단을 보고 중얼거렸다.
“크게 파티를 하자.”
“파티요?”
“아무튼 바위성과 덩굴성을 구했잖아. 기뻐해야지.”
펄프 대장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린 집사가 허락하겠습니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로벨은 백 마리의 고블린에게 돌격할 때보다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볼게.”
늑대성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온 상인도, 가까운 곳에서 온 영지민도 있었다. 늑대성은 집과 논밭만 오가는 시골이 아니라 어엿한 도시였다.
“울프 용병단 아니오?”
“꼬라지 보니까 어디서 싸우고 온 거 같은데...”
“기사와 용병이 하는 일이 싸움 아니오.”
“근데 이기고 온 거야, 지고 온 거야?”
속닥속닥... 숙덕숙덕...
영지민과 상인도 승패에 민감했다. 영주가 전쟁에서 지면 배상금과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기 때문이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우리가 승리했어요! 우리 기사님이랑 용병 아저씨들은 무적이에요! 절대 지지 않아요!”
마녀 키르케의 외침에 감동한 것은 의외로 의기소침한 용병들이었다.
“승리...? 무적...!”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였다. 허리가 조금씩 펴지고 보폭이 큼직해졌다. 로벨은 마녀와 용병을 번갈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역시 울프 용병단의 마스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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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순순히 연회를 허락했다. 로벨이 열정적으로 사기증진을 호소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 전쟁소식에 도시를 떠나는 상인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빚이에요.”
늑대성의 자금은 바닥이었다. 소금광산, 식품공장, 남해교역, 깃발 보험, 각지의 세금과 통행세까지 계절마다 수만 페닝이 모이지만, 성벽공사하고 울프 용병단 모집 및 유지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빚은 안 좋은데...”
로벨은 탐탁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가난한 것은 개의치 않지만, 빚을 지는 것은 부담이었다. 어린 집사가 가자미눈으로 노려보았다.
“전부 영주님 때문이잖아요.”
잉그비아 왕국에서 금화를 펑펑 쓰고, 이번에 또 전쟁수당과 위로금을 왕창 뿌렸으니 당연했다. 로벨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집사는 화내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올가을부터 잉그비아 왕국과 교역할 거예요.”
“교역? 그건 지금도 하잖아?”
“이런, 말을 잘못했네요. 우리가 ‘직접’ 거래할 거란 뜻이에요.”
흑태자에게 받은 증서를 써먹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로벨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쪽에서도 제안이 왔어요. 내전이 길어져서 물자가 간당간당 한가 봐요.”
전쟁 중에는 금덩이보다 보리빵 한 덩이가 귀한 법이다. 에드워드 가문과 의리를 생각해서 상도덕은 지키겠지만, 시세 이하로 팔 생각은 없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과소비에 관대한 이유였다.
“먹을 것, 입을 것, 싸울 것이 모두 필요한가 봐요. 앞에 두 개는 봄 작물과 양모를 정리하면 되는데, 뒤에 싸울 것이 문제네요.”
싸움에 필요한 것. 창과 화살. 다시 말해 쇠와 나무였다.
“우리 영지에서 안 나오잖아?”
소금광산은 있지만, 철광산은 없었다. 영지에서 쓰이는 철이야 보리를 주고 사 오면 그만이지만, 수출하기는 곤란했다. 북해를 건너는 위험을 생각하면 중개무역으로 이문이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린 집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성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어린 집사가 눈치를 보니 퍽 어색했다. 그런데 그럴 만했다.
“영주님이 강철성하고 이야기해 보세요. 광산을 하나 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