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2화 (282/605)

282화. 이슬

로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동부평야 재편작업에 들어갔다.

반란군의 거점인 쉐든 성과 런치 성을 정통성을 갖춘 후계자에게 인계하고, 부속 마을을 여러 개로 쪼개어 일찍이 소집에 응한 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번 전쟁의 최고 성과는 프란시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을 축출한 것이다. 영주부터 농민까지 호되게 당했으니, 로벨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두 번 다시 반란은 없을 것이다.

얻은 것만큼이나 잃은 것도 있었다. 간신히 재편 작업을 끝날 무렵, 노을이 지는 저 먼 곳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포클랜드는? 자비에 후작은 뭘 한 거야?”

로벨 로드릭 군이 프란시스 반란군을 신명나게 두드리는 동안, 잉그비아 왕국군은 검은 숲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로벨의 질문에 제임스 공작의 기사가 울분을 토했다.

“지원군은 없었소! 포클랜드의 비열한 기사들은 고르곤 공작과 손잡고 우리를 배신하였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은 볼탄 반도도 마찬가지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호른 경은 시선을 회피했고, 랭스터 경은 헛기침하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리 부끄러워할 필요 없었다.

“반란군과 싸우는 중에도 까마귀 성의 도너반 자작과 가시나무 성의 브릭 자작을 보내 도와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오.”

로벨은 어설프게 ‘아, 아아...’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국왕 폐하와 자비에 후작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검은 숲에 위치한 봉신들에게도 비슷한 내용을 전달했다. 국왕과 공작이 지원하지 않음에도 충성스럽게 명령을 따른 모양이다.

“나의 기사들은 무사하오?”

“까마귀 성으로 퇴각하여 농성 중이라 들었소.”

로벨은 질문을 해놓고 아차! 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제임스 공작은 어떠하오?”

“떡갈나무 성에서 치료 중이오.”

“이런, 부상이 심하시오?”

“옛 신의 사제가 말하길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오. 걱정해주어서 고맙소.”

로벨은 위로와 격려를 뿌리며 검은 숲의 상황을 소상히 전해 들었다.

로벨이 2천 명의 반란군을 몰아내고 쉐든 성을 점령할 시각, 고르곤 공작이 보낸 4천 5백 명의 잉그비아 왕국군이 블랙우드 시티의 성문을 뚫고 흑단성을 포위했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군은 고작해야 500명 남짓이었다. 검은 숲 해방전쟁과 왕위계승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잉그비아 왕국의 정예군을 당해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제임스 공작은 놀랍게도 흑단성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로벨이 몸으로 가르친 교훈 덕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하오. 부상이 심해서 싸울 수가 없으니 신속히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오.”

로벨의 설명을 전해들은 기사들은 대체로 뚱한 표정이었다.

“검은 숲으로 원정 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런 말씀드리기가 대단히 곤혹스러우나, 의무종군일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제임스 공작을 볼탄 반도로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인 잃은 땅을 꿀꺽할 수 있는 반란 토벌과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의무종군일이란 핑계도 있었다. 주군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복무해야 했지만, 영지 밖으로 원정을 갈 때는 40일 이상 복무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오고 가는 시간을 합쳐서 40일이라 주장할 때도 있었다.

“모두 반대란 말이지...”

로벨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충성심 깊은 일부 기사들이 움찔했다. 가장 티 나게 움찔한 것은 역시 호른 경이었다.

“모두가 아닙니다! 저는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검은 숲이 아니라 북해의 끝에서 야만의 땅까지! 언제나 주군을 모시겠습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저렇게 오바하는 거요?’, ‘어이쿠, 충신 났네, 충신 났어’ 속마음을 낱낱이 까 보인 호른 경은 보기 드물게 얼굴을 붉혔다. 로벨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고, 고맙소?”

“천만에 말씀입니다!”

호른 경만큼 열정적이진 않지만, 켈트 경, 바이란 경, 마튼 경 등 원조 로드릭 가문 기사가 뜻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계약 이상의 헌신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경들의 충성심을 잊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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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숨 돌릴 틈 없이 검은 숲 원정군을 추렸다. 반란군 진압에 병력손실이 거의 없었다는 것과 때맞춰 보리 수확이 끝났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울프 용병단은 쉴 틈을 안 준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성의껏 나눠준 전쟁 수당에 헤벌쭉 웃었다.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들은 더욱 좋아했다. 용병업도 은근히 한 철 장사라 추수가 끝나면 전쟁이 없었다. 여름에 최대한 벌어놔야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로벨처럼 우수하고 급료 안 떼먹는 고용주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벌써 더워졌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웠다. 쇠뚜껑보단 낫지만, 무겁고 통풍이 안 되어서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얼굴과 목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긁어내어 좌우로 흔들었다. 땀방울을 햇살에 반짝였다. 지저분하고 냄새날 수 있는 광경인데도 몇몇 사내들은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머, 멋지다.’

‘...아름답다.’

“꺄하!”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은 몸을 빙빙 꼬는 마녀 키르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영주님이 멋지긴 하죠.”

“그건 반박할 수 없지.”

밤하늘에 물들인 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백옥을 깎은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정오 햇살에 반짝이는 금속 갑옷이 동화 속 기사님이었다. 볼탄 반도의 숱한 귀부인과 처녀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본인은 모를 것이다.

“왜들 그렇게 봐?”

로벨이 불편한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죄(?)진 것이 많은 수하들은 자신도 모르게 딴청을 피웠다.

“영주님, 그거, 그,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잘라드릴까요?”

“응?”

로벨은 머리카락을 들쳐보았다. 말꼬리처럼 묶거나 새끼줄처럼 땋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덧 날개뼈를 덮을 만큼 길게 자라있었다.

“아직 괜찮은 것도 같은데? 아니야?”

“저, 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여름이라 덥지 않습니까?”

호른 경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취향을 어필했다. 그러나 별생각 없는 로벨은 베시시- 웃고 말았다.

“경이 그렇다면 생각해보겠소.”

그 미소에 여러 사람이 가슴앓이 했다. 로벨은 땀이 조금 식자 소신대로 투구를 고쳐 썼다. 볼탄 반도를 벗어난 만큼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내일 정오면 까마귀 성에 도착할 겁니다.”

“오늘은 일찍 쉬어도 되겠어.”

로벨은 북부대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검은 숲 지원군을 보았다.

머리에 크고, 작고, 둥글고, 뾰족한 투구를 쓰고, 어깨에 길고, 짧고, 가늘고, 흉측한 창을 걸치고, 갑옷 무게에 짓눌린 구부정한 허리로 오른발, 왼발, 오른손, 왼손 두서없이 휘저으며 따라오는 병사들이었다. 펄프 대장이 칼집을 휘두르며 격려했다.

“기운 좀 내라! 패잔병도 아니고! 어깨 펴고! 똥구멍에 힘주고!”

“힘주면 똥 나오는뎁쇼.”

“지는 당나귀 타고 가면서...”

“나 정도 되면 당나귀 좀 타도 돼!”

용병들은 ‘우우- 우-’ 야유했다. 그래도 덕분에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로벨의 근심은 가시지 않았다.

‘병력이 너무 적어...’

울프 용병단 300명, 프리랜서 150명,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마튼 경 등이 이끌고 온 병사가 200명이었다. 병력으로 집계하지 않은 어린 종자와 수행원을 전부 합쳐도 700명이 되지 않았다.

로벨의 걱정을 읽었는지, 아니면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위로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어중이떠중이를 끌고 가봐야 사기만 떨어집니다.”

“까마귀 성의 두 자작과 합류하면 그럭저럭 2개 대대로 편성될 겁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이저를 내렸다.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용맹한 기사와 강인한 용병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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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계곡 사이에 걸쳐 있는 난공불락 까마귀 성을 훑어보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익숙한데...”

“이상하게 자주 와서 그렇습니다.”

로벨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고 깨달음을 표시했다. 검은 숲을 돕기 위해 원정 온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이쯤 되면 제2의 늑대성이네요.”

“까마귀보다 늑대가 멋있죠. 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잠시 뒤, 허풍쟁이 제이콥이 목을 가다듬고 낭랑한 목소리로 로벨의 작위와 칭호와 업적을 읊었다.

로벨 본인도 처음 듣는 호칭이 포함된 장문의 소개 끝에 겨우 성문이 열렸다. 진즉에 성문을 열 준비가 끝났을 텐데, 자랑(?)을 중간에 끊을 수 없어 하염없이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하품을 꾹꾹 눌러 참는 문지기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로벨은 수비 책임자에게 눈짓으로 사과하고 물었다.

“도너반 자작은?”

“아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 앞에서 주군을 맞이하지 않은 것은 무례지만, 성 주인의 사정을 알기에 화내지 않았다. 로벨은 호른 경과 펄프 대장에게 병사를 통제하라고 지시하고, 어린 집사만 대동한 채 아성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안 좋아요.”

어린 집사가 계곡 아래의 까마귀 마을을 보며 속삭였다. 검은 숲의 몬스터가 난동을 피울 때도, 볼프 후작의 군대가 성 밖을 포위했을 때도 생기를 잃지 않은 마을이 지금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쳐져 있었다.

“정말 안 좋은 모양이야.”

로벨의 예상은 정확했다.

까마귀 성의 성탑 위로 까마귀가 날아다녔다. 도너반 가문의 깃발 옆에 슬픔이 담긴 백기가 힘없이 펄럭였다. 도너반 자작의 기사 종자와 하인이 침통한 얼굴로 로벨을 맞이했다.

“공작님을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넘겼다. 사내의 손길은 질색하는 모닝스타지만, 성 안에 감도는 우울함 때문인지 특별히 반항하지 않았다. 콧김이 조금 거칠어졌을 뿐이다.

“안내해.‘

도너반 가문의 하인과 하녀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길을 안내했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말없이 뒤를 따랐다.

검은 숲의 기사들과 떠들썩하게 연회를 벌인 1층 홀을 지나고, 도너반 자작과 처음 마주한 후원을 지나서 까마귀 성에서 가장 은밀하게 숨겨진 침실에 도착했다.

하인이 노크하기 전에 먼저 방문이 열렸다. 로벨이 서임한 로벨의 첫 번째 기사 머를 브릭 경이 로벨을 보고 화급히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주, 주군! 성 밖에서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로벨은 브릭 경을 질책하지 않았다.

“도너반 자작은?”

“...많이 안 좋습니다.”

로벨은 시선을 방 안으로 옮겼다. 시골 농부의 그것과 같은 초라한 침대에 시궁쥐가 뛰어놀 것 같은 시트를 뒤집어쓴 ‘그것’이 있었다.

“도너반 자작, 내가 왔소.”

“주... 군...”

‘그것’의 일부가 움직였다. 로벨은 비로소 자작의 눈과 입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소?”

도너반 자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벨은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고민하다가 때려치웠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나가시오.”

로벨의 명령에 옛 신의 사제, 치료사, 시종과 시녀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공허한 공간에는 나병 환자의 갈라지는 숨소리만 떠돌았다.

“경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지.”

로벨은 침대맡에 무릎을 꿇었다. 공작이 된 이후 처음으로 꿇은 무릎이었다.

“하지만 진실한 충성은 아니었어.”

“그것은... 것은...”

“본인도 알고 있소. 탓하는 것이 아니오. 경의 충성심이 검은 숲을 향했는지, 볼탄 반도를 향했는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신앙이 깊은 자는 신의 징벌이라 무서워하고, 낭설을 믿는 자는 공기로 전염된다 꺼려하지만, 신의와 우정을 소중히 하는 로벨에게는 가진 재주를 펼쳐보지 못한 그저 안타까운 벗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친구란 것이오.”

일그러진 얼굴에 이슬이 차올랐다. 로벨은 건틀렛과 가죽 장갑을 벗어 기쁨의 흔적을 닦았다.

“검은 숲과 제임스 가문은 본인이 책임지고 돕겠소. 경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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