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1화 (281/605)

281화. 자비

로벨은 반란군 숫자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2천 5백 명이라 해봐야 쇠스랑을 쥐고 누비옷을 입은 농민병이었다. 그것도 지휘하는 기사가 없는 오합지졸 농민병이었다. 토끼 백 마리가 모여도 사자 한 마리를 당해낼 수 없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죽기 살기로 덤비면 피 좀 보겠지만...

‘오히려 문제는 농사일이야.’

봄 작물 수확과 가을 작물 파종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농사에 집중해야 할 농민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어 걱정이었다. 로벨은 누가 농민을 전쟁에 끌어들였는지 궁금했다.

‘류트 공자의 짓일까?’

지금까지 전례를 보면 가장 유력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몰아내기 위해 숙적인 사트로 가문을 끌어들이고, 로벨을 쓰러트리기 위해 악마추종자와 손을 잡았는데, 농민이라고 보호할 리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걸까?”

어린 집사가 폭풍성의 군수물자 목록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열심히 싸우면 자유민으로 풀어준다거나, 공을 세우면 기사로 임명해준다거나, 그렇게 꼬셨겠죠. 조금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사기란 것을 알 텐데, 생각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로벨은 조단 랭스터 경이 가져온 동부평야 지도를 쭉 훑어보았다.

로벨에게 충성하는 곳과 반란에 동참한 곳이 깃발로 구분되어 있었다. 가장 많은 지역을 차지한 것은 양쪽의 눈치를 살피는 중립 세력이었다. 로벨은 거북이처럼 숨은 영주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전투에서 한 번 이기면 바로 이쪽으로 넘어올 자들이었다.

“시간을 끌면 적의 숫자만 늘어나.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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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반란군만이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 군이 폭풍성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기사들이 찾아왔다. 로벨의 편이 되기로 결심한 동부평야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처지가 천차만별이었다. 무장을 잘 갖추고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린 기사도 있지만, 기사라고 밝히지 않으면 기사인 줄 몰랐을 거지꼴도 있었다.

“그, 그 천한 것들이 성으로 쳐들어와서 불을 지르는 통에...”

“새벽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소, 손 쓸 도리가 없었소이다.”

“그래도 난 십여 놈을 때려눕히고 나왔소! 그깟 놈들 맨주먹이면 충분하지!”

로벨은 곧 죽어도 허세를 빼지 않는 기사들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찾아와 준 덕분에 반란군의 위치와 규모를 알 수 있었다.

로벨은 기사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부평야 세력도를 완성했다.

“우선 쉐든 성을 탈환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북에서 남으로 소탕해가는 것이 좋겠소.”

로벨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 호른 경을 보았다. 로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이는 충직한 기사가 웬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이오?”

“사나운 개도 주인은 물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물지 못합니다. 농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질게 학대한 것도, 굶어 죽을 만큼 수탈한 것도 아닌데, 성을 습격하고 기사를 공격하다니요.”

로벨은 펄프 대장이 만들어준 지휘봉을 내려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농민은 가축이 아니오.”

“예? 아, 예. 죄송합니다. 그냥 비유를 든 것뿐입니다.”

호른 경은 로벨의 성품을 깨닫고 급히 정정했다. 로벨은 평소에도 농민을 아끼고 존중했다.

로벨은 표정을 풀지 않고 계속 말했다.

“농민은 가축이 아니오. 지혜와 의지가 있는 사람이오. 본인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보고 강경하게 처벌할 것이오.”

호른 경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로벨의 가치관을 다시 보게 되었다.

호른 경은 농민을 ‘재산’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는 로벨이 자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비나 자애가 아니었다. 권리를 존중하는 것은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일방적인 사랑이 자애로움이다. 로벨은 농민을 갓난아이 취급하지 않았다. 존중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결코 자애롭지 않았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진압하겠구나.’

호른 경의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로벨은 무지몽매한 농민이라고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반란을 일으켜서가 아니었다. 최단시간에 전쟁을 끝내서 아직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농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농사를 망치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가을 농사가 망하면 가장 먼저 굶어죽는 것이 농민이었다.

호른 경이 이런 로벨의 생각을 알았다면 ‘뭐야? 역시 자상하잖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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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정을 보면 자상함이나 자애로움 따위는 그림자도 보이지도 않았다.

“크로스보우 중대, 앞으로.”

울프 용병단을 주축으로 한 크로스보우맨이 발맞춰 전진했다. 여름 햇살에 파릇파릇 자라난 밀밭 저편으로 동요하는 반란군이 보였다.

반란군과 거리는 200~250야드였다. 준마를 타고 채찍질하면 숨 한번 크게 쉴 동안 닿을 거리였다. 엄폐물도, 엄호할 부대도 없이 궁병을 앞세우는 것은 정상적인 지휘관이 할 짓이 아니었다.

‘적도 정상이 아니니까.’

적을 경시하지 않았지만,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기마병은 고사하고 활이나 쇠뇌를 가진 병사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고가의 장비가 있으면 농민병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로벨은 기사와 기마 용병을 우익으로 보내고, 중장병을 쇠뇌병 뒤에 바짝 붙였다.

조단 랭스터 경은 켈트 경, 바이란 경, 매튜 경 등과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바이저를 올리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싸움개’ 닥스는 워 해머와 배틀 액스를 서로 부딪치며 용병들만 알아듣는 속어로 무어라 외쳤다. 기사 다음으로 몸값이 비싼 맨앳암즈는 기사 다음으로 사기가 높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전투 수당을 챙기고 싶어 했다.

최전방에 위치한 애꾸눈 볼포스는 조용했다. 울프 용병단과 프리랜서를 두루 살피며 대열을 유지시킬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차분함은 광기보다 집중이 필요한 크로스보우맨에게 유용했다.

로벨 로드릭 군과 프란시스 반란군이 150야드 간격으로 접어들었다. 로벨은 평소의 명령을 몇 단계 건너뛰었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사격 준비!”

크로스보우맨은 무거운 파비스를 팽개치고 홀가분하게 크로스보우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반란군 중에 사냥꾼이 있는지 화살이 몇 발 날아왔다. 그러나 들짐승 잡는 활과 화살로 쇠와 쇠가죽을 뒤집어쓴 전쟁 전문 용병을 해칠 수 없었다.

억세게 운이 없는 용병 어깨에 화살이 꽂혔다. 용병은 인상을 찌푸릴 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통보다 자존심이 중요했다. 천하의 울프 용병단이 농민병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면 무슨 꼴불견인가.

로벨은 자존심 강한 용병이 고통당하게 두지 않았다.

“사격 개시.”

로벨의 명령은 애꾸눈 볼포스를 통해 크로스보우 중대 전체에 전파되었다.

“사격 개시! 사격! 사격하라!”

숙달된 크로스보우맨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적당한 각도와 적당한 타이밍에 방아쇠를 움켜쥐었다. 고정장치에서 풀려난 시위가 활대의 복원력을 바탕으로 쿼럴을 쏘아냈다.

하나, 둘, 다섯, 열, 스물, 오십, 백, 이백... 점점이 뿌려진 쇠와 나무의 공예품이 무려 삼백이었다. 그중 절반이 땅과 하늘로 빗겨가도 치명적인 숫자였다.

“으아아악-!”

“끄아악!”

반란군의 제1열이 우르르 쓰러졌다. 냄비뚜껑이나 우물덮개 같은 방패 대용품을 가졌지만, 순수하게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병장기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 차례 사격으로 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로벨은 비명 소리에 흥분한 맨앳암즈를 계속 전진시켰다.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 용병인 맨앳암즈 중대는 크로스보우 중대와 마찬가지로 전쟁 무기를 갖추었다. 곡괭이, 낫, 쇠스랑 따위로 당해낼 리 없었다.

거리가 100야드로 줄어들자 머리가 차갑고 상황판단이 빠른 반란군은 손에 든 것을 팽개치고 도망쳤다.

거리가 50야드로 줄어들자 겁이 많은 반란군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거리가 20야드로 줄어들자 갈등할 것도 없이 너도나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나오는군요.”

호른 경이 어이없어서 실소했다.

전쟁을 책으로 배운 부르주아는 무식하고 무모한 기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만, 생사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오가는 실제 전장에서는 그 무모함이 필수적이었다. 기사가 없는 반란군은 일제사격 한 번과 중장보병의 압박으로 간단히 붕괴되었다.

‘첫 전투야. 피를 봐야 해.’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눈짓했다. 어린 집사 다음으로 로벨의 수발을 오래 들어온 허풍쟁이는 로벨의 뜻을 곧장 알고 깃발을 오른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전쟁의 꽃, 전장의 주인, 전투의 화신들은 그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의 명이 떨어졌다!”

“주군에게 반기를 든 미천한 것을 모두 죽여라!”

조단 랭스터 경이 라이트 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박차를 가했다. 그 뒤로 100여 명의 기사가 채찍을 휘둘러 네 개의 다리를 움직였다.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이 전장을 비스듬히 지나 싸우지도 않고 패주한 반란군을 쫓았다.

로벨은 결과를 보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처음부터 예견된 승리였다. 굳이 끔찍하고 지저분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쉐든 성으로 가십니까?”

호른 경이 로벨의 뒤를 따라왔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오늘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포로를 잡으면 엄지와 검지를 자르시오. 저항할 경우 사살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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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의 기사, 볼탄 반도 지배자의 명성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로벨은 한 번의 전투로 2천 명의 반란군을 괴멸시키고 쉐든 성을 탈환했다. 로벨 로드릭 군의 피해는 자잘한 부상자까지 다 해야 고작 20명이었다.

“과연 로벨 로드릭 공작이야.”

“그 괴물에게 반기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지.”

로벨에게 충성한 기사들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고, 혹시나 해서 침묵하던 기사들은 재빨리 금화를 싸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고르곤 공작과 류트 공자의 꼬임에 넘어가 반란을 주도한 빌터 런치 경은 가여울 정도로 겁에 질렸다.

“검은 숲으로 갈 거라고, 갈 거라고 했잖소! 왜, 왜 여기로 온 거요! 왜, 왜...!”

큰 빚을 내어 고용한 용병도, 애써 소집한 농민병도 로벨 로드릭 공작의 처벌에 질려서 도망쳤다. 이제 남은 것은 20명 남짓한 가솔과 늙고 병들어 도망가지 못한 100여 명의 영지민 뿐이었다.

“나 좀, 나 좀 살려주시오. 난 당신네 말을 믿고 따른 것밖에 없소. 시키는 대로 잘했잖소? 나를 데려가시오!”

런치 경이 허공을 휘저으며 애원했다. 공포에 절여서 미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미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편해질 수 없었다.

“열흘은 버틸 줄 알았는데, 무척 실망이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 없는 조각상이 말하는 것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그래도 좋은 꿈을 꾸지 않았소. 그걸로 만족하시오.”

“꿈? 꿈이라고? 난 꿈같은 걸 꾼 게 아니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지 마시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한 우정으로 조언하니 부디 자결하시오. 그편이 경과 경의 가문에게 이로울 것이오.”

런치 경의 두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마지막 말로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애원도, 협박도, 구걸도 소용없었다. 그런 것이 통할만큼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 네놈이 바로 악마였구나. 내가, 내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구나.”

봄 수확이 시작될 무렵, 동부평야에서 프란시스 가문의 복권을 위해 봉기한 런치 가문의 반란이 종식되었다. 반란의 주동자 빌터 런치 경은 침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자살은 크나큰 죄악이라 옛 신 사제가 장례를 주관하지 않았다. 런치 경의 가족과 친구 또한 로벨 로드릭 공작에게 밉보일까 찾아오지 않았다. 외롭고, 초라하고, 씁쓸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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