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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52화 (252/605)

252화. 울타리

252화. 울타리

어린 집사의 고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고민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추수제 준비가 한창인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슬픈 일 다 잊고 마음 편히 쉬려는 초겨울 어느 날이기도 했다. 북쪽에서 몰아치는 찬바람을 거슬러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11만 7천 페닝이요?!”

어린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어감만 보면 칼에 찔린 느낌이었다. 심리적인 부분에서 칼 맞은 것과 유사하긴 했다. 로벨은 장미성의 인장을 재차 확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11만 7천 페닝을 세금으로 보내래.”

두 번 들어도 충격이었다. 어린 집사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와... 와! 미친 거 아니에요? 1만 7천 페닝을 빌려 달라고 해도 심각하게 고민할 텐데, 세금? 세금이요? 그냥 내놓으라고요?”

로드릭 영지가 커졌다고 하지만, 만 단위의 자금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붉은 산 전쟁과 동부평야 전쟁으로 지출이 상당했다. 이럴 때 10만 페닝이 넘는 세금을 바치라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럴까?”

금전감각이 부족한 로벨조차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어린 집사는 이마를 짚고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렸고,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를 부축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펄프 대장은 뭔가 아는 눈치였지만, 용병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 판단했는지 침묵했다.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는 그런 대장의 태도를 본받았다.

결국, 로벨의 의문에 답한 것은 추수제를 돕는다는 핑계로 열흘째 눌러앉아 있는 호른 경이었다.

“주군을 시험하는 겁니다.”

크고 작고 파랗고 까만 17개 눈이 호른 경이 향했다. 로벨은 낯선 단어를 낯설게 따라 했다.

“시험?”

“우선 요구한 금액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11만 7천 페닝. 과거에는 먹고 죽으래도 없어서 죽지 못 할 금액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로드릭 시장 세금이랑 북부대로 통행세랑 버팅거 시티 상납금이랑... 다 합치면 얼추 10만 페닝은 나올 것 같은데요...”

추가로 봉신들한테 세금을 걷고, 추경지 작물을 팔아치우면 아슬아슬하게 요구조건을 맞출 수 있었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 넣어야 하지만, 어떻게든 되는 액수였다. 어린 집사가 마녀 키르케의 부축을 뿌리치고 외쳤다.

“잠깐! 우리 영주님의 충성심을 시험한단 말이에요?”

호른 경은 불을 뿜을 기세인 작은 집사가 부담되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에릭 공작은 불안한 거다. 주군이 버팅거 시티를 장악했으니, 군사력으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프란시스 가문보다 못하지 않지.”

“너무 컸다... 싶은 거군요.”

펄프 대장이 쐐기를 박았다.

로벨은 얼굴을 찌푸리고 상념에 잠겼다. 수백 명의 기사와 싸우고, 수천 명의 적군을 무찌르는 것은 생각해 봤지만, 이런 문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호른 경이 방안을 제시했다.

“시험에 들었으니 응당 응해야 합니다. 우선 헨리 피터 상회장을 불러 페닝을 빌리시지요.”

어린 집사가 주먹을 꽉 쥐고 따졌다.

“그걸로 될까요? 내년에는 20만 페닝을 달라 할지 누가 알아요?”

“이것이 시험이라면 더 이상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집사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충성을 거두자는 속내를 꺼내지는 않았다. 이만한 일로 로벨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었다. 로벨은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편지를 쓸게.”

“헨리 피터 상회장한테요?”

“에릭 공작한테.”

“뭐라고요?”

“솔직하게.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고, 요구를 줄여 달라고 쓸 거야.”

호른 경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나도 알고 있소.”

로벨은 어린 집사의 오해와 달리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호른 경의 착각처럼 냉철하지도 않았다.

“주군과 나의 우정을 믿을 것이오. 아니, 믿어야 하오. 그리고 믿고 싶소.”

@

로벨은 프란시스 시티로 가는 여러 상단에 편지를 맡겼다. 여행 중에 유실될 가능성이 크기에 중요한 편지는 여러 루트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비용이 많이 나가지만, 11만 7천 페닝에 비하면 보리밭에 메추리알 하나 수준이었다.

로벨이 굳게 믿는 우정이 효력을 발휘한다 해도, 에릭 공작은 내뱉은 말이 있으니 체면치레를 위해 어느 정도 상납금을 요구할 것이다.

어린 집사는 금화와 은화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페닝을 긁어모았다. 가을에 수확한 작물은 겨울을 날 양만 남기고 팔아치우고, 겨울에 사용할 예산은 내년 봄으로 미루어 지출을 최대한 줄였다. 아야와 이야카의 식단도 고기에서 오래된 보리빵으로 바뀌었다.

“낑... 끼잉...”

“시끄러! 그냥 먹어! 아니면 숲에 가서 토끼라도 잡아오든가!”

아닌 게 아니라 애꾸눈 볼포스와 사냥꾼 찰드 형제를 불러 값나가는 여우를 잡아오라 닦달했다. 하지만 여우사냥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은 사냥을 핑계로 진탕 놀다 오는지도 모른다. 애가 타는 것은 어린 집사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황량한 성탑 위로 첫눈이 내렸다.

“아, 춥다 춥다 했더니 눈까지 오네.”

“올해는 좀 빠른데?”

늑대성의 성벽을 지키는 용병들이 어둑한 하늘을 향해 새하얀 입김을 뿜었다.

올해 첫눈은 이를 뿐만 아니라 양도 많았다. 저녁 늦은 시간 사부작사부작 내린 눈은 고요한 밤을 지나 수북이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뜬 로벨은 창틈으로 스며드는 하얀 아지랑이에 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창문을 열었다. 어스름한 새벽하늘 아래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컹! 컹! 컹컹!”

“크르릉-! 크릉-!”

아야와 이야카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연병장을 어지럽혔다. 주인을 닮아 나이를 먹어도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순수했다. 혹은 그냥 발바닥이 시려서 저러는지도 모르겠다.

로벨은 이불을 어깨까지 내리고 초를 촛농무덤으로 바꾸는 불을 손가락으로 꺼트렸다. 굵은 살이 굳게 박힌 손가락은 불꽃 한 줌에 끄덕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일까? 키르케일까?’

로벨은 침대맡에 걸어둔 소드 벨트를 챙겨 책상 앞으로 이동했다. 방문 밖에서 우당탕탕-! 쿠당탕-! 소리가 나더니 긴박함을 알리는 노크가 울렸다.

“영주님! 영주님!”

“아이참! 제가 먼저 왔잖아요!”

로벨이 허락하기도 전에 방문이 활짝 열리고, 낯빛이 상기된 소년소녀가 구르듯이 들어왔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칼을 쥐고 망토를 두른 로벨의 모습에 멈칫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로벨이 자상하게 인사하자 집사와 마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떠들었다.

“영주님! 밖을 보세요! 지금 밖에서!”

“함박눈이 왔어요! 함박눈이! 와아! 첫눈이에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늑대성에서 순수한 것은 늑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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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와도 로벨의 일과는 다를 것이 없었다.

체력단련과 검술훈련을 가볍게 하고, 보리빵을 끓인 걸쭉한 죽으로 배를 채우고, 어린 집사의 닦달에 밀린 보고서를 읽는 척하다가, 펄프 대장이 눈길에 넘어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쳤다.

“앗! 영주님! 어딜 가요! 이거 오늘까지 결재해야 한다고요!”

로벨은 어린 집사와 스릴 넘치는 술래잡기 끝에 간신히 아성을 탈출했다.

늑대성의 평범한 하루에 익숙해진 문지기들은 도망 나온 영주와 끌려 나온 전투마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기사 나리? 오늘도 무사히 빠져나오셨군요?”

“언덕길이 미끄럽습니다요. 조심하십시오.”

로벨은 하얀 얼굴로 끄덕이고 모닝스타의 고삐를 당겼다.

눈길에 사고를 당한 것은 펄프 대장만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계란과 양젖을 가지고 온 마을 아낙도 봉변을 당했고, 지름길을 고집하던 근무 교대자도 말썽을 일으켰다. 매해 일어나지만, 매번 고쳐지지 않는 사고였다.

로벨은 사고사례를 늘리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었다. 모닝스타는 이럴 거면 왜 데려왔느냐는 듯 콧김을 뿜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것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겨울...”

로벨은 모닝스타의 푸짐한 콧김을 흉내 내기 위해 입술을 둥글게 말아 입김을 뿜었다. 하얀 숨결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 회색 구름이 되었다.

“겨울이야.”

로벨은 그제야 계절의 변화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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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영주님?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펄프 대장이 걱정돼서.”

“하하핫! 어린 집사가 일을 시켜서가 아니고요?”

“...뜨끔.”

로벨은 의태어를 입으로 소리 내고 펄프 대장의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통나무를 듬성듬성 엮고, 흙으로 빈틈을 매운 네일 공국양식 오두막이었다. 겉보기에는 초라해도 외풍이 들지 않고 단열이 잘 되어서 화로 하나만 들여놔도 아늑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펄프 대장이 나무 밑동을 다듬은 간이 의자를 권했다. 의자 말고도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삐뚤삐뚤한 식탁, 과일을 담근 술통, 그을림이 가득한 냄비, 나무그릇과 국자, 숫돌, 손칼, 삭은 치즈와 보릿자루. 반올림해서 근 10년을 지낸 집이었다. 아내와 자식 말고는 없는 것이 없었다. 로벨은 괜한 생각에 헛기침하고 위로했다.

“대장이 없으면 울프 용병단도 없어. 아프지 마.”

로벨의 진심 어린 걱정에 펄프 대장이 껄껄 웃었다.

“늙어빠진 용병 나부랭이에게 과한 칭찬입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군요. 감사합니다.”

로벨은 꾸벅 인사하는 펄프 대장을 가만히 보았다. 펄프 대장 머리에도 하얀 눈이 내려 여름과 가을에 반짝이던 붉은 빛이 많이 사라졌다.

“내 밑에서 일한 지 10년째지?”

“정확히는 9년 조금 안 되지만, 비슷하게 맞췄습니다.”

“그럼 9년만 더 일해. 연금도 챙겨줄게.”

“그냥 죽을 때까지 일하라 하시지요?”

영주와 용병 사이에서 오고 가기 힘든 덕담이었다.

로벨과 펄프 대장은 맥주조끼를 손에 쥐고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조지 도트넘 자작을 혼쭐내준 일, 팔콘 요새의 성벽을 넘은 일, 맥켈런 남작의 큰 코를 눌러준 일 등등... 펄프 대장은 지난 무용담에 껄껄 웃다가 사레들린 듯 잔기침을 깔았다. 웃음이 사라지자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장미성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까?”

“응.”

펄프 대장은 미지근해진 리암 수사표 맥주를 이리저리 굴렸다.

“요즘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겨울인데?”

로벨은 눈치 없이 따지고 말았다. 펄프 대장은 주름진 미소로 대답했다.

“지금은 차디찬 북풍이 불지요. 하지만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남쪽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올 겁니다.”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는 똑똑한 친구와 튼튼한 울타리가 있으니까.”

“그거 퍽 안심이 되는군요. 하하핫!”

펄프 대장이 껄껄 웃었다. 로벨은 늙은 용병에게 미소를 보이며 속삭였다.

“내 울타리에는 펄프 대장이 필요해. 그러니까 겨울이 가기 전에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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