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천사
247화. 천사
성 안 배수구도 자물쇠 달린 쇠창살로 잠겨있었지만, 강행돌파를 작정한 로벨 일행을 막지 못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자물쇠 고리에 끼우고 컨틀렛으로 칼몸을 후려쳤다. 무구를 명예로 여기는 기사가 보면 기겁할 행위지만,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견고함을 믿었다. 늑대의 왕이 무식한 츠바이핸더로 두드려도 흠집 하나 안 갔는데, 녹슨 자물쇠 따위에 부러질 리 만무했다.
까강-!
수년간 방치해 온 자물쇠는 로벨의 힘과 아론다이트의 단단함에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로벨은 쇠창살을 옆으로 치우고 날렵하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폭풍성 공격의 시작이었다.
“저놈 뭐야?”
“어디로 들어온 거야!”
로벨은 눈부신 가을 햇살에 고운 눈살을 찌푸렸다가 바이저를 내렸다. 신묘한 신수의 힘으로 많은 것을 보였다.
‘폭풍의 홀이네?’
후계자 전쟁이 끝나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한 기사들이 모여 논공행사를 벌였다. 기억이 떠오르자 해야 할 일도 떠올랐다.
“뭐야! 한두 놈이 아니야!”
“젠장! 막아! 더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로벨을 뒤따라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이 올라왔다. 폭풍성을 지키는 헤르만 백작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급히 창칼을 내밀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오해했다. 지금 올라온 세 사람이 사실상 전부이며, 세 사람만으로 서른 명은 족히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를 감히!”
호른 경은 로벨 앞으로 성큼 나가 로벨을 노리는 겁 없는 병사의 숏 스피어를 잡았다. 배불리 먹은 적이 없어 삐쩍 골은 전형적인 볼탄 반도의 농민병이었다. 근육이 넘실대는 기사가 힘껏 당기자 그대로 끌려왔다. 기사는 워 해머의 뾰족한 송곳을 병사 이마에 꽂았다. 빠각-! 뼈를 깨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푸른 하늘 치솟는 붉은 선혈이 유난히 선명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본 헤르만 백작의 병사들 가슴에 분노, 긴장, 공포, 전의, 혹은 일상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불이 지펴졌다.
“죽여버렷!”
“다 같이 덤벼!”
“이야아앗!”
그러나 병사보다 로벨이 먼저 움직였다.
‘정면에 7명, 우측에 5명, 성벽 위에 3명... 성문까지 35야드...’
아성과 보루에 수비병력이 더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오기 전에 울프 용병단을 불러들여야 했다.
로벨은 루체른 해머(Lucerne Hammer)의 창날을 뱀브레이스로 쳐내고 아론다이트를 좌에서 우로 크게 휘둘렀다. 칼끝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병사의 경동맥을 잘라냈다. 새빨간 피가 5피트까지 뿜어져 나와 옆 동료를 적셨다.
“우아아-악!”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회전에 몸을 실어 팽이처럼 한 바퀴 돌아 패닉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료의 목도 끊었다. 망토자락이 어지럽게 펄럭였다.
“과연 그랜드 챔피언!”
조단 랭스터 경이 크게 웃으며 수염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조상 중에 바바리안이라도 있는지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강했다. 강철을 두른 거력의 기사가 인정사정없이 도끼를 휘둘러대는데 가까이하고 싶은 병사가 있을 리 없었다.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나자 호른 경이 바짝 쫓아가 워 해머로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생가죽을 여러 장 덧댄 트래퍼 햇을 썼지만 피 맛을 본 전쟁 망치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빨간 피와 하얀 뼛조각이 흩날렸다.
“마, 막아! 막으라고!”
“니가 막아!”
싸움을 명예로 알고, 잘 싸우는 것은 미덕으로 여기며,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싸우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기사였다. 농사짓다가, 돼지치다가 무기를 잡은 보통 인간이 당해낼 수 없었다.
로벨은 거치적거리는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내고 칼자루를 빙글 돌려 성문을 가리켰다.
“호른 경! 랭스터 경! 성문을 여시오!”
아성에서 병사들이 대거 나타났다. 로벨은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아론다이트를 가슴 높이로 끌어올려 성문을 가로막았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패기가 엿보였다.
호른 경은 10여 명의 병사를 홀로 상대하는 주군이 걱정되어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뒀다. 성문을 열면 절로 해소될 위험이었다.
하지만 헤르만 백작의 병사보다 훨씬 위험한 적이 남아 있었다.
“잘 생긴 기사님? 그럼 안 되어요.”
“어, 어엇? 누구냐!”
호른 경은 성문을 코앞에 두고 걸음을 떼지 못했다. 호른 경뿐만 아니라 랭스터 경도 마찬가지였다. 랭스터 경은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자 당황해서 사방으로 수염도끼를 휘둘렀다.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수작을 부리느냐!”
“어머나! 수작이라니요? 전 그런 음흉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두 다리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로벨은 거리를 좁혀오는 십여 자루의 창을 거칠게 몰아내며 소리쳤다.
“호른 경! 아직 멀었소!”
“주, 주군... 그것이... 그것이...”
마법사, 마녀, 이교도, 악마추종자란 단어가 입 안에 맴돌았다. 로벨은 허우적거리는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악마추종자와 손을 잡았다.
“헤르만 백작! 정녕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오!”
그 대답은 엉뚱한 목소리가 대신했다.
“어멋! 그쪽이 그 유명한 그랜드 챔피언인가요? 난 잘생긴 기사가 좋더라?”
로벨은 귓가에 속삭이는 간드러진 목소리에 깜짝 놀라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로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삭임 또한 악마추종자의 마법이었다.
“하찮은 재주야! 나와서 덤벼!”
로벨은 호른 경 등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속삼임이 다시 들려왔다.
“어멋?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난 다리가 있고, 의지가 있으니까.”
로벨은 귀찮은 속삭임보다 반원형으로 포위하는 헤르만 백작군이 신경 쓰였다. 속삭임은 그런 로벨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흑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라니... 설마... 설마...?”
정체 모를 속삭임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신, 로벨 로드릭이 아니군요?”
로벨이 반응하기 전, 로벨의 오랜 친구가 흑마법에 대항했다.
“사랑과 정의! 우정과 믿음! 오래된 나무는 조용히 타오르는 법!”
끼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악마추종자의 마법이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렁에서 몸부림치던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은 반동으로 그만 나자빠졌다.
“또, 또 뭐냐?”
“저쪽이다! 한 놈 더 있다!”
배수로에 숨어있던 마녀 키르케가 낑낑거리며 올라와 두리번거렸다. 마법을 느끼고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섰는데, 피와 시체와 살기등등한 병사들 모습에 그만 겁을 먹었다.
“저, 저는 그러니까, 사랑과 우정의, 뭐 그런 비슷한, 드루이드...”
겁을 먹어도 하는 소리가 마녀다웠다. 로벨은 움직일 수 있게 된 호른 경과 랭스터 경보다 마녀 키르케를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겔몬 족의 마법! 왜 자꾸 방해하는 것이냐!”
속삭임은 더 이상 속삭임이 아니었다. 폭풍성에 어울리는 폭풍이 되어 성내에 휘몰아쳤다. 어찌나 거센지 간신히 일어난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이 다시 나자빠졌다. 그러나 로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왜 그래? 또 무슨 일이야?”
로벨에게는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성 안은 거친 숨소리 외 조용했다. 폭풍에 휘말려 허우적거리는 기사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처럼 보였다. 마녀 키르케가 기사들에게 조언했다.
“전부 속임수에요! 의식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의지하지 마세요! 그럼 마법에 걸리지 않아요!”
“그, 그렇게 말해도...!”
“크아악!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후작!”
로벨은 곤란한 얼굴로 난감한 요청을 외면했다. 악마추종자의 마법에 영향을 받는 것은 호른 경과 랭스터 경 외에도 여럿 있었다. 헤르만 백작의 병사 중 상당수가 무기를 버리고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마, 마법이다!”
“악마가 나타났다!”
이쯤 되자 뭐가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기회인 거 같아.’
로벨은 텅 빈 성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헤르만 백작의 병사들 눈에는 미친 듯이 날뛰는 회오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놈은, 아니, 저 기사님은...”
“옛 신이시여. 우리가 누구와 싸운 것입니까.”
사악한 마법이란 것을 인지하는 눈에는 또 다른 형상이 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망토를 잘못 보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로벨의 등 뒤로 하얗게 빛나는 날개가 보였다.
“천사... 였어?”
그 표현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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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의 천사 로벨 로드릭은 꺼림칙한 기분이 되어 폭풍성의 성문을 열었다.
빗장을 치우고, 문짝을 밀어도, 누구 하나 돕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함께 온 기사들은 두 팔을 휘저으며 괴상한 춤을 추고, 자신을 막아야 할 수비병들은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페르젠 백작이 왜 패전했는지 알겠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 악마추종자와 손잡았다. 직접 겪어보니 확실해졌다. 사악한 마법으로 혼란을 일으켜 승리를 도둑질했을 것이다.
“우오오! 성문이 열렸다!”
“우리 나으리가 해냈다! 모두 돌... 격...?”
“엥? 기사 나리잖아?”
성문 밖에는 펄프 대장이 이끄는 울프 용병단 50명이 대기 중이었다. 로벨이 성문을 활짝 열자 갑갑한 후드를 벗어던지고 무거운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상황이 기대한 것과 좀 달랐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사전에 준비한 사나운 몸짓과 험악한 욕설을 잠시 보류하고 성 안을 살폈다. 그리고 로벨과 비슷한 기분이 되었다.
“왜들 저럽니까요?”
로벨은 호른 경의 명예를 위해 경고했다.
“...못 본척해.”
이후 폭풍성 점령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초월적인 무언가를 목격한 안마당 병사들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뒤늦게 나타난 보루 쪽 수비병이 깜짝 놀라 무기를 꺼냈지만, 승기를 잡은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약탈이다. 그러나 폭풍성을 점령한 기사들은 다른 것에 집중했다. 헤르만 백작을 돕는 악마추종자를 찾아야 했다.
“일종의 최면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악마추종자의 마법을 정의했다. 호른 경은 헝클어진 머리를 힘겹게 정리하며 반박했다.
“하지만 나는 신체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러니까 마법이고요.”
선인의 말이 옳았다. 마법사와 마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법을 이해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벨이 의문을 표시했다.
“난 왜 걸리지 않았지?”
“으음... 글쎄요?”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살짝 당겼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범인의 눈에는-에헴!- 아무 때나 마법을 쓰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아요. 숲의 마법을 쓰려면 숲의 정기를 모아야 하고, 어둠의 마법을 쓰려면 사기(邪氣)를 모아야 하죠.”
로벨도 그쯤은 이해했다. 악마추종자가 인신공양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늙은 강사처럼 헛기침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기운만 모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마법을 걸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해요. 이름, 나이, 성별, 성격 같은 걸 알아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도 실패할 때가 종종 있고요.”
“그게 뭐야? 엉망진창이잖아?”
“마법이 손짓 한 번으로 이뤄지면 마법사가 세상을 지배했죠.”
로벨은 악마추종자가 속삭인 말을 되뇌었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겠구나.’
로벨은 그 사실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다행히 마녀가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기사님이 마법에 안 걸린 것은, 으음, 파나케아 투구 때문일 거예요. 신수의 힘이 기사님을 보호한 거죠.”
그럴 가능성도 일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