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반란
술자리에서 일은 술자리에서 끝내는 것이 매너 있는 기사였다. 더욱이 동이 틀 무렵에는 너도나도 만취하여 초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떡갈나무, 밤나무, 1.2인치 밧줄, 쇠사슬, 마포(麻布)와 면포(綿布) 등입니다. 각 영지의 사정에 맞게 배당량을 조율했습니다. 숙련된 선원은 프란시스 시티의 선원조합을 통해 고용할까 합니다. 주군?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 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닦다가 깜짝 놀라 휘둘렀다. 로벨 옆에서 주판알을 옮기던 어린 집사가 기겁하며 자빠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아야와 이야카가 어린 집사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총체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호른 경은 ‘청옥성으로 보낼 물자 목록 보고서’를 치우고 잠시 화제를 돌렸다.
“맥켈런 가문에서 종자를 받아 달라 요청했습니다.”
“기사 종자?”
“딸이 싫으면 아들을 데려가란 의미로 보이... 주군! 괜찮습니까?”
로벨은 잔기침하고 아론다이트를 내려놓았다. 지금 상황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위험했다.
“기사 종자라... 좀 불편한데...”
로벨이 혼잣말하자 호른 경이 냉큼 받잡았다.
“그렇군요. 즉시 거절하겠습니다.”
로벨은 시원시원한 일처리에 흐뭇해하다가 정신 차렸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이었다. 외부인에게 로드릭 가문의 비밀을 보여서 안 되었다.
“그러지 말고 호른 경이 기사 종자로 받는 것이 어떻소?”
“제가 말입니까?”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라 하면 볼탄 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맥켈런 가문의 차기 주인 마스터로 부족하지 않잖소.”
호른 경은 난색을 표시했다.
“이 일은 단순히 기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로드릭 가문과 맥켈런 가문의 연줄을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맥켈런 가문의 후계자를 종자로 받아들이면 크나큰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아, 그런 것이오?”
사실 로벨이 거절하는 것도 모욕이라면 모욕이었다. 로벨이 계약상 ‘갑’이라 그냥 넘어가는 것이지, 반대 입장이었으면 중매에 이어 기사 종자까지 거절한 의도를 의심받았을 것이다.
똑똑- 누군가 로벨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펄프 대장일까 마녀 키르케일까 생각하다가 차분한 기다림에 제삼자를 떠올렸다.
“폴라 경?”
“잠시 실례하겠소.”
늑대성의 손님으로 체류 중인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손님이라 해도 성 아랫마을 ‘지미와 루시 여관’에 숙박비를 내주는 정도라 부담이 없었다.
“어서 오시오. 안 그래도 점심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경도 함께하시오.”
더스틴 폴라 경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 호른 경과 애완 늑대하고 싸우는 어린 집사를 차례와 보았다. 로벨의 최측근들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뱀파이어의 단서를 찾았소.”
사람 말을 모르는 회색 짐승 두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설마?’, ‘에이, 설마!’ 더스틴 폴라 경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할 말을 계속했다.
“주변 영지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하니 몇 해 전부터 젊은 처녀가 실종되는 일이 잦다고 하오.”
“그야 못된 놈들이 많으니까... 아니면 남자랑 눈 맞아서 도시로 도망쳤을지도 모르죠.”
“도적짓이면 몸값을 요구하는 등의 반응이 있었을 것이오. 그런 일이 일체 없으니 ‘못된 놈’ 짓은 아니오. 사내와 함께 도망친 것도 아니오. 젊은 사내도 실종되기는 했으나 숫자가 맞지 않소. 혼자서 6, 7명과 눈 맞은 게 아니면 말이오. 야반도주와 단순실종도 있겠지만, 사건 규모로 보아 몬스터의 소행이 의심되오.”
로벨이 전쟁 뒤처리와 청옥성 일로 바쁜 동안 열심히 조사한 듯했다. 숫자까지 나열하는 것을 보아 확실했다.
“그것만으로 뱀파이어를 잡을 수 없잖소?”
“몇 가지 유력한 장소를 알아냈소.”
이쯤 되니 정답을 알아도 호기심이 생겼다.
“첫 번째는 뉴-로드릭 마을이오.”
헛발을 아프게 짚었다.
“엥? 우리 마을이요?”
“내 땅에서 실종사건이 있다고?”
영주 입장에서 모욕으로 여길 수 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조금 빠르게 해명했다.
“아니오. 공작의 영지에서는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소. 그래서 의심스러운 것이오. 오래전 뉴-로드릭 마을에 구울이 출몰했다고 들었소. 뱀파이어가 부리는 하급 몬스터 중 하나니 관련이 있을 것이오.”
로벨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 일은 뱀파이어 짓이 아니오. 전(前) 영주가 사악한 마법을 부린 것이오.”
“실종자가 없는 것은 치안이 좋아서죠. 울프 용병단이 상시 주둔하는데 몬스터 따위가 어딜 와요?”
더스틴 폴라 경은 실망하지 않았다. 유력한 장소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강철성이오.”
두 번째 후보지에 로벨과 어라 집사 모두 입을 다물었다. 크게 헛디딘 다음이라 더욱 놀랐다.
“어, 어째서요?”
“뉴-로드릭 마을과 비슷하오. 오래전에 몬스터가 출몰했고, 이후 실종자가 속출했소. 한번은 영주를 돕는 재무관까지 사라졌소. 다행히 금방 발견되었으나, 누가 왜 납치했는지 밝히지 않아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소.”
로벨은 뜨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로벨보다 영악한 어린 집사가 따지듯 물었다.
“그래서요? 그럼 다른 영지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과거형이오. 과거에 그랬으나 어느 순간부터 실종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소. 약간의 오차가 있으나, 조지 도트넘 백작이 사망하고 도반 도트넘 백작이 집권한 이후부터요.”
먼 동방에서 와서 지인 하나 없이 조사한 것치고 놀라운 수준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감탄하자 더스틴 폴라 경은 내심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유로 도반 도트넘 백작을 만나 보았으면 하오. 염치불구하고 소개장을 부탁하고자 하오.”
“그... 소개장이 필요하오? 그냥 찾아가면 되잖소?”
“생면부지의 이방인 기사가 뱀파이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고 하면 무엇이라 하겠소?”
“...이해했소.”
이해는 했지만, 허락은 하지 않았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바로 뱀파이어였다. 그것도 잡스러운 흡혈 괴물이 아니라 반신(半神)에 가까운 뱀파이어 군주였다. 더스틴 폴라 경이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고 하나 마도의 수호자와 싸워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소개장은 곤란하오. 우리 가문은 도트넘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소. 조금 전에 거론한 조지 도트넘 백작을 살해한 것이 바로 본인이요.”
“...그렇소? 이거 실례되는 부탁을 했군. 미안하오.”
더스틴 폴라 경은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로벨의 도움 없이 강철성의 주인을 만나러 갈 태도였다. 그 뒷모습을 보자 추억 속에 애써 묻어둔 후회가 꿈틀거렸다. 그렉 페럿 경처럼 당하게 둘 수 없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로벨의 다급한 제지에 모두가 로벨을 응시했다. 로벨은 진땀을 흘리며 방금 막 추리한 것처럼 연기했다.
“경의 조사대로, 도반 도트넘 백작이 온 뒤로 실종사건이 사라졌다면, 가장 의심해야 할 인물이 누구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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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폴라 경은 지미와 루시 여관에서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로벨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몇 명을 보내서 더스틴 폴라 경을 감시 및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경 쓰지는 못했다. 볼탄 반도의 공작이 해야 할 일은 방랑기사의 안정 외에도 아주 많았다.
청옥성으로 여러 대의 수레가 떠났다. 대부분이 범선 수리에 쓰일 자재지만, 주드 맥켈런 남작에게 사과의 의미로 보내는 델 포니 산 와인과 델프트 블루처럼 값비싼 물건도 있었다.
로벨은 숫자가 빙빙 도는 보고서를 슬그머니 치우고 구두로 물었다.
“잉그비아 왕국 상황은 어떻소?”
“하이랜드의 고르곤 공작이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하는 기사들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나,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닙니다.”
“그 공작님도 대단하네요. 나라 하나를 꿀꺽한 거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의 꼬리털로 수염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하는 짓은 7살 꼬마지만, 말하는 것은 제법 무게가 있었다.
“도망 온 국왕님도 있고, 도망간 공자님도 있으니까, 분명 다시 올 거예요. 저번보다 훨씬 큰 배를 타고 말이에요.”
“오긴 오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이 문제야. 북해안에 360일 군대를 주둔할 수 없잖아. 봉신들도 달가워하지 않을 테고.”
로벨이 근심하자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이 경쟁하듯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해안요새를 짓고 순찰대를 운영하는 게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부자인 줄 알아요? 요새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누가 순찰해요? 북부 기사들이? 울프 용병단이?”
“그럼 봉화를 설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봉화? 그게 뭐야?”
“큰불을 지펴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전령보다 신속하지요.”
“그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겠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왔으나 해결책은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을 유심히 정탐하며, 언제든지 군대를 소집할 수 있게 준비하자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끝났다. 그리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본디 사건과 사고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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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이오! 폭풍성의 조단 랭스터 경이 보낸 전령이오! 로벨 로드릭 공작님을 뵙게 해주시오!”
로벨은 보리빵을 잘게 찢다가 멈칫했다.
늑대성은 오래된 성이라 방음은 고사하고 소음이 심했다. 성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연병장을 지나 집무실까지 들려왔다.
로벨은 손에 든 빵조각을 이야카에게 양보하고 의자등받이에 걸어둔 캐벌리아 햇과 소드 벨트를 챙겼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모자로 감추고, 헐렁한 옷을 혁대로 묶었다. 소매를 풀어 길게 늘어뜨리고, 마른세수하며 눈곱을 떼어내자 그럭저럭 성의 주인다운 몰골이 되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펄프 대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영주님, 폭풍성에서 전령이...”
“나도 들었어. 성 안으로 들여보내.”
로벨은 느릿느릿 1층 홀로 내려갔다. 봉신이 찾아와도 급할 것이 없는데, 봉신의 전령이 왔다고 서두르는 것은 품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보고 경박하다고 잔소리할 것이다.
“My Lord!”
로벨이 모습을 드러내자 폭풍성의 전령이 쓰러지는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 진짜로 쓰러졌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묵은 냄새가 물씬 퍼졌다. 낯빛을 보아 사흘쯤 안 자고 달려온 듯했다.
“조단 랭스터 경이 보냈어? 무슨 일로?”
로벨의 침착한 목소리가 전령의 비장한 태도와 사뭇 대비되었다.
“그, 그...”
아무리 급박해도 자빠진 자세로 알현할 수 없었다. 전령은 낑낑거리며 한쪽 무릎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크게 외쳤다.
“동부평야의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로벨의 눈썹 사이를 좁혔다.
“반란?”
고르곤 공작과 류트 공자가 손을 쓴 곳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과 서쪽이었다.
남쪽은 프란시스 가문의 입김이 강하게 남은 동부평야고, 서쪽은 잉그비아 국왕이 망명한 검은 숲 지방이었다.
“주군, 잉그비아 왕국군 4,500명이 블랙우드 시티를 공격 중이라 합니다.”
로벨은 갑옷을 챙겨 입다가 이마를 짚었다. 역시 사건과 사고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예상했으면 사고가 아니라 상황이지.”
예상했어도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