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공작
267화. 공작
“세일 호-! 세일 호-!”
땡땡땡-! 땡땡-!
로벨은 우렁찬 종소리를 흘려들으며 의상을 정리했다. 어린 집사가 실을 꿰매며 거들었지만, 손끝에 집중하지 못해 자꾸 다시 묶어야 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타박하지 않았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포비아 왕국의 수도 포클랜드 시티는 꿈 많은 소년소녀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우와, 멋지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꼭 쥐고 감탄했다. 수십 척의 배가 항구 주위를 오가고, 수백 명의 인부가 부둣가를 어지럽히며, 수천 개의 붉은 기와지붕이 울창한 숲처럼 펼쳐졌다. 거장이 그린 한 폭의 풍경화 같으면서도 그림으로 알 수 없는 생동감 있었다.
골목마다 빵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닿지 못하는 가장 높은 곳에 샘 포클의 왕성과 대성당의 종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인간의 작은 손이 쌓아 올렸다고 믿기지 않는 웅장한 도시였다.
“이렇게 보니까 포클랜드도 아름답네요.”
포클랜드 시티를 수차례 방문했지만, 바다에서 바라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세상에서 늑대성을 가장 사랑하는 로벨조차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과 부선장 다음으로 권한이 많은 일등항해사가 뱃전에서 깃발을 흔들었다. 선원 사이에서 통용되는 수기 신호였다. 잠시 뒤, 부두 관리인이 비슷한 신호를 보내왔다. 입항을 허락하는 신호였다.
백상아리 호 선장이 머리카락보다 풍성한 수염을 쓸어 만지며 명령했다.
“1번 부두에 도크한다.”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번 부두는 대체로 외곽에 자리한 군항이었다. 어선과 상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2, 3, 4번 부두보다 접근이 쉬워 항해사가 좋아했다.
물론, 접근이 쉬운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대포와 발리스타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할버드, 파이크, 버디슈 등 중병기를 소지한 시티 가드가 삼삼오오 돌아다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목을 걸치고 요새화된 항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쟁을 치르는 것이 기사의 본업이라, 나라면 어찌 공격할지, 혹은 어떻게 수비할지 상상했다.
그 사이 백상아리 호 외 2척의 갤리선이 노를 저어 일렬로 정박했다. 물살을 가르며 좌르르-올라가는 18개 노가 인상적이었다. 채찍질의 성과인지, 한동안 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마지막 동작이 기운찼다.
“영주님, 도착했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갑판에서 잠시 기다렸다.
로드릭 깃발을 확인한 부두관리인이 왕성으로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로벨의 명성과 직위, 그리고 방문 목적을 생각하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마중 나올 것이다. 로벨을 수행하는 울프 용병단도 무기와 갑옷을 점검하고 고용주의 위엄을 드높였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로벨은 1시간도 기다릴 수 있다는 듯 태연했지만, 잔걱정이 많은 어린 집사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로벨 로드릭을 볼탄 반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주인을 배신한 늑대는 상종하지 않겠다?’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로벨이 검은 숲과 볼탄 반도에서 수차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포클랜드에서 정치활동에 매진했다. 그 결과 각 지방 제후들은 로벨의 편이 되었지만, 수도의 귀족들은 프란시스 가문과 친분을 쌓았다.
‘만약 우리 영주님을 볼탄 반도의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린 집사는 짧은 시간 101가지 무력시위를 구상했다. 왕성 주변에 울프 용병단을 주둔시키는 시위부터 포스트 포레스트에 봉신들을 소집하는 시위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포클랜드의 닳고 닳은 귀족들은 창과 갑옷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구시대의 기사가 아니었다. 로벨이 수도의 귀족과 친하지 못한 것보다 수도의 귀족이 로벨과 친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영주님, 누가 옵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외눈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샘 포클의 왕성으로 이어진 주도(主道)로 사두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윤기가 흐르는 말과 예술품에 가까운 마차가 보통 신분이 아님이 알려주었다.
“저 녀석들은 뭐야?”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사두마차를 따라 깃발 달린 할버트를 꼬나든 스무여 명의 병사가 따라왔다. 앞뒤로 챙이 바짝 올라간 모리안과 허벅지까지 감싸는 정교한 하프 아머가 대단히 화려했다. 전력질주에 가까운 속도에도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 결코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다.
“왕성 수비대 같은데?”
“뭐라고?”
왕성 수비대. 칼을 차고 피를 보는 삶을 업으로 삼은 무사에게 최고의 우상이었다. 물론, 기사가 되어 영지를 하사받는 것이 최고의 성공이지만, 기사 가문이 아니면 기사가 될 수 없으니 사실상 꿈같은 일이고, 국왕이나 제후에게 종신고용 되어 사설 용병이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로벨의 사설 용병인 울프 용병단도 워너비 용병이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국왕의 호위병인 왕성 수비대였다. 급료, 명예, 직위 등등은 둘째 치고, 매년 두 자릿수가 죽어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히 선망할 만했다.
“진짜 부럽다...”
“아서라. 네놈들은 받아주지도 않는다.”
펄프 대장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흉내쟁이 퍼시발이 발끈해서 따졌다.
“우리가 뭐? 어째서?”
“쟤네 장비를 봐라. 전부 자유민 출신이다.”
“임마! 기사 나리가 듣고 있잖아! 적당히 해!”
허풍쟁이 제이콥이 윽박지르자 울프 용병단은 아차해서 로벨의 눈치를 살폈다. 로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안절부절못했다.
“그, 거시기, 기사 나으리, 그게 아니라...”
“울프 용병단이 최고야! 암! 그렇고말고!”
“누가 국왕놈 뒤치다꺼리한다고 했냐! 누구야!”
“쉿! 쉿! 닥쳐요!”
어린 집사가 시끄럽게 떠드는 울프 용병단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조용히 시켰다. 각반이 부실한 발냄새 베커가 비명을 질렀다.
“으억! 뭐요? 왜 때리오?”
“아, 좀 닥치라고요! 왕성 수비대를 알면서 왕성 수비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요?”
“왕성 수비대니까 왕성을 지키고... 고용주를 지키고...”
왕성 수비대의 고용주가 누군지 떠올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히이이익! 그럼 저기에?”
로벨은 사두마차가 도착하기에 앞서 부두 앞으로 걸어갔다. 정신을 바짝 차린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가 좌우에서 보조를 맞췄다. 네일 공국 출신의 거구들이라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뒤처진 용병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사열했다.
로벨의 의도를 읽은 건지 마부가 정확히 로벨 앞에 정차했다. 로벨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오! 로벨 로드릭 후작! 궁중도 아닌데 과한 예가 아니오? 일어나시오! 어서 일어나요!”
마차 문이 벌컥 열리고 마차의 주인이 구르듯이 뛰쳐나왔다. 오랜만에 보았으나 낯설지 않았다.
“Your majesty.”
로벨은 데이브 국왕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왕위계승전쟁에 이어 두 번째 충성의식이었다. 그러나 당시와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는 볼탄 반도의 주인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국왕의 반응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국왕은 로벨의 두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키 차이가 있어서 조금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포옹 비슷한 것도 시도했다.
“그대는 나의 벗, 나의 은인, 나의 스승, 로벨 로드릭 후작이 아니오. 우리 사이에 허례는 필요하지 않소. 아니지.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하였소.”
국왕은 로벨을 놓아주고 부둣가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옛 신과 샘 포클 폐하의 이름으로, 포클랜드의 후작 로벨 로드릭을 볼탄 반도의 공작으로 임명하노라!”
옛 신의 사제도, 문무백관도 빠진 작위 수여식이었다. 전례 없는 행위지만, 안 된다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어린 집사가 재빨리 ‘Long live the king’을 외쳤다.
“국왕 폐하 만세! 로벨 로드릭 공작 만세!”
어린 집사가 제때 선창한 탓에 눈치가 부족한 용병과 선원도 어색하지 않게 따라 할 수 있었다.
“국왕 폐하 만세! 로벨 로드릭 공작 만세!”
“포비아 국왕 만세! 볼탄 반도 공작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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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걱정한 충성맹세가 의외로 손쉽게,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로벨에게 잘 보이고자 각계각층의 고위인사가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왔다. 어린 집사가 계획한 열흘 일정이 사흘 만에 끝났다.
포클랜드에서 로벨이 가진 권력과 명성은 로벨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비에 후작을 위시한 포클랜드의 기사들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검은 숲과 볼탄 반도를 모두 제패한 영웅이 등장하였으니, 국왕쪽 세력이든 귀족원 세력이든 교회 세력이든 일단 친해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포클랜드의 유력 가문 연줄이 절실한 어린 집사에게 나쁘지 않았다. 장미성에서 쓸어온 7만 페닝 상당 재화 중 절반은 국왕에게 진상하고, 나머지 절반은 귀족과 교회에 나눠주었다. 그야말로 오고 가는 금화 속에 피어나는 정치인맥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이름도 기억 못할 수많은 대신, 장관, 상인, 사제, 수도원장을 만난 끝에 한 가지 정의를 규정할 수 있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동쪽과 볼탄 반도 남쪽은 로벨 로드릭 공작의 적법한 영토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왕족도, 공신도 아닌 일개 세습 기사가 한 지방을 다스리는 공작이 된 것이다.
어린 집사가 뒤통수를 퍽퍽 긁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샘 포클은 3개 지방을 정복해서 정복왕이 되었는데, 그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국자를 휘젓는 마녀 키르케와 칼을 손질하는 펄프 대장이 동작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웃음꽃이 활짝 폈는데요?”
“그것보다 정복왕하고 비교하는 것이 괘씸하잖소. 정복왕‘급’이 아니면 비교 대상이 없다는 자랑 아니오?”
“이히힛! 티 났어요?”
“응. 아주 많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로벨 로드릭 공작과 그 측근들은 놀랍게도 허름한 여관방에 옹기종기 모여 보리빵을 찢고 있었다.
방구석에 금장식 가구와 은장식 촛대가 쌓여있지 않았으면 떠돌이 용병 패거리 소굴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아니, 금은보화가 굴러다녀도 크게 한탕 하고 돌아온 도둑놈 소굴 같았다. 보리죽을 쑤어 나눠 먹는 꼴이 워낙 궁상맞아 위대한 볼탄 반도 공작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험! 험! 영주님, 간략히 구두보고 올릴게요.”
“응?”
“프란시스 항구에서 가져온 7만 페닝 중 6만 3천 페닝을 사용했어요. 시세변동을 따지면 2, 3천 페닝 정도 오차가 있겠지만, 대충 그래요.”
“아아...”
금전감각이 풍부한 용병들은 장탄식을 터트렸다. 3대가 놀고먹을 엄청난 액수였다. 어린 집사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귀족들한테 선물 받은 것이 3만 7천 페닝쯤 되어요. 다시 말해 4만 4천 페닝의 여유 자금이 남았어요! 와아! 박수!”
“오오!”
셈이 단순한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페닝이 남았다는 말에 일단 기뻐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면 돼?”
로벨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린 집사가 기쁜 나머지 실소했다.
“엥? 무슨 말씀이세요?”
로벨은 집에 못 간다는 사실에 조금 풀이 죽었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 아니야? 또 할 일이 있어?”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마녀 키르케에게 배운 듯한데 아주 자연스러웠다.
“국왕 폐하가 공작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연회를 개최할 거예요. 거기 참석하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