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축제
토너먼트(Tournament).
머나먼 나라에서는 승자진출전의 시합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곳 유라피아 대륙에서는 축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화려한 볼거리와 풍족한 먹거리와 다양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으니, 기사의 축제이고, 시민의 축제이며, 농민의 축제였다.
“위대한 볼탄 반도의 공작님이자, 위대한 늑대성의 공작님이자, 위대한 세 도시의 지배자이자, 위대한 폭풍성의 정복자이자, 위대한 포비아 왕국의 위대한 챔피언이자...”
호기심 많은 마녀 키르케는 ‘위대한’이란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손꼽아 세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관객들은 돌멩이와 빵조각을 집어 던지며 야유했다. 그러나 노스폴드 시티 전업 광대는 꿋꿋하게 할 말을 다 했다.
“...위대한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 주관하는! 제1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를! 지금 개최합니다!”
“우오오오!”
“와아아아아!”
야유를 환호로 바꾸는 것이 광대의 마법이었다. 포비아 왕가의 깃발과 로드릭 가문의 깃발이 올라가고, 크고 화려한 토너먼트 아머를 입은 기사들이 차례로 마상시합장을 돌았다.
예능감이 있는 기사들은 바이저를 올리고 오른손을 크게 흔들었지만, 권위의식이 가득한 기사들은 천박한 시민과 하찮은 농민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관객들은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조롱을 쏟아내며 나름대로 즐겼다. 토너먼트 퍼레이드는 포비아 왕국의 오랜 전통이라 거부할 수 없었다.
“저게 다 얼만데... 으으... ”
로드릭 시티 남쪽 휴경지에 거대한 마상시합장이 설치되었다.
성벽 공사를 위해 쌓아놓은 자재를 그대로 활용하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석공이 평평하게 깎은 바위는 관객석이 되고, 목공이 매끈하게 다듬은 나무는 시합장 울타리가 되었다.
“어린 집사! 영주님! 영주님 못 보았소?!”
어린 집사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제1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는 성대하게 준비되었으며, 전쟁과 노역에 지친 시민들에게 좋은 유흥이 되었다.
“영주님이요? 조금 전에 단상에 계셨는데요?”
“지금 개회사를 해야 하는데 안 보이오! 빨리 좀 찾아보시오!”
펄프 대장이 불편한 다리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어린 집사는 즉시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를 불러서 영주님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울프 용병단이 사방으로 흩어져 ‘기사 나리’와 ‘공작 나리’를 외쳤다. 그러나 관객들의 함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요? 기사님이 사라졌어요?”
“조금 전까지 저기 계셨는데?”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도 로벨의 거취를 알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주최자 관람석을 오르내리다 끝내 분통을 터트렸다.
“아! 증말! 또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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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입꼬리가 과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철로 된 바이저는 화살뿐만 아니라 시선도 가려주었다.
푸르르릉-!
모닝스타가 갉기를 휘저으며 투레질했다. 마시장에 풀어놔도 단번에 찾을 수 있는 모닝스타지만, 지금은 누구도 모닝스타를 알아보지 못했다.
“조금만 참아.”
로벨은 머리부터 발목까지 감싼 마의(馬衣) 위로 모닝스타를 쓰다듬었다. 모닝스타는 정말 하기 싫지만 주인님 때문에 참는다는 듯 콧김을 크흥! 뿜었다.
자제심을 발휘하는 것은 모닝스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로벨의 헬름과 모닝스타의 마의 주인, 호른 성의 호른 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벨은 헬름의 구멍으로 눈을 흘기고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적당할 때 기권할 테니까.”
기사 된 자로, 신하 된 자로, 사내 된 자로 존경하고 존중하지만, 친구로서는 신용하지는 않았다.
‘분명 사고 칠 것 같은데...’
로벨의 부재로 개회사는 얼렁뚱땅 넘어갔다. 로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때 빼고 광내서 찾아온 기사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로벨 로드릭을 칭송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로드릭 시민 여러분! 드디어!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됩니다!”
마상시합을 주관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호른 경이라, 로벨의 시합은 가장 영광된 첫 시합으로 잡혔다.
로벨은 거치대에 놓인 버드나세 중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두꺼운 것을 골랐다. 기사 종자가 없어 하나하나 직접 해야 했다. 관객들이 가난뱅이 무명 기사에게 야유를 쏟아냈다. 우우-! 우우우-!
로벨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실력이든 평판이든 마음만 먹으면 뒤집을 수 있는 모욕은 모욕이 아니었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야.’
로벨은 9년 전 프란시스 시티에서 참전한 첫 마상시합을 떠올렸다. 이름 없는 시골 기사로 우승 후보는 고사하고 1회전 승리도 기대 받지 않았다. 그 시절과 매우 비슷했다. 물론, 그때와 다른 것도 많았다.
지금 로벨이 가진 것은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찌그러진 갑옷이 아니고, 그 갑옷을 담보로 빌린 비루먹은 늙은 말도 아니었다.
“Fight!”
광대의 우렁찬 목소리와 관객의 환호성이 로벨의 잡념을 씻겨냈다.
“이럇! 이랴앗!”
로벨은 상대보다 한발 늦게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유니콘의 피가 흐르는 모닝스타는 네 발이 한 번씩 땅을 찰 때 전력질주 속도에 도달했다. 평범한 전투마는 흉내 내지 못할 가속력이었다.
‘어린 집사, 키르케, 펄프 대장, 첫 승리는 너희에게 바칠게.’
랜스 손잡이가 랜스 레스트에 걸리고, 창머리가 수평으로 들렸다. 몸은 상하로 요란하게 흔들리지만, 창끝은 정확히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맥주잔을 올려놔도 술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굉장한 안정감이었다.
로벨의 범상치 않은 말과 심상치 않은 창술은 상대 기사가 제일 먼저 알아챘다. 격돌하기 전에 전의가 반쯤 꺾였고, 창끝이 고짓 플레이트를 후려칠 때 그나마 남은 반쪽도 증발했다. 헬름이 옆으로 돌아가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낙마했다. 첫 시합의 행운이 로벨 로드릭이란 불운에 잡아 먹혔다.
“도, 동 코너! 에... 에... 패티 하트 경 승리!”
로벨의 가명이 울려 퍼지자 호른 경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심이 담긴 이름이라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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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기분 좋게 시합장을 한 바퀴 돌고 동쪽 코너로 사라졌다. 로벨의 오랜 토너먼트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승리였다.
“다음 상대는 누굴까나?”
“그렇게 재미있어요?”
“꺄앗!”
로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나케아 투구를 얻은 이후 헬름을 쓰면 시야가 좁아진다는 당연한 상식을 잊고 있었다. 아니, 파나케아 투구를 썼어도 상대방의 정체 때문에 놀랐을 것이다.
“어, 어린 집사?”
“예. 영주님의 어린 집사에요.”
로벨은 아차 해서 시선을 피했다.
“영주님 아니야. 난 머나먼 이국에서 온 멋쟁이 기사 패티 하트 경이야.”
어린 집사는 가자미눈을 떴고, 호른 경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여섯 살짜리 꼬마한테 시켜도 저것보단 실감 나는 연기를 할 것이다.
“제 나이가 영주님을 모신 햇수에요. 투구 좀 바꿔 썼다고 못 알아볼까요? 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마, 마상시합이 하고 싶어서...”
“영주님이 팔팔한 10대도 아니고, 공작쯤 되었으면 근엄하게 아랫것들을 굽어볼 줄도 알아야죠. 아, 정말! 영주님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승리의 영광은 집사에게 양보했어!”
“거 먹지도 못하는 영광 저쪽에 치우시고요. 빨리 자리로 돌아가요. 봉신들이 영주님을 뵈려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고요.”
“봉신들이?”
로벨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어린 집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이 주관하는 첫 토너먼트잖아요? 받은 게 있으면 당연히 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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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공작위에 오르면서 로벨의 봉신들도 작위와 봉토를 하사받았다.
로벨을 가장 오랫동안 따른 머를 브릭 경은 가시나무 성의 자작으로 임명되었고, 정통성 전쟁 시절부터 함께한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각각 바위성과 가시성의 남작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호른 경, 매튜 경, 마튼 경 등은 프란시스 시티의 저택과 동부 평야의 목장을 하사받았다.
소소한 불만은 있으나 대체로 만족했고, 그런 까닭에 로벨이 주관하는 첫 토너먼트를 축하하고자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머를 브릭 자작! 오랜만에 보니 신수가 훤하시오.”
“별말씀을 다 하시오, 바이란 남작. 오? 낯빛이 아주 좋소이다, 켈트 남작.”
“...어디 자작만 하겠소?”
머를 브릭 경은 유치할 정도로 작위에 악센트를 주었다. 켈트 경 이하 봉신들은 웃음을 참으며, 혹은 마지못해서 머를 브릭 ‘자작’이라 불러주었다. 우습긴 해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름뿐인 기사 가문 출신으로 기약 없는 종자 노릇을 하다가 오늘날 성과 마을을 하사받고 자작이 되었으니 진심으로 기뻐할 만했다. 로벨만큼은 아니어도 볼탄 반도 역사에 기록될 대단한 출세였다.
머를 브릭 경을 자작으로 임명한 것은 로드릭 가문에 충성한 첫 번째 기사인 이유도 있지만, 브릭 경의 영지인 가시나무 성이 검은 숲과 볼탄 반도의 접경지역인 이유도 있었다. 로벨이 매번 돕기 힘든 만큼 스스로 기사를 거느리고 성과 마을을 보호해야 했다.
“주군께서 오셨습니다.”
로벨이 계단을 오르자 한껏 멋을 부린 기사들이 일어나 일제히 목례했다. 로벨은 손짓으로 인사를 받고 자리를 권했다. 사회성이 좋은 기사들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부했다.
“정말 대단한 시합이었습니다.”
“그랜드 챔피언 자리는 한동안 주군의 것이겠군요.”
첫 시합의 기사가 로벨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로드릭 가문 깃발을 휘날리며 시합한 것 마냥 모두가 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소?”
로벨의 떨리는 질문에 기사들은 기사답게 껄껄 웃었다.
“볼탄 반도에서 그런 창 솜씨를 보이는 기사가 주군 말고 누가 있습니까.”
“게다가 호른 경의 투구가 아닙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로벨은 볼을 살짝 붉혔다. 아랫사람 앞에서 재롱을 부린 느낌이었다.
“주군의 시합을 볼 수 있으니 심심하지 않겠습니다.”
로벨의 마상창은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있었다. 상대 기사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유쾌하고 통쾌한 시합이었다.
그러나 로벨이 아니어도 심심한 마상시합은 아니었다. 지루한 두 번째 시합과 평이한 세 번째 시합을 지나, 심상치 않은 네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동 코너! 서방 세계를 제패하러 온 동방의 야만 기사! 더스틴 폴라 경!”
지친 광대가 소개가 짧게 읊었다. 이처럼 소개가 짧은 것은 무명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기사의 특징이었다. 로벨은 얼굴을 싸매고 있다고 문뜩 자세를 바로 했다.
“저 기사는...”
어린 집사의 명령을 받은 마녀 키르케가 쪼르르 달려와서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왜요? 왜요? 기사님이 아는 기사님이에요?”
로벨은 마녀의 손을 치우고 진지하게 속삭였다.
“기사 종자가 없어. 정말 가난한가 봐.”
“......”
로벨은 네 번째 시합에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정말 기사 종자 때문은 아니었다.
‘더스틴... 더스틴 폴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로벨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로벨의 시합처럼 한 번에 승부가 났다. 시합장은 또다시 함성으로 뒤덮였다.
“저건 대체... 뭐 하는 기사지?”
“허!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로벨의 기사들조차 감탄했다. 동방에서 온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은 랜스를 제대로 올리지도 못하고 머리를 가격 당해 낙마했다. 지나가는 농부에게 갑옷을 입히고 출전시켜도 나을 듯한 시합이었다. 그 순간, 로벨의 머릿속 일기장이 과거 한 지점에 이르렀다.
“하얀 숲... 둠 노릭스 후작... 나보다 강한 기사...?”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것에 실려 나가는 더스틴 폴라 경을 내려다보았다. 기억이 떠올라 기쁜 동시에 매우 한심해졌다. 그래서 못 참고 한 마디 던졌다.
“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