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증명
얼음투성이 북해 끝자락에서 삭풍이 불어와 꽁꽁 얼어붙은 개울을 보듬고 적막한 마을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 남쪽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야속한 겨울바람에 맥없이 흩어진 굴뚝 연기가 다시금 슬그머니 뭉쳐 구름을 따라 흘러갔다. 아늑한 실내 열기에 소리 없이 녹아내린 처마 위 눈송이가 세상의 끝에서 방울방울 매달려 하얗고 투명한 결정이 되었다.
“이놈의 고드름!”
어린 집사가 기나긴 겨울의 역사가 담긴 얼음 결정을 부러트려 패대기쳤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야와 이야카가 혹시나 해서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 맛도 안 나는 얼음 덩어리임을 알고 원망 서린 눈으로 어린 집사를 올려다보았다.
“뭐? 왜? 어쩌라고? 아침밥 줬잖아?”
아야와 이야카는 호박 같은 황동색 눈으로 작은 친구를 흘겨보고 어슬렁어슬렁 떠나갔다.
한때는 야생성이 남아 있는 늑대 남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전투마를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의 우렁찬 발차기 소리와 아야의 처량한 하울링을 들은 후 근심을 털었다. 말이란 종이 고기보다 곡물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왜 또 화가 났어요?”
마녀 키르케가 뒷짐 지고 기웃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가죽을 둘러서 뒤뚱뒤뚱 걷는 새끼 곰 같았다. 추위는 너끈히 막을 수 있지만 주변인의 시선은 막지 못하는 차림새였다.
“그것 좀 벗어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힛! 전혀요.”
어린 집사는 한숨을 쉬었다. 마녀의 기행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화 안 났어요.”
“화났는데?”
“안 났다니까요! 짜증이 난 거지!”
마녀 키르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해보란 듯 기다렸다. 어린 집사는 ‘칫!’ 소리 내고 짐짓 화를 풀었다.
“장미성에서 아무 소식이 없어요.”
어린 집사만이 아니라 생각이 많은 로드릭 가문 사람 모두의 걱정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하는 위로를 다시 끄집어냈다.
“겨울이잖아요?”
“그래도 전령이 못 올 이유는 없죠.”
어린 집사는 부지깽이로 처마 아래 고드름을 긁어냈다. 로벨은 그냥 두라고 했지만 어린 집사는 성격상 가만두지 못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에는 도끼로 손봐야 할 만큼 커질 것이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에요.”
“둘이요?”
“직접 와서 자비를 구하라는 거죠. 영주님의 충성심을 확인할뿐더러, 장미성의 위엄이 높아져 다른 봉신들도 헛짓을 못 할 테니 일석이조 효과죠.”
“기사님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자비를 구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대놓고 요구하지 않고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거죠.”
마녀 키르케는 어렵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다른 하나는요?”
“버팅거 시티를 바치라는 거죠.”
“에엥? 설마요?”
“세금의 이유가 버팅거 시티 때문이잖아요. 실제로 영주님이 버팅거 시티를 차지해서 경계하고 있고요.”
“그건 말도 안 돼요! 기사님이 힘들여 얻은 건데 왜요? 왜? 염치도 없어요?”
“말도 안 되고, 소리도 안 되죠. 게다가 이미 조단 랭스터 경에게 주었는데 뺏을 수도 없고요.”
어린 집사의 말이 모두 맞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늑대성과 장미성의 앞날이 장밋빛은 아니란 것이다. 어린 집사는 팔이 아픈 듯 부지깽이를 내려 지팡이처럼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로벨이 있는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영주님은 무슨 생각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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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린 집사나 펄프 대장처럼 걱정이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에릭 공작이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깨끗해! 좋아!”
로벨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뿌듯하게 마네킹을 보았다. 아침부터 닦고 기름칠한 필드 아머가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아 흠집이 난 곳이 조금 있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멋져...”
로벨은 사랑에 빠진 눈으로 야금술과 인체공학의 정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쪽도...”
로벨에게는 갑옷이 3세트 있었다. 하나는 증조부가 장만한 플레이트 앤 메일의 컴포지트 아머, 하나는 첫째 오빠가 기사 종자로 지낼 때 사용한 브리간딘, 그리고 마지막이 로벨이 거금 주고 맞춤 제작한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세 가지 갑옷을 나란히 진열해 놓으니 심장이 뜨거워지고 혈액순환이 유난히 잘 되었다.
“역시 멋있어.”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성, 마을, 용병, 농민, 금화, 명성 등등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기사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칼과 갑옷이었다.
똑똑-
“주군,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늑대성에서 이처럼 정중히 노크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호른 경? 들어오시오.”
로벨은 먼 곳에서 찾아온 호른 경을 어제 만난 것처럼 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충직한 기사 호른 경은 로벨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닷새에 한 번꼴로 찾아왔다.
어린 집사는 영주가 저리 싸돌아다녀도 되냐고 구시렁거렸지만,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한 두름 가져오자 적극적으로 환영하기 시작했다.
호른 경은 침실 한쪽을 차지한 무기와 갑옷을 슬쩍 훑어보고 목적을 밝혔다.
“며칠 전 성 남쪽에서...”
아니, 밝히려고 했다. 로벨의 초롱초롱한 두 눈을 마주하기 전에 말이다.
호른 경의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왜 저러지? 내가 반갑나? 귀엽잖아? 강아지 같다? 강아지치고 큰데? 잠깐! 이게 아니잖아!’ 3시간 같은 3초 뒤에 가까스로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가, 갑옷이 훌륭하군요. 새것 같습니다. 못 보던 것도 하나 있군요.”
“그렇소? 그렇소?”
로벨의 얼굴 기쁨과 만족이 떠올랐다. 호른 경은 정답을 맞힌 자기 자신을 칭찬한 후 사랑하는 주군의 갑옷 자랑을 경청했다.
로벨은 평소보다 활기차게 로드릭 가문의 역사가 깃든 갑옷을 소개한 후 너무 체통 없이 떠들었나 싶어 얼굴을 붉혔다. 호른 경은 자상한 첫째 오라비처럼 웃었다.
“실로 로드릭 가문의 역사라 할 수 있군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흠흠.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오?”
로벨의 활달한 모습에 잠시 목적을 잊었던 호른 경은 간신히 기억을 끄집어냈다.
“난파선을 보았습니다.”
“난파선?”
로벨은 생뚱맞은 단어를 잠깐 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호른 성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곳에 바위 곶이라 불리는 해안 절벽이 있습니다.”
흔해 빠진 지명이라 어느 곳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볼탄 반도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곶이 두 자릿수는 되었다. 유라피아 대륙 전체로 보면 세 자릿수가 넘을 것이다. 호른 경도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부를 불러 물어보니 그곳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배가 잘 다니지 않는다 합니다.”
“그런 곳에 왜 난파선이 있소? 혹시 오래된 것이오?”
“근처 농부가 사흘 전 처음 보았다 합니다.”
“사흘 전이면...”
“이 계절이면 살아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로벨은 겨울 바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선원들을 위해 짧게 기도하고 재차 물었다.
“경의 영지에서 생긴 일이면 경의 재량으로 처리하시오.”
호른 경은 흐뭇한 감정을 잠시 치우고 짐짓 심각하게 보고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바위 곶은 주군의 영지와 페르젠 가문의 영지가 맞닿은 곳이라, 페르젠 가문에서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로벨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핑계거리를 가지고 놀러 온 것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난파된 배의 정체가 문제입니다. 지형이 험해 접근하지는 못했으나, 프란시스 가문의 선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별 볼 일없는 곳에 별 볼 일없이 좌초된 갤리선 한 척에 볼탄 반도 최고의 권력자들이 엉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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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에는 통일된 법(法)이 생길지도 모르나, 로벨이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법이란 것이 다양하고 다채로워 골라 쓰는 맛이 있었다.
“샘 포클 폐하가 지정한 영토법에 따르면 만(灣)으로 분류된 이쪽 해안은 우리 영주님의 땅이오.”
“무슨 소리? 볼탄 반도의 관습법으로 주인이 있는 성에 가까운 우리 후작님의 땅이오!”
“허나! 교회법으로 따지자면...!”
“겔몬 족의 전통법으로 볼 때...”
로벨은 법리학자의 설전에 두통을 느꼈다. 페르젠 백작이 보낸 젊은 기사와 프란시스 가문의 대리인이란 늙은 사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만! 그만 하시오!”
로벨이 참다못해 모든 입을 다물게 했다. 한창 열이 오른 학자들은 불만스러워했지만, 전문가답게 법보다 칼이 가까움을 알고 한발 물러났다.
로벨은 프란시스 가문에서 보낸 옛 신의 사제를 슬쩍 보았다. 가문의 일에 기사도 아니고 관리도 아닌 사제를 보낸 것이 의외였다.
‘아니, 뻔한 건가?’
고기잡이 어선이 아니라 수십만 페닝의 교역선이었다. 로드릭 가문과 냉전(?) 중이라 해도 소유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보낸 것이 가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옛 신의 사제였다.
“난파선의 권리보다 중요한 것이 난파된 이유일 것이오. 해적이나 몬스터, 혹은 선상반란이 원인일 경우 그에 따른 후속책을 마련해야 하니 우선 조사를 시행했으면 하오.”
로벨의 정론이 간신히 첫 동의를 끄집어냈다.
난파선을 발견한 것도, 프란시스 가문과 페르젠 가문에 소식을 전한 것도, 그리고 지금의 회의를 주도하는 것도 로벨이었다. 두 가문의 대리인은 권리를 주장함에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로벨은 이안 선장을 제때 불러올 수 있을까 고민하며 되는대로 말했다.
“우리 쪽에서 사람과 장비를 준비하겠소. 시일이 좀 걸릴 테니 아랫마을에서 며칠 머물도록 하시오.”
“하지만...”
“아니면 두 가문에서 조사하겠소? 그렇다면 본인은 참관인을 보내도록 하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결정하시오.”
젊은 기사와 늙은 사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바위 곶은 어선도 드나들기 힘든 험한 곳이라 했다. 괜히 조사하다가 추가피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해를 감수하고 조사했는데 아무 소득이 없으면 일을 맡긴 주인에게 송구해졌다.
“경의 의견을 따르겠소.”
“저 역시 그리하겠습니다.”
어린 집사가 눈치껏 허풍쟁이 제이콥을 불러 손님을 모시도록 조치했다. 성 안에 머물게 할 신분이 아니라 성 아래 여관으로 보냈다. 겨울이라 장사가 안 되는 지미와 루시 여관이 모처럼 북적일 것이다.
로벨은 주케토를 고쳐 쓰는 옛 신의 사제를 불러세웠다.
“잠시만. 사제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로벨의 부름에 프란시스 가문 사제는 성호로 대답했다.
“저는 옛 신의 가르침을 따라 가엾은 프란시스 가문의 선원을 보살피고자 온 늙은 지팡이일 뿐입니다. 세속의 일은 알지 못하니 후작님의 물음에 무엇도 답할 수 없습니다.”
로벨은 마주 성호를 긋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증명이 필요합니까?’
로벨은 이번 바위 곶 난파선 사건이 볼탄 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란 강한 예감을 받았다.
‘누가 누구의 편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254화. 난파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