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청소
울프 용병단은 전문 군인만이 할 수 있는 신속, 정확, 정숙한 기동으로 바위성 남쪽 계곡을 틀어막았다.
우거진 참나무 숲 위로 검은 연기가 여럿 피어올랐다. 얼핏 평화로운 계곡 풍경인데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현실의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식사 중인 모양이군.”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몬스터는 대체로 생식을 하지만, 오크를 비롯한 일부 지능이 높은 종은 불을 다룰 줄 알아 직화요리도 즐겨했다. 요리 대상이 네 발로 달리거나 날갯짓을 하는 생물이면 우수성을 칭찬하겠지만, 두 발로 걸으며 넓적한 손톱이 있는 생물이면 참을 수 없었다.
“주군, 우리가 온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치시지요.”
켈트 남작과 펄프 대장이 차례로 진언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힘으로 주변 지형을 관찰하다가 바짝 긴장한 어린 켈트를 보았다.
조나 켈트는 이제 2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말을 타고 과묵한 몬트 소대 뒤에 붙어 있었다. 기름때가 벗겨지지 않은 오래된 바이킹 헬멧과 급조한 티가 나는 체인 메일이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게 했다.
‘체인 메일이라. 좋은 선택이야.’
기사가 입는 판금갑옷에 비하면 무겁고 거추장스럽지만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판금갑옷의 파츠는 가슴둘레, 팔길이, 다리길이 등을 맞춰서 제작해야 하지만, 사슬갑옷은 셔츠처럼 그냥 입으면 끝이었다. 게다가 사슬 특성상 잘라내고 붙이기가 용이했다. 성장기의 어린 종자와 가난한 맨앳암즈가 괜히 사슬갑옷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로벨은 충분히 신중해 보일 만큼 잡생각 한 후 기사와 용병대장에게 명령했다.
“포위 섬멸하자. 바위성의 사냥꾼은 계곡 좌측, 울프 용병단의 크로스보우 중대는 계곡 우측으로 이동하시오. 1시간 주겠소.”
울프 용병단은 입술이 3인치쯤 나와서 우리가 산양인 줄 아냐고 투덜거렸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바위성 사냥꾼이 활과 화살뭉치를 싸들고 날듯이 왼쪽 길로 사라지자 군말 없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경쟁이 붙었으니 1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로벨은 해와 그림자를 번갈아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제9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조급할 필요 없었다. 몬스터에게 지금 시각은 한밤중이나 마찬가지였다.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로벨이 말하지 않아도 백병전 전문가들은 창과 칼을 손질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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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 제이콥이 앞장서서 82명의 중앙군을 인솔했다. 로벨은 길이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바바 야가의 창을 아래로 기울이고 아론다이트 폼멜을 만졌다. 건틀렛의 가죽 너머로 전해지는 울퉁불퉁한 촉감이 좋았다.
자타가 공인한 전쟁 전문가 울프 용병단은 수풀을 헤집고 가면서도 소음을 거의 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철컹거리는 쇳소리와 드물게 잔가지를 부러트리는 소리뿐, 쓸데없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더 요란했다.
“이 앞으로 200야드쯤 됩니다.”
허풍쟁이의 속삭임이 침묵을 깨트렸다. 2명의 기사와 2명의 기사 종자와 78명의 용병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로벨은 재갈을 씌워서 삐진 모닝스타를 다독이고 농장 주변을 살폈다.
자갈이 많아 비옥하진 않지만, 산에서 흘러온 계곡물로 수량이 풍부하고 남쪽으로 하늘이 열려있어 가축을 키우기 좋았다. 강둑 옆 텃밭에는 양배추와 순무가 심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물레방아가 있었다. 평화로운 농장이었다.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며 인육을 뜯어먹는 괴물무리만 없으면 말이다.
“시간이 됐습니다.”
“...시작해.”
과묵한 몬트가 안장에서 뿔나팔을 꺼냈다. 심호흡을 하고, 주둥이를 물었다.
뿌우우우웅-!
우우-웅-
우웅-
계곡이라 메아리가 요란했다. 마치 산이 울부짖는 듯했다. “꾸잇! 꾸잇!” 거리며 떠들던 고블린 무리가 동작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산의 분노가 맞았다. 바위산의 주인과 백성이 분노했으니 바위산의 분노라 할 수 있었다. 계곡 좌우로 검은 실타래가 그물처럼 펼쳐졌다. 사냥꾼이 놓은 그물은 해와 구름을 꼬집은 후 대지의 품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강철의 소나기였다.
“꿰에엑!”
어린아이의 다리뼈를 발라내던 고블린이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 가슴에 한 발, 오른팔과 왼쪽다리에 한 발,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목구멍에 한 발. 금방 겸손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로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양동공격을 넘어 삼면 포위공격이었다. 연락수단이 없는 만큼 쉽게 성공하기 힘든 작전이었다. 지리에 밝은 사냥꾼과 일당백 울프 용병단을 믿기에 밀어붙였는데, 솔직히 둘 중 하나만 자리 잡아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모닝스타를 몰아 농장 입구로 나갔다. 화살비에 패닉을 일으킨 몬스터 무리는 뒤늦게 로벨을 발견했다.
“뀌이이이잇-!”
로벨의 정체를 몰라도, 로벨이 원흉이란 것은 짐작했다. 고블린 대장이 부러진 벌목도끼로 로벨을 가리키자 성난 고블린 무리가 길길이 날뛰었다. 성질 급한 놈들은 벌써 달려왔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한 바퀴 돌려 멋지게 자세 잡았다. 그 뒤로 켈트 남작, 과묵한 몬트, 발가락 슈미츠, 흉내쟁이 퍼시발 등이 모였다.
“대열을 흐트러트리면 풋맨과 맨앳암즈가 마무리할 것이오.”
기병의 역할이 본래 그러했다. 로벨은 전술의 기본을 착실히 따랐다. 하지만 약간의 장난도 부렸다.
“켈트 남작, 부디 놀라지 마시오.”
과묵한 몬트 외 기마용병이 낄낄 웃었다. 대마녀의 선물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물론, 오크와 고블린도 말이다.
로벨은 제일 용감한 고블린이 20야드 앞까지 오자 창대로 모닝스타 엉덩이를 두드렸다. 모닝스타는 포효하려다가 재갈 때문에 실패하고 짜증스럽게 달렸다. 그 뒤로 켈트 남작과 기마 용병이 쇄기꼴을 형성했다.
겁이 없는 만큼 생각도 없는 첫 번째 고블린에게 창을 낭비하지 않았다. 모닝스타의 무게로 깔아뭉갰다. 무자비한 말발굽에 연거푸 밟힌 고블린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망가졌다. 그럼에도 딱히 관심 받지 못했다.
로벨은 기마돌격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일점돌파를 시도했다. 화살비로 패닉에 빠진데다 장병기가 거의 없는 고블린 무리라 가능했다. 십여 마리를 제치고 바바 야가의 창을 아래로 내렸다. 세 갈래 가지가 뭉친 창끝이 도낏자루를 휘두르는 고블린 대장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고블린의 몸이 2피트가량 붕 떠오르더니 예상한 대로 폭사(爆死)했다. 퍼엉-!
피와 살점이 농장 곳곳에 뿌려졌다. 거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여러 생물이 한곳에 모였으나, 이런 광경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켈트 남작은 놀라서 대열을 이탈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지만, 다행히 버림받지 않았다.
“여기까지! 돌아가자!”
로벨은 자루만 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안장주머니에 욱여넣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때맞춰 2차 사격이 시작되었다. 흉내쟁이가 이를 갈았다.
“저 자식들이! 안 보고 막 쏘잖아!”
로벨 일행은 말머리를 돌려서 왔던 길을 다시 달렸다. 상황 수습이 빠른 고블린과 정신머리가 아예 없는 고블린이 앞을 막았지만 켈트 남작과 과묵한 몬트가 머리통을 부수며 길을 열었다.
기사와 기마용병은 공격할 때보다 빠르게 물러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길고 짧은 화살이 촘촘히 떨어졌다. 고블린 상당수가 칼질 한번 못하고 죽어 나갔다.
“전원 돌격! 남김없이 죽여라!”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제 보병의 시간이었다.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진 고블린을 발 빠른 풋맨이 덮쳤다. 쇠가 달아오르는 만큼 피가 땅을 적셨다. 더 이상 전투라 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무자비한 도살이었다. 피로 피를 씻어내는 청소였다.
로벨의 무용과 전술에 익숙한 울프 용병단은 가을맞이한 농부마냥 수급을 수확했지만, 전쟁이 낯설고 로벨은 더 낯선 한 사람, 조나 켈트는 꼼짝하지 못했다. 살인과 폭력에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끄, 끝내준다... 정말 멋있잖아...”
조나 켈트의 두 눈은 오직 한 사람을 쫓았다. 새하얀 투구를 벗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좌우로 털며 완벽한 승리를 미소로 마무리하는 위대한 기사였다. 풍운을 꿈꾸는 소년의 눈에는 영웅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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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계곡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블린 무리를 거의 소탕했을 때, 계곡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오크 무리가 나타나 2회전으로 번졌다.
머리 회전이 빠른 오크들은 숫자와 지형에 열세란 것을 깨닫고 도주했다. 도망치는 짐승을 보면 일단 쫓는 것이 맹수의 본능이라 다수의 용병이 오크 무리를 뒤쫓았다. 그 결과 피해가 나왔다.
오크는 타고난 전사였다. 키는 작지만 근육이 두껍고 뼈마디가 단단해서 평생 쟁기질한 성인 남자도 가볍게 때려눕혔다. 게다가 영리했다. 기습도 할 줄 알고, 함정도 팔 줄 알았다. 무턱대고 쫓아간 풋맨 소대가 앞뒤로 포위당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맨앳암즈 소대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20명이 모두 전사했을 것이다.
오크 무리는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다시 계곡 상류로 도주했다. 전투 마지막에 피를 흘린 울프 용병단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켈트 남작은 화를 냈지만, 로벨은 부상자를 치료하라 명령하고 질책하지 않았다. 이제 곧 밤이 시작되니 추격해봐야 피해만 커졌다. 그리고 지루한 수색전이 시작되었다.
고블린 잔당과 오크 생존자 2, 30마리가 바위산 기슭에 숨어들었다. 애매하고 불편한 숫자였다. 30마리의 몬스터를 토벌하려면 최소한 40명이 함께 다녀야 했다. 울프 용병단과 바위성 사냥꾼을 모두 합쳐도 200명인데, 성과 마을을 지킬 병사를 제외하면 3~4개 부대가 한계였다.
“저도 수색대에 들어가겠습니다.”
“조나!”
“아버님,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인입니다. 공작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부지 자식을 둔 부모의 고통은 비슷했다. 켈트 남작은 혼내고 화내고 타이르다가 무시했다. 두 부자(父子) 모두 로벨에게 도와달라는 눈길을 보냈는데, 로벨은 외면했다. 남의 집안일에 끼어서 좋을 것 없었다.
성 안팎으로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고, 호른 경의 전령이 도착했다. 로벨은 기쁜 마음에 수색을 떠넘기고 바위성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령을 보는 순간 머리와 가슴이 차게 식었다.
“기사 나으리... 기사 나으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싸움개 닥스와 자주 어울리던 맨앳암즈였다. 몰골이 처참했다. 기름진 머리와 먼지투성이 갑옷은 장거리 여행의 흔적이라 쳐도, 얼굴의 반을 감싼 붕대와 너덜너덜한 손가락은 패전의 흔적이었다. 승리한 부대가 부상자를 전령으로 보낼 리 없었다.
“호른 경은? 덩굴성은 어찌 되었어?”
“기, 기사 나으리...”
“기사 나리고 나발이고 똑바로 말해!”
로벨이 버럭! 화를 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 등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고함지르는 로벨을 봤으면 기겁했을 것이다.
“전투에서 패배, 패배했습니다. 호른 나으리와 애꾸눈 녀석들은, 덩굴성에 고립되어서, 위태롭게 버티고...”
로벨은 덩굴성이 아직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봉신들의 안전이 확인되자 한결 부드럽게 질문했다.
“수성중이라고? 적이 얼마나 되길래 호른 경과 애꾸눈이 고전하는 거야?”
로벨의 자상한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상처가 아프고 서러워서인지 전령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제가 확인한 숫자만 3백 마리입니다. 크흑! 동쪽에서도, 동쪽에서도 적이 오고 있다고 하니까, 크흥- 그 이상일 겁니다.”
“3백 마리 이상이야?”
로벨은 이번 몬스터 소동이 생각보다 크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