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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66화 (266/605)

266화. 인어

266화. 인어

태풍은 첫째 날 지나갔지만, 태풍이 흘리고 간 비구름이 워낙 사나워서 둘째 날도 출항하지 못했다.

로벨 일행은 ‘있을 것은 다 있으나 볼품이 없는’ 인어의 섬 여관에 장기 투숙객이 되었다.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혔지만 큰 말썽은 없었다. 사이좋게 부둥켜안고 자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서로에게 기겁해서 할퀴고 때린 것과 외팔이 더치가 정수리를 깬 범인을 잡겠다고 씩- 씩- 거리는 것과 허풍쟁이 제이콥이 밤에 오줌 비슷한 걸 쌌다는 것 말고 조용했다.

“오줌 비슷한 게 뭐야?”

“그, 그런 게 있어요! 영주님은 몰라도 돼요!”

어린 집사가 소리를 빽! 지르고 도망갔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귀를 후비며 ‘왜 저래?’, ‘쟤도 오줌싸개예요?’ 속닥였다.

아무튼, 로벨 일행은 오랜만에 쉬게 되어 좋아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좋을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편안함이 지루함으로, 아늑함이 갑갑함으로 바뀌었다.

셋째 날 아침이 밝자 모두가 창밖 날씨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비가 그쳤다.

“오!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특히나 가장 좋아한 것은 기사와 마녀와 서른 명의 용병을 수발든 술집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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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오랜만에 품위 있는 의상을 갖춰 입었다.

소매로 갈수록 품이 넉넉한 고풍스러운 우플랑드와 허벅지 근육을 자랑할 수 있는 짤막한 가죽 브레와 가터링이 필요 없는 매끄러운 쇼오스와 마녀 키르케의 공작 깃털로 장식한 캐벌리어 모자까지 완벽한 귀족의 자태였다.

“이제 끝났어요! 정말 멋져요!”

어린 집사가 옆구리 매듭을 마무리한 후 감탄했다. 로벨은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해서 뭘 입어도 기품이 있었다.

“멀리 나갈 것도 아닌데...”

“그래도 볼탄 반도 주인이 체면이 있죠!”

로벨은 소드 벨트를 골반과 허벅지에 감고,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좌우에 꽂아 넣은 후 객실문을 열었다. 먼저 준비를 마친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공무라도 보러 가는 것 같네요.”

“저도 가요! 저도! 아악! 내 발가락!”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와 가죽 부츠를 챙겨서 헐레벌떡 쫓아왔다. 어린 집사는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부렸다. 그 덕분에 동행을 반대할 사람이 없어졌다.

로벨은 수행원을 모두 이끌고 술집을 나왔다. 사흘 만에 외출이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인어의 섬은 세수를 한 꼬마아이처럼 뽀얗고 아름다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땅은 배설물과 쓰레기가 말끔히 쓸려나가 쾌적했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짧게 토했다.

“걸을까?”

울프 용병단은 시시덕거리며 로벨을 따라갔다. 펄프 대장은 주둔지 순찰이라 우겼지만, 양심껏 말해 출항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 때우는 동네 마실이었다. 길 잃은 새끼 양에게 먹이를 주고 물지게 나르는 처녀에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 그 증거였다.

“오, 여자다! 여자야!”

“꺄아아-!”

인어의 섬 주민은 울프 용병단의 나들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해를 끼친 것은 없지만, 창칼과 쇠뇌로 무장한 용병들을 살갑게 대하기는 간이 작았다.

“젠장! 내가 뭘 어쨌다고 도망치냐?”

“니 얼굴을 봐라. 나라도 도망가겠다.”

“오랜만에 여자랑 대화 좀 해볼까 했더니만...”

“누구처럼 꿈에서 만나면 되잖아?”

흉내쟁이 퍼시발이 허풍쟁이 제이콥을 힐끔거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인내심이 부족한 허풍쟁이가 결국 병장기를 꺼내들었지만, 자신만큼이나 숙련된 용병 스물아홉 명을 당해내지 못해 즉각 제압되었다.

“여자요? 여자가 왜요?”

마녀 키르케가 납작해진 허풍쟁이를 굽어보며 물었다.

“그, 그런 게 있소!”

“저도 여자에요. 에헴!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쪽이 무슨 여자요? 그냥 괴물 마녀지.”

“뭐라고요?”

울프 용병단의 소란에 마녀 키르케까지 끼어들자 한층 시끄러워졌다. 어린 집사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쳤다.

“으이그! 시끄러워서 같이 못 다니겠네! 전부 가요! 저리 가!”

“가라니? 어딜 말이요?”

“아, 몰라요! 뭉쳐 다니지 말고 각자 놀아요!”

어린 집사가 짜증을 내며 로벨의 팔을 끌어당겼다.

“영주님, 저 멍청이들 놓고 가요.”

“응? 어디로?”

“어디든 저 멍청이들이랑 있는 것보단 낫겠죠.”

어린 집사는 펄프 대장에게 사고 치지 말라고 윽박지른 후 로벨을 끌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허풍쟁이와 마녀 키르케는 너 때문에 기사 나리가 떠났다고 서로를 타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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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인어의 섬 모래사장을 걸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푸른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바위섬이 보기 좋게 흩어져 있고, 높은 하늘에는 사냥 나온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다니며, 해변의 모래는 고운 소리를 내며 발끝에 갈라졌다. 큰 도시의 지저분한 항구만 보다가 반짝이는 모래로 덮인 해변을 걸으니 색다르고 재미있었다.

“이런 곳에 저택을 짓고 귀족과 귀부인에게 여름 별장으로 대여해주면 돈 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웃은 거야?”

자나 깨나 돈 벌 궁리하는 어린 집사였다. 로벨은 ‘역시 우리 집사야’ 어쩌고 중얼거린 후 상대했다.

“배 타는 것은 위험하잖아?”

바다에는 해적, 풍랑, 전염병, 암초 등등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다에 나오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여름을 즐기기 위해 배를 타고 섬을 가는 것은 얼토당토않았다.

“항해기술이 좋아지면 또 모르죠. 돈을 벌려면 항상 20년, 30년 뒤를 생각해야 한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볼 게 없잖아. 조용하고 예쁘긴 하지만...”

로벨은 뼛속까지 기사라 조용하고 예쁜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반박했다.

“볼 게 왜 없어요? 음... 바위도 있고, 갈매기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인어도 있고...”

“...인어?”

주변을 훑던 시선이 딱 고정되었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암초에 긴 머리를 한 여인이 있었다.

물놀이를 하는지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었다. 그나마 젖은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이, 이, 이...!”

어린 집사가 복합적인 이유로 말을 잇지 못했다. 유라피아 대륙인 정서상 가슴을 보이는 것에 거부감이 덜하지만-그 대신 다리를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럽다- 아무리 그래도 성숙한 여인의 알몸을 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진정해. 진정해. 별거 아니야.”

로벨이 어린 집사의 등을 두드렸다. 어린 집사가 사춘기를 맞이한 한창때 소년이란 점을 제외해도 충분히 놀랄만했다. 왜냐하면 골반 아래쪽이 별개의 생물이기 때문이었다.

“완전 별거잖아요! 인어다앗!”

인어 아가씨는 어린 집사의 존재를 알아채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어리를 닮은 듯한 꼬리도 함께 흔들렸다. 바닷물에 젖은 비늘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을 냈다. 로벨은 얼떨결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랐다. 로벨은 육지 사람이라 바다의 신비 인어가 고블린이나 오우거보다 훨씬 놀라웠다. 그래서 진지하게 고찰했다.

“비린내 나지 않을까?”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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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어린 집사는 인어를 하염없이 구경했다. 전설과 달리 노래를 부르거나 선원을 유혹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비치는 햇볕을 실컷 쬐다가 꼬리가 마를 때쯤 다시 손을 흔들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시원한 물보라와 함께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와아... 인어 처음 봤어요. 세이렌일까요? 아니면 머메이드?”

“노래 안 한 거 봐서 머메이드 아닐까?”

“세이렌도 맨날 노래 부르진 않을 걸요.”

“왜?”

“목 아프잖아요.”

“그럼 언제 노래해?”

“관객이 있을 때?”

“아하? 그래서 배가 지나갈 때 노래하는구나.”

로벨과 어린 집사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부둣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인어의 섬에서 인어를 보았으니 볼 것은 다 본 셈이었다.

초승달의 윗부분을 완만하게 돌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부두에 도착했다. 백상아리 호 선원들은 겁먹은 양을 달래서 갑판에 올리고, 무거운 술통을 굴려서 선창에 내리고 있었다. 로벨은 선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뒤를 따라갔다.

“오! 선주님 오셨습니까?”

주갑판에 오르자 백상아리 호 선장이 인어의 꼬리만큼이나 반짝이는 머리로 맞아주었다.

“저것만 실으면 출항준비가 끝납니다.”

예정이 3일 늦어진 만큼 3일 치 식량과 식수를 다시 채웠다. 로벨은 갑판 위에 쌓인 말린 생선과 살찐 양떼를 보며 어린 집사의 팔뚝을 두드렸다. 주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만큼 잘 아는 집사는 바로 해명했다.

“돈 주고 샀어요.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요.”

전시도 아닌데 무턱대고 징발하는 것은 평판에 좋지 않았다. 어린 집사도, 펄프 대장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봐라! 봐! 기사 나리가 먼저 오셨잖아!”

“어이쿠, 영주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 일행이 도착했다. 펄프 대장은 고용주보다 늦게 와서 송구한 듯 굽신거렸지만, 대부분은 또 다시 배를 타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로벨은 울상을 짓는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빠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숫자에는 약해도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수년간 함께한 울프 용병단의 핵심 멤버는 모두 기억했다.

“이탈한 놈은 없습니다.”

펄프 대장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러자 빼빼 마른 선원들이 널빤지를 끌어올렸다. 이제 인어의 섬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럼 출항해도 되겠습니까?”

로벨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은 항해사와 간판장을 불러 전문용어와 욕설을 반씩 섞인 명령을 내렸다. 잠시 뒤, 수레보다 커다란 닻이 올려지고, 거미 다리 같은 노가 물속으로 내려갔다. 채광창 아래로 ‘영차- 어기영차-’ 소리가 들리더니 36개 노가 살아있는 생물의 다리처럼 움직였다.

“역시 다리가 있는 게 좋지.”

로벨은 세이렌인지 머메이드인지 끝내 밝히지 못한 여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마녀 키르케에게 물어뜯긴 정수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섬 주민들한테 들었습니다요. 인어가 살던 것은 100년 전쯤이고, 지금은 인간만 산다고 합니다요.”

“응?”

“30년 넘게 물질한 어부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합니다요. 아니! 인어의 섬인데 인어가 없는 게 말이 됩니까요?”

허풍쟁이는 인어를 보지 못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본 건 뭐야?’

‘그, 글쎄요?’

로벨은 기억에 생생히 남은 해변의 인어를 떠올렸다. 그녀도 요정이나 윌 오 위스프처럼 인지의 생물이었다. 그런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운이 억세게 좋거나 인지의 세계에 한 발 내딛은 것이었다.

‘좋은 일인가? 아니면...’

로벨은 마법에 무지했다. 인간이 인지의 세계와 가까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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