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주사
로벨 로드릭 공작군의 승리 소식이 볼탄 반도를 넘어 유라피아 대륙 각지로 퍼졌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포비아 국왕이 있는 포클랜드 지방과 그 너머의 에르나 왕국이었다.
“기어이 전쟁을 시작했단 말이오!”
인어의 바다 북쪽 4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에르나 왕국이었다.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으로나 한 발 뒤처진 포비아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 등은 가장 큰 위협인 에르나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우호까지는 아니어도 적대하지는 않았다. 친구라고 하기는 껄끄럽고 적이라고 하기는 아리송한 관계. 그런 관계를 30년 동안 이어왔다.
포클랜드 시티의 자비에 후작이 딱 잘라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오.”
그 한 마디로 수그러든 불길이 살아났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의 복권을 위한 전쟁이잖소! 하이랜드 공작과 볼탄 반도 공작의 갈등이지, 잉그비아 왕국과 포비아 왕국의 갈등이 아니오!”
“그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요? 로벨 로드릭 공작이 승전해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볼탄 반도가 잉그비아 놈들 손아귀에 넘어갈 수 있었소!”
“그만! 그만하시오! 어찌 되었든 두 공작이 싸워서 이로운 것은 에르나 왕국뿐이오!”
데이브 국왕은 지치지도 않고 떠드는 대신들을 향해 한숨 쉬었다. 에릭 공작이나 로벨 공작이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할 터인데...”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싸우면 이득 볼 것은 에르나 왕국뿐이오. 아이언베어 요새가 어찌 함락되었는지 잊지 마시오.”
“그러면 에드워드 3세를 돌려보내고 평화조약을 맺읍시다. ”
“거, 정말 답답하오. 고르곤 공작의 전쟁 목적이 폐위된 국왕과 쫓겨난 프란시스 공자인 줄 아시오? 내정 안정이오! 내정 안정!”
“그런 거라면 더 쉽지 않소? 고르곤 공작을 고르곤 왕으로 인정합시다.”
“왕위 찬탈을 인정하자고?”
“못 할 것은 또 뭐요?”
흰머리가 수북한 왕성 대신들이 핏대를 세우고 싸웠다. 10년만 젊었어도 장갑이 날아들었을 분위기였다. 자비에 후작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헛기침했다. 작게 한 번, 크게 한 번, 제발 좀 닥치라는 뜻으로 아주 크게 한 번 더.
“우리끼리 왈가왈부해서 무슨 의미가 있소. 모두 진정하고 폐하의 말씀을 들어보시오.”
전쟁의 시작은 검은 숲에 있고, 전쟁의 결과는 볼탄 반도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명령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포클랜드의 국왕 폐하뿐이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데이브 국왕에게 집중되었다. 국왕은 주저주저하다가 대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우선 로벨 로드릭 공작의 생각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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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공작은 아무 생각 없었다. 게으르거나 무심해서가 아니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전공을 세운 기사와 병사를 포상하고, 군자금을 빌려준 영주와 상인을 치하하고, 잉그비아 왕국 포로를 분류하고, 영사를 불러 몸값을 협상하고, 재침에 대비해서 군대를 정비했다. 전쟁 후에 항상 하는 일이지만, 바다 건너의 적이라 좀 더 까다로웠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서야 결정적인 도움을 준 청옥성의 주드 맥켈런 남작과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제대로 환영하지 못해 미안하오. 늦었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그쯤 하면 충분하오. 그리고 본인이 아니어도 어차피 이겼을 전쟁 아니오.”
로벨은 늑대성에 모인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로벨 바로 옆에서 싸운 브릭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랭스터 경과 위험을 감수하고 청옥성에 다녀온 호른 경, 매튜 경과 잉그비아 왕국 전함을 나포한 맥켈런 남작 외 청옥성의 기사들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용감하고 믿음직한 기사를 좋아했다. 삶의 큰 갈래에서 귀부인이 아닌 기사의 삶을 선택한 것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계승한다는 명분과 함께 기사의 용기와 신의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 소원을 넘치게 성취하여 명예로운 기사들의 충성을 받으니,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기분이 좋았다.
“고기와 술을 충분히 준비하였소.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청옥성은 청어잡이 외에 마땅한 수익이 없는 척박한 섬이었다. 영주와 기사라 해도 네발 달린 짐승과 날갯짓하는 짐승을 배불리 먹기는 힘들었다. 그런 기사들 앞에서 소, 양, 돼지, 사슴, 닭, 오리 등등 상상할 수 있는 고기가 모두 펼쳐졌다. 그것도 그냥 굽고 삶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의 특별한 허락 아래 값비싼 와인과 향신료를 사용했다. 누린내까지 제거하고 향과 맛을 끌어 올렸으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양고기가 이리 향긋할 수 있다니! 놀랍군! 놀라워!”
“생후 300일 된 새끼 양이라 그렇소.”
“카하-! 좋군! 이 술은 무엇이오?”
“늑대성의 특산품, 리암 수사표 맥주요.”
로벨은 기사답고 귀족답게 파티를 즐기는 모습에 뿌듯해 했다. 부르주아-혹은 젠트리- 계급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앞 접시니 포크니 하는 번거로운 파티보다 양다리를 통째로 뜯고 맥주 거품을 수염에 덕지덕지 묻히는 파티가 제대로 된 파티 같았다.
그러나 모두가 연회를 즐기지는 않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수행기사가 17온스짜리 맥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테이블을 찍었다. 웃음이 한풀 꺾였다.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다물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를 치는 듯해서 미안하오나 한 가지 짚고 가야겠소.”
“무슨 짓인가, 돌프 경!”
맥켈런 남작이 엄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그러나 사자의 포효는 역효과였다. 희미하게 감돌던 웃음마저 사라졌다. 로벨은 술잔을 치우고 화가 난 기사를 마주했다.
“명예롭게 질문하시오.”
수행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고르곤 공작의 분노가 우리 청옥성을 향할 것이오.”
“아...”
앞서 말했듯, 로벨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맥켈런 남작이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다.
북해를 근간으로 하는 맥켈런 가문이 북해에서 가장 강력한 잉그비아 왕국을 공격했으니, 섬의 주민으로서 큰일 중에 가장 큰일이었다. 청옥성과 잉그비아 섬은 과장 좀 해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였다. 청옥성의 기사가 근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본인은 이 전쟁에 반대했으나, 본인의 주군께서는 의리를 생각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전을 결정하였소.”
호른 경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맥켈런 남작의 성품상 호른 경이 찾아온 당일 출병했을 것이다. 맥켈런 남작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날의 오해와 억울함을 풀어준 은혜가 있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소.”
“그러나 고르곤 공작은...”
수행기사가 답답한 듯 말꼬리를 잡았다. 그러자 맥켈런 남작이 버럭하고 호통쳤다.
“우리가 언제부터 잉그비아 왕국놈들을 무서워했는가! 싸울 때가 되면 싸울 뿐인 것을! 경은 어찌하여 본인을 수치스럽게 하는가!”
연회장의 공기가 쇳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북해를 건너온 사나운 기사도, 동방에서 찾아온 떠돌이 기사도 입을 다물었다. 오직 이 땅의 주인만이 입을 열 수 있었다.
“해군이 필요하다 생각하오.”
로벨의 뜬금없는 말에 뭇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은 맥켈런 남작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함을 노획하지 않았소?”
맥켈런 남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로벨이 잘 훈련된 용병단을 좋아하듯, 잘 만들어진 전함을 좋아했다.
“그렇소. 제법 좋은 잉그비아 카락이오. 전투 중에 불이 나서 상갑판이 훼손되었지만, 수리만 잘하면 쓸 수 있을 거요.”
로벨은 잘 되었다는 듯 말했다.
“본인이 수리비를 지원하겠소.”
역시나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정말이오?”
“돛을 잘 다루는 선원과 대포를 잘 다루는 선원을 찾아주겠소.”
호의에 호의가 더해졌다. 이쯤 되자 보상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기사가 당황했다.
“필요하다면 본인이 가진 함선도 지원하겠소.”
어린 집사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맥켈런 남작도 적잖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본인은... 본인의 가문은 국왕 폐하에게 충성하오.”
“알고 있소”
맥켈런 남작은 ‘그래 봤자 너에게 충성할 수 없다’는 뜻을 돌려 말하고 귓불을 붉혔다. 나이 지긋한 기사가 하기에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로벨은 지루한 송사를 처리할 때처럼 무표정했다.
“남작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오. 앞서 말했듯 우린 해군이 필요하오. 볼탄 반도에서 남작만큼 배를 잘 다루는 기사가 없으니 한동안 남작을 이용할까 하오.”
로벨쯤 되는 위치의 기사가 ‘이용’이라 말하니 불쾌하기보다 흥미로웠다. 맥켈런 남작은 거품이 묻은 수염을 쓱쓱 닦고 웃었다.
“주종관계가 아니어도 협력은 할 수 있지. 1로닝이 아쉬운 처지에 거절할 이유도 없고. 좋소!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어린 집사가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머리를 저으며 ‘아냐! 아냐! 거절해도 돼!’ 소리쳤지만, 너무 내적인 함성이라 마녀 키르케 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슬그머니 술잔을 채우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럼 이 자리는 로벨 로드릭 공작의 승전축하 겸 늑대성과 청옥성의 동맹을 기념하는 자리군요.”
“동맹? 그렇지! 동맹이오! 으하핫! 술잔을 듭시다!”
바람에 흔들린 불은 이내 활기를 띠고 더욱 활활 타올랐다. 결국, 늑대성의 술자리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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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를 믿고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본래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기분이 좋아진 맥켈런 남작이 강권하는 통에 일찍부터 주량을 초과했다.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데 혼인만큼 좋은 것이 없소. 내 막내딸이 이제 14살인데...”
잊을만하면 나오는 결혼 이야기가 또 나왔다. 로벨은 술김에 “까짓거 그럽시다!” 외칠 뻔했다. 호른 경이 적절히 끼어들어 말을 돌리지 않았으면 시집이 아니라 장가를 갈 뻔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 아니오. 옛 신의 신실한 신자인 주군께서 그런 혼인을 하실 수 없소.”
“가문의 결합에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그리고 내 딸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아주 예쁘고 참하다오.”
“맞소. 맞소. 바다사자의 말이 맞소. 내가 시집가는데 호른 경이 왜 참견이오?”
술 취하니 아무 말이나 막 나왔다. 술 취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바다사자, 아니, 북해의 사자는 57번째 술잔을 비우고 통 크게 인심 썼다.
“딸아이 하나로 부족하면 셋 다 주겠소! 결혼했냐고? 결혼했으면 어떻소! 전부 데려가시오!”
“...리암 수사가 없어서 다행이오.”
로벨의 정체가 들킬까, 술기운에 사고 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제정신을 유지하는 호른 경만 고통스러웠다. 걱정하는 티를 내면 안 되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런 호른 경의 노력 덕분에 기나긴 술자리가 무사히 끝났다.
로벨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용병함대를 만들면 교역보다 해적소탕에 주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에 해당하는 전문적인 대화를 끝으로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침대에 무사히 들어온 것을 보면 사고 치지 않은 듯했다. 물론, 어린 집사의 생각은 달랐다.
“오랜만에 영주님 주사를 봤네요.”
“...또?”
“예. 기둥 사이를 돌며 춤췄어요.”
로벨은 이마를 짚고 한숨 쉬었다. 잠결에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얼마나 술을 부었는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
“맥켈런 남작은?”
“메인 홀에 뻗어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야랑 이야카를 붙여놨으니까 얼어 죽진 않을 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데...”
“대체 왜 그랬어요?”
로벨은 술과 잠에서 깨면서 슬금슬금 어린 집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 해군지원 말이야?”
어린 집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뿜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호른 경 말이에요.”
“호른 경이 왜?”
“기억 안 나세요? 호른 경을 끌어안고 이 기사를 이기면 결혼하겠다고 소리쳤잖아요. 농담이 아니에요. 맥켈런 남작이 결투를 신청할 뻔했다고요. 그거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서 술자리가 끝났는데... 정말 기억 안 나요?”
기억이 안 났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 내가? 내가 왜?”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