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6화 (316/605)

316화. 교차

하롤드 에디즈 자작은 ‘덩굴성’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밋밋한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에디즈 가문의 처지와 비슷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는 버팅거 호수와 물푸레나무 숲이 만나는 곳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지역 특산 담쟁이덩굴이 성벽에 달라붙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전시가 되면 시계확보와 화재예방을 위해 덩굴을 포함한 잡목을 싹 베고 불태워버렸다. 그 때문에 덩굴성 영지민은 덩굴의 길이가 평화의 길이라고 말하였다.

‘요즘은 2피트 이상 자라는 꼴을 못 봤지.’

미망인 전쟁부터 왕위계승전쟁까지, 무려 15년 동안 이어진 전란의 시기였다. 왕좌의 주인이 한 번 바뀌고, 볼탄 반도의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 그때마다 덩굴성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제 좀 옛 모습을 갖추나 했더니...’

철권을 휘두르는 로벨 로드릭 공작이 등장한 후 볼탄 반도의 내정은 안정되었다. 북부의 사트로 가문도, 붉은 산의 하인즈 가문도 늑대의 눈치를 보기 바쁘고, 시절에 순응하지 못한 동부평야 영주들은 응징을 당했다. 그때마다 에디즈 자작은 진작 로벨 로드릭 호로 갈아탄 자신의 판단을 칭찬했다.

물푸레나무 숲에 몬스터가 출몰하여 구조요청을 보낼 때도, 로벨의 최측근 호른 경이 160명의 정예 용병을 이끌고 달려왔을 때도 의심하지 않았다. 로드릭 깃발의 비호 아래 ‘덩굴성’이란 이름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이다.

쿠오오오오오-

으아아아아-

사람이든 짐승이든 네 자릿수에 근접하면 자연현상에 가까워졌다. 성 밖에 모인 몬스터 무리 또한 그러했다. 파도처럼 들썩이고 바람처럼 울부짖었다. 여기저기 피워놓은 모닥불과 새까만 기름 연기가 지옥도의 한 장면처럼 불길했다.

“저거 충차 아니야?”

붉은 산 전쟁 때 참전한 노련한 중년 병사가 중얼거렸다. 안목이 훌륭하지만 칭찬할 수 없었다. 오크 장인들이 사람이 버린 수레를 개조하여 공성병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크 수준에서 저 정도면 장인이지...’

에디즈 자작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고 웃는 오크를 경멸스럽게 쳐다본 후 몸을 돌렸다.

“호른 경은 어디 있나?”

“성문을 보강 중입니다.”

에디즈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한숨 쉬었다. 주인 허락 없이 자재에 손대는 것이 무례하긴 하나 상황이 상황이라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에디즈 자작은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지시하고 성문이 보이는 안뜰로 내려갔다.

호른 경은 울프 용병단과 함께 자재를 닥치는 대로 쌓고 있었다. 창고에서 떼어온 기둥으로 버팀목을 세우고, 모래와 흙을 채운 나무통으로 방벽을 쌓고, 전사자의 창과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로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

용병도, 영지민도 절박했다. 적은 인간이 아니니 협상이나 항복이 통하지 않았다. 죽거나 죽여야 끝이 났다.

“호른 경! 이보시오, 호른 경!”

웃통을 벗고 흙투성이가 되어 바리게이트의 노끈을 쪼이던 호른 경이 뒤늦게 돌아보았다. 사지에 파병되어 초조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평온했다.

“에디즈 자작? 무슨 일이오? 저놈들이 공격을 시작했소?”

“해가 지면 시작될 것이오. 그것보다 로드릭 공작, 아니, 주군께서는 언제쯤 오실 것 같소?”

호른 경은 외팔이와 싸움개를 불러 마무리된 바리게이트를 가져가게 하고 헝겊으로 목과 가슴을 닦았다. 새하얀 피부에 굵직한 흉터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가문의 기사 밑에서 종자 생활을 했는지 몰라도 고생깨나 한 듯했다.

“전령이 무사히 빠져나갔으니, 지금쯤이면 바위성에 도착했을 것이오.”

“주군께서 정말 바위성에 계시오?”

“그렇소.”

“그럼 큰일이 아니오? 그곳도 이곳과 비슷할 텐데...”

호른 경은 수건을 목에 걸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주군의 별명이 ‘무적무패’ 아니오. 그리고 켈트 남작과 펄프 용병대장은 백전노장이오. 시간이 조금 걸릴지 모르나 패전할 일은 없소.”

“시간! 그 시간이 문제잖소!”

호른 경은 인상을 쓰고 눈짓했다. 두 기사의 대화를 엿듣는 병사가 수십 명이었다. 에디즈 자작은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반성했다.

‘주군이라면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말했을 테지.’

그렇기에 로벨의 명령에는 의심도, 불안도 없었다. 지시에 따르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뿐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주군의 의연함이다.’

현 상황이 걱정되는 것은 호른 경도 마찬가지였다. 덩굴성의 안전뿐만 아니라 로벨의 안위까지 염려하니 이중의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지원군은 반드시 올 거요. 우리는 버티기만 하면 되오. 아시겠소? 그저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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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치사하지만, 버티는 것이 쉽다고 하지는 않았다.

“기름! 기름 가져와!”

“어, 없습니다! 다 떨어졌어요!”

해가 지자 오크가 주축이 된 몬스터 군단이 공격해왔다. 생긴 것은 조잡하지만, 기능면에서 큰 하자가 없는 수십 개 사다리가 접근했다. 울프 용병단의 사수들이 필사적으로 저지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급조된 충차까지 등장했다.

수레 위에 통나무를 묶고, 수레 좌우에 손잡이와 밧줄을 달아 인력으로 굴리는데, 오크의 힘이 대단해서 예상보다 위력적이었다. 성문을 두드릴 때마다 빗장이 휘어지고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버팀목을 더 가져와! 망치와 대못도 가져오고! 옛 신이시여! 성문이 뚫리면 너희와 너희 가족이 모두 죽는다! 정신 차려!”

힘 좀 쓰는 사내들이 성문에 달라붙어 어깨로, 등으로 저항했다. 충각이 두드릴 때마다 소뿔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지만, 악을 쓰며 다시 달라붙었다.

“위에서는 뭐하는 거야? 저 씹어먹을 것을 부수라고!”

성벽 위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성가퀴에 걸쳐지는 사다리가 점점 늘어났다.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보다 칼에 찔려 죽는 병사가 많아지고 있었다.

“동쪽! 동쪽부터 막아! 활잡이를 보호해!”

“역겨운 괴물 새끼들아! 죽어라!”

호른 경은 정신이 없이 뛰어다녔다. 성벽 위로 올라온 오크 전사의 머리를 부수고, 시체를 끌어올려 성 밖으로 집어던지고, 괴성에 등을 돌린 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장대를 가져와라! 사다리를 밀어내!”

덩굴성의 수성준비도 가볍지는 않았다. 용병들은 머리가 U자로 갈라진 장대로 사다리를 밀어냈다. 억센 손이 더해지자 사다리가 점점 수직으로 올라가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오크 멱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잠시 잠깐이지만 미소가 감돌았다.

“서쪽이 위험하오! 서쪽이... 으아악-!”

덩굴성을 위협하는 사다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호른 경은 계속해서 사다리를 밀어내라고 지시하고 서쪽으로 뛰어갔다.

“조준! 조준!”

호른 경이 스쳐 간 빈자리에서 겁쟁이 데비가 핸드 캐논의 거치대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상식이 있는 포수라면 할 짓이 아니지만, 표적이 발바닥보다 13피트 아래 있으니 상관없었다.

핸드 캐논의 포구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포수 머리 위로 오크의 조잡한 화살이 지나갔다. 본능을 어쩌지 못해 움찔했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 했다.

겁쟁이 데비는 포신 안의 포탄을 걱정했다. 급하게 재장전하느라 패칭(Patching:탄환이 빠지지 않게 헝겊 등으로 감싸 꽉 끼워 넣는 일)을 제대로 못 했다. 헝겊을 뭉쳐서 대충 입구만 막았는데, 자칫하면 포신이 깨질 수 있었다.

‘저놈을 못 깨면 우리 대가리가 먼저 깨진다!’

겁쟁이 데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점화!”

콰과과광-!

옛 신이 보우하사 무사히 발사되었다. 오크들은 민가에서 약탈한 솥뚜껑과 마루판자를 방패처럼 올렸다. 화살이나 투석 정도는 막을 수 있으나 3000J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담은 포탄을 막기에는 몸뚱이도 장비도 부실했다. 방패가 산산이 조각나고, 머리가 무참히 박살났다. 포격에 놀란 오크들은 충차를 버리고 멀찍이 물러났다.

“카아아아악-!”

오크 대장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도망온 오크 얼굴을 잡아 패대기쳤다. 그걸로 성이 안 풀리는지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가엾은 오크는 비명을 지르다가 이윽고 침묵했다.

“가라! 인간을 죽여라! 왕께서 지켜보신다!”

오크 대장은 놀랍게도 유라피아 대륙 공용어로 소리쳤다. 겁쟁이 데비는 순간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오크도 왕이 있나?’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지켜야 할 곳은 많은데, 지킬 사람이 부족했다. 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투구 아래로 떨어졌다.

“또 온다! 장전해! 서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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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하루를 버티었다. 하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기름에 이어서 화약과 화살이 바닥을 보였다.

크로스보우 3개 소대 중 2개 소대는 단병기를 들고 풋맨처럼 싸워야 했다. 스피어맨 소대는 부러진 창을 묶어서 재활용했고, 맨앳암즈들은 전우의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 영지민에게 양보했다. 적이 몬스터라 다행이었다. 만약 인간이었으면 용병이든 영지민이든 진작 성문을 열고 항복했을 것이다.

“피해는?”

“스무 명이 죽고, 열여섯 명이 부상입니다.”

울프 용병단의 사상자만 서른여섯 명이었다. 덩굴성의 사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외팔이 더치가 이빨 빠진 손도끼를 닦으며 말했다.

“저 괴물새끼들도 많이 줄었잖습니까요?”

교환비로 따지면 1대 7, 8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승리했다고 봐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더 모아야 합니다.”

정확히는 싸울 수 있는 여자와 아이를 가리켰다. 남자들은 갓 성인이 된 15살부터 지팡이가 필요한 60살까지 진작에 동원되었다.

“에디즈 자작에게 말해 보겠다.”

해가 중천에 뜨자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공격도 사라졌다. 그러나 안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긴장감이 풀리자 찢어지고 부러지고 쥐어터진 병사들의 신음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인간의 몸은 신기해서 긴장이 풀리면 출혈이 늘어나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호른 경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모두 불러 모았다.

“쉴 틈이 없다. 해가 지면 다시 공격이 시작된다. 무기를 준비해라.”

“저기, 나으리, 화살이 떨어졌는뎁쇼...”

“바위를 가져와. 자갈도 좋다. 옷가지에 싸서 휘두르면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다.”

성 밖으로 병사를 보내 화살을 수거할까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어젯밤에도 보았지만, 저들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무기가 떨어진 것을 알면 지금 당장이라도 공격해올 것이다.

“화톳불이 꺼졌습니다. 장작이 부족해요.”

“뒷뜰의 창고를 부숴라. 성 안의 집기도 사용해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처절하고 처량한 싸움이었다. 호른 경은 지친 병사들을 일으켜서 일을 시켰다. 그리고 불타는 성벽 넘어 서쪽 하늘을 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에 있을 사람을 생각했다.

‘그곳은 무사하십니까?’

지원군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이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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