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72화 (272/605)

272화. 사냥

영지의 숲은 영주의 보고(寶庫)였다.

평소에는 집을 짓는 목재와 빵을 구울 장작을 조달하고, 춘궁기에는 일용할 고기와 버섯을 채집하며, 때로는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유흥까지 담당했다.

“너무 많이 잡으면 안 돼요. 적당히! 적당히! 아셨죠?”

“응. 걱정하지 마.”

로벨의 늑대성은 지난날 장미성처럼 사흘 밤낮 동안 기사들을 접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장미성에 없는 ‘숲’을 이용한 사냥 행사였다. 부족한 식자재를 해결할 수 있고, 야외 파티로 늑대성의 부족한 공간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자신이 잡은 짐승으로 연회를 즐기라는 뜻이지! 과연 늑대성의 공작다운 발상이오!”

“정원에서 곱게 자란 장미 따위와 다르지 않소이까? 우하하핫!”

사냥에 초대된 기사들도 즐거워했다. 특히 마상시합에서 솜씨를 뽐내지 못한 기사와 가난하여 진상품을 가져오지 못한 기사가 매우 좋아했다. 커다란 회색곰을 잡아 가죽을 바치겠노라 호언장담하는 기사도 있었다. 어린 집사는 최대한 안 잡는 것이 로벨을 위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꾹꾹 참았다.

“그런데 저자는 왜 온 거지?”

“그리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얼굴을 내밀다니, 용기만큼은 대단하군.”

기사들의 수군거림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어린 집사는 무심코 시선을 따라갔다.

1일 차 1회전에서 패배한, 그것도 가장 꼴불견으로 낙마한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로벨 공작이 직접 초대했다고 하오.”

“공작께서? 어찌해서?”

“저자의 가문이 대단한 것 아니오?”

더스틴 폴라 경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로벨이 남달리 관심을 보이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까 무기도 특이하고...’

더스틴 폴라 경은 몸통에 6.5피트나 되는 롱보우를 메고, 허리 뒤에 작고 날렵한 숏보우 활집을 찼다. 칼이나 도끼를 두 자루 차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활을 두 자루 차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어린 집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잉그비아 롱보우보다 한층 더 큰 롱-롱보우를 쳐다보았다.

‘저런 걸 말 위에서 다룰 수 있나?’

어린 집사만의 의심이 아니었다. 기사와 기사의 수행원 모두 변방 기사의 허세라고 생각하고 비웃었다. 마상시합의 꼴사나운 모습이 각인된 탓도 있었다.

로벨은 이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모닝스타를 타고 애꾸눈 볼포스 외 크로스보우 2개 소대를 거느리고 기사들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볼탄 반도가 자랑하는 최고의 기사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시했다.

수풀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100명의 기사에게 충성을 다짐받는 공작의 모습은 한 폭의 명화 같았다. 현실보다 낭만을 좋아하는 어린 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들 중 일부는 평생의 우상으로 삼기도 했다.

꿈 많은 기사 종자의 우상이 된 로벨 로드릭 공작이 어울리지 않게 무게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기사들은 비로소 몸을 일으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고기 준다는 말에 냉큼 따라 나온 아야와 이야카가 로벨의 발아래에서 으르릉거렸다.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쇠냄새 나는 기사와 똥냄새 나는 전투마만 가득해서 기분이 상했다.

“지금 이 시각부터 해가 질 때까지 사냥 대회를 실시하겠소. 가장 큰 사냥감을 잡은 기사와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은 기사에게 황금으로 된 사슴뿔을 하사하겠소.”

포클랜드의 어느 상인이 선물한 물건이었다. 족히 2, 3천 페닝은 나올 보물이라 어린 집사가 피눈물을 흘렸다.

‘첫 토너먼트에 첫 사냥 대회인데. 이 정도 포상은 걸어야지.’

로벨의 포상에 기사들은 활과 쇠뇌를 치켜들고 환호했다. 황금과 명예를 싫어하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사들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호응이 좋아서 다행이긴 한데, 숲이 망가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저자는?’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사람이 있었다. 기사 종자도, 몸종도 없는 가난한 떠돌이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가볍게 때려 폴라 경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감이오? 아니면 포기한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느릿느릿 안장을 쪼이고 재갈을 물렸다. 로벨은 그 모습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종자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곳의 기사들은 훌륭한 전사지만, 훌륭한 사냥꾼은 아니오.”

“그럼 경은 사냥꾼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재갈의 가죽끈을 묶고 잠시 고민했다.

“기사의 본질이 사람을 죽여 업을 쌓는 대적자라면, 나 또한 기사일 것이오.”

로벨은 더스틴 폴라 경에게 흥미를 느꼈다. 하얀 숲의 후작 때문이 아니었다.

“경의 사냥 솜씨를 구경해도 되겠소.”

더스틴 폴라 경은 로벨의 매끈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끄덕였다.

“...영광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늙은 말과 낡은 마구를 꼼꼼하게 점검한 후 등자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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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파티를 준비할 인원을 공터에 남기고 애꾸눈 볼포스 외 3명만 데리고 더스틴 폴라 경을 따라갔다.

로벨을 호위하는 울프 용병단은 귀찮은 잡일에서 열외되었다고 좋아했지만, 10분이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저기, 폴라 경...?”

“쉿.”

더스틴 폴라 경은 누가 입을 열 때마다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병장기 소리를 내거나 발소리를 크게 내면 진짜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숲의 주인인 로벨이 눈치를 살펴야 했으니, 로벨의 아랫사람인 울프 용병단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조심하고 조심한 성과가 마침내 나타났다.

“기사 나리, 사슴... 읍!”

용병이 속삭이다가 화급히 입을 막았다. 더스틴 폴라 경이 롱보우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로벨은 칼자루를 잡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배회하는 사냥감을 보았다. 먹을 것이 부족해 삐쩍 마른 수사슴이었다. 아카시아 나무처럼 삐죽삐죽 솟은 뿔이 탐스러웠다.

‘솜씨 좀 볼까?’

더스틴 폴라 경은 어깨에 건 롱보우를 풀어 왼손에 쥐고 허리 뒤에서 4피트짜리 화살을 뽑았다. 활과 함께 들어서 화살이라 짐작할 뿐, 화살만 따로 보면 가냘픈 숏 스피어로 착각했을 것이다.

로벨은 말도 안 되게 커다란 활과 화살을 어찌 쏠지 유심히 살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왼발을 오른쪽 등자로 옮겨 흡사 숙녀처럼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나 손에 쥔 롱보우는 다소곳하지 않았다. 활대를 쥔 왼손을 왼쪽으로 뻗고, 살과 시위를 쥔 오른손을 오른쪽으로 한계까지 당겼다.

“허?”

“와우!”

궁술에 조예가 있는 애꾸눈 볼포스 이하 크로스보우맨이 감탄했다.

장력이 100파운드가 넘는 잉그비아 롱보우는 순수하게 팔심으로 쏘지 않았다. 자세를 유지하는 등과 다리 힘이 중요했다. 그런데 더스틴 폴라 경은 보통의 롱보우보다 훨씬 큰 대궁을 오직 팔 힘으로 당겨 고정한 것이다. 끼리릭- 끼릭-

“첫 화살은 가볍게.”

더스틴 폴라 경이 시위를 놓았다. 투웅-! 상식 이상으로 큰 살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위력도 진짜 대포처럼 엄청났다. 사슴의 몸통을 완전히 꿰뚫어 반대쪽으로 한 뼘 이상 튀어나왔다.

‘어딜 봐서 가볍냐!’

일반적으로 화살에 맞은 짐승은 놀라서 도주하다 출혈을 못 이겨 쓰러지는데, 워낙 무지막지한 화살이라 사정이 달랐다. 먹이를 찾아 나온 가엾은 수사슴은 내장이 찢겨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괴, 괴물이잖아?”

아직 놀라기에 일렀다. 더스틴 폴라 경은 롱보우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감이 꿩처럼 작은 짐승이면 즉시 활과 화살을 바꿨는데, 시위를 먹이고, 당기고, 쏘는 동작이 손을 씻고 물을 털고 손수건을 꺼내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화살 두 개를 동시에 쏘아 두 마리 토끼를 잡기도 하고, 화살 한 뭉치를 활대와 함께 쥐고 속사로 연거푸 당기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말 위에서 이뤄졌음을 생각하면 기술이 아니라 기예였다.

“저런 거 본 적 있어?”

“...아니요.”

활 좀 만져보았다는 애꾸눈조차 할 말을 잃었다.

“동방의 기사가 활을 잘 다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정상적인 동방인은 저렇게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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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당연히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몰이꾼이 없는 겨울 사냥은 쉬운 일이 아니라, 기사 대부분이 빈손이었다. 그나마 기사(騎射)에 능한 기사 몇몇이 미리 풀어놓은 산양과 노루를 한 마리씩 잡았을 뿐이다. 반면 더스틴 폴라 경은 사슴 한 마리, 토끼 세 마리, 꿩 두 마리, 이름 모를 산새와 너구리 비슷한 들짐승을 산더미처럼 잡아왔다. 말 등에 다 실지 못해 울프 용병단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공작님께서 잡으신 겁니까?”

“나 아니오. 여기 폴라 경의 전리품이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입을 모아 더스틴 폴라 경의 활솜씨를 칭찬했다. 화살 하나로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꿰뚫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실력자임이 증명되었다. 기사들은 무식한 만큼 단순해서 더스틴 폴라 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아졌다. 영리한 만큼 계산적인 어린 집사만 빼고 말이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영지 살림 거덜나겠네. 거덜나겠어. 저 사람은 다음부터 초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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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는 2일차, 3일차 모두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로벨은 꿋꿋하게 패티 하트 경의 이름으로 출전했고, 로벨의 정체를 아는 기사들은 그랜드 챔피언의 창을 꺾어보겠다고 기를 쓰며 덤볐고, 로벨의 정체를 모르는 관객들은 제2의 로벨 로드릭 공작이 나타났다고 기뻐했다.

대중적인 인기는 아니지만,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도 명성을 쌓아갔다.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직접 본 기사들은 신궁 내지 명궁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로벨 역시 백발백중의 솜씨가 신기하여 사냥갈 때마다 가까이했다.

“마음에 안 드는군.”

“저도 마음에 안 들어요.”

“기사란 자가 조잡한 잡기(雜技)나 부리다니...”

“말 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무엇 때문인지 의기투합했다. 나이와 성별과 신분을 뛰어넘어 한마음 한뜻이 되었으니 역시 성공적인 축제였다.

“경의 고향 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는 것이오?”

“그렇지 않소. 당신네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소. 다만, 동방대륙과 교류하여 기예가 조금 발달했을 뿐이오.”

로벨은 더스틴 폴라 경의 활을 살펴보았다.

롱보우는 주목(朱木)을 통째로 깎아 만든 강궁인데, 길이를 최대로 늘려 장력을 증가시켰다. 사슬 갑옷은 물론이고, 제대로 맞추면 철판도 꿰뚫을 듯했다.

숏보우는 셀프 보우가 아니라 컴포짓 보우였다. 참나무와 상아를 이어붙이고, 연철로 내구성을 강화하여 크기에 비해 묵직했다. 당기는 힘 또한 사냥용 숏보우보다 많이 들어갔다.

“정말 대단한 활이오.”

“공작의 무기 또한 대단하오.”

로벨이 활에 감탄하는 만큼, 더스틴 폴라 경도 아론다이트의 견고함과 흐룬팅의 예리함에 감탄했다. 태어난 곳은 달라도 기사는 기사라 병장기에 애착이 많았다. 애병이 칭찬받자 자신이 칭찬받은 것만큼이나 좋아했다.

친분이 쌓이자 자연히 신상과 근황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경 정도 되는 기사가 볼탄 반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무심한 듯 무덤덤한 더스틴 폴라 경이 대답을 주저했다. 로벨은 예의를 아는 매우 희귀한 기사였기에 두 번 묻지 않았다.

축제 3일 차가 무사히 지나고, 사냥 대회가 마무리될 때였다. 더스틴 폴라 경이 지나간 질문을 잊지 않고 대답했다.

“본인은, 신화 속에 나오는 죽지 않는 약, 불로불사의 약을 찾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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