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46화 (246/605)

246화. 배수로

246화. 배수로

‘동부평야 전쟁’은 모두가 예상했으나 정작 당사자만 생각지 못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전광석화 같은 기동전으로 보룬 성, 쉐든 성, 런치 성을 함락하고, 참전 닷새 만에 동부평야 절반을 집어삼켰다. 앞서 하버트 페르젠 백작이 700명의 대군으로 30일에 걸쳐 간신히 점령한 것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번갯불이었다.

페르젠 백작군과 헤르만 백작군이 뺏고 뺏는 동안 성의 수비병력과 방어시설이 소진되었고, 동부지리에 밝은 조단 랭스터 경이 동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격전이었다.

후대 역사학자에게 의심과 불신을 심어주는, 그러나 당대 호사가 사이에서는 “그자라면 그럴 수 있지”라 평가받는 유례없는 업적을 세운 로벨과 로벨의 병사들은 자신이 해낸 일에 소탈한 감상을 남겼다.

“아이고, 나 죽겠네. 나 죽어. 더는 못 가. 아니, 안 가! 안 간다고!”

허풍쟁이 제이콥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투정부렸다. 다 큰 어른이 떼쓴다고 타박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못하고 시체처럼 너부러진 용병이 대다수였다.

펄프 대장이 옹알이하는 것 외에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부하들을 하나하나 뒤집으며 친절하게 전달사항을 알렸다.

“30분 쉬고 다시 이동한다. 배 좀 채우고 무기도 정비해라.”

“30분이 아니라 30일은 쉬어야 하오.”

“난 30년 정도 쉬고 싶다...”

울프 용병단은 닷새 동안 62마일을 행군했다. 평범하게 걸어가도 지치고 피곤할 거리인데, 이동 중에 7번을 싸우고 3개의 성을 점령했다. 제정신이든 제정신이 아니든 상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로벨은 자신의 휘하에서 유일하게 지치지 않은 모닝스타를 보듬으며 난감함을 호소했다.

회색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아니, 보룬 성을 공격할 때만 해도 이렇게 적진 깊숙이 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식량을 구해서 철수하거나, 성을 보수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출정할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보룬 성을 점거하고 살펴보니 식량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페르젠 백작군이 한번 쓸고, 헤르만 백작군이 또 한번 휩쓸고 지나가 비축한 식량은 물론, 가을에 수확할 곡식조차 모자랐다. 결국 계획을 변경해 다음 성을 공격하고, 또 다음 성을 공격해야 했다.

“이대로 가면 보름 안에 동부지방을 장악하겠소. 으하핫! 후작을 따르기를 정말 잘했지!”

로벨은 로벨 로드릭 군에서 유일하게 신난 조단 랭스터 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로벨이 점령한 성 중 최소한 하나는 자기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수비는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니... 으음?”

로벨은 전격전이라 불리는 생소한 전술의 수많은 단점 중 한 가지 장점을 찾아냈다.

위험부담이 크고, 물자보급이 어렵고, 거점이 없어 금방 지치지만, 적의 대응 속도가 아군의 이동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그 덕분에 보룬 성을 먼저 공격하고도 쉐든 성과 런치 성을 손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로벨이 이틀 만에 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풍성은 어떨까?’

로벨은 버팅거 시티의 장엄한 아성을 떠올렸다. 폭풍을 붙잡기 위해 가장 높은 언덕에 가장 높은 탑을 세운 폭풍의 성이었다.

“랭스터 경, 혹시 버팅거 시티의 약점도 알고 있소?”

그 질문에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깜짝 놀랐다.

“으악! 이제 버팅거 시티에요?”

“주군... 진심입니까?”

조단 랭스터 경은 ‘어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버팅거 시티의 약점은 모르오.”

“아, 그렇소?”

로벨은 아쉬운 표정으로 전격전의 백미를 포기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포기였다. 조단 랭스터 경이 콧수염과 턱수염 사이로 웃음을 자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폭풍성의 약점은 알고 있소.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가문의 성이니까. 도시가 필요한 것이오, 성이 필요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도시지만, 랭스터 경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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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시티의 장미성, 사트로 시티의 검은 성, 페르젠 시티의 파도성이 그러하듯, 도시 안의 성은 수비의 기능만큼이나 심미적인 요소도 중시했다. 도시민에게 자부심을, 외지인에게 경외심을 심어줘야 정통성을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폭풍성도 마찬가지였다.

버팅거 시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크고 높은 성탑은 너무도 장엄하여 하늘을 받치는 옛 신의 기둥처럼 느껴지고, 성탑을 둘러싼 네모반듯한 성벽은 옛 신의 기둥을 지키는 고결한 전사처럼 보였다.

폭풍성은 누가 뭐라 해도 버팅거 시민의 자랑이지만, 폭풍성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지나치게 높은 언덕이 지나치게 굽어져서 허파와 장딴지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적에게는 더하지...”

로벨은 폭풍성 언덕 중간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 길을 오르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러나 첫 번째 방문과 많이 달랐다. 오늘은 포상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너무 더워요. 덥다고요.”

마녀 키르케가 후드 아래에서 꼼지락거렸다. 가을이 시작된 지 꽤 되었지만, 남해와 가까운 버팅거 시티에는 아직도 여름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게다가 높은 언덕길을 쉬지 않고 오르다 보니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흘렀다.

“그러게 펄프 대장이랑 있으라니까.”

로벨이 망토 밖으로 삐져나가는 칼자루를 바짝 당기며 타박했다. 마녀는 아랫입술을 삐죽이고 말했다.

“악마추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럼 전문가가 있어야죠.”

“악마 전문?”

“마법 전문이요!”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앞서 간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이 첫 번째 장소를 찾았다.

“주군, 이곳입니다.”

로벨은 후드를 살짝 올리고 호른 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언덕 위에 지어진 성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배수(排水)였다.

평지에 있는 성은 해자를 파서 성벽 방어와 치수를 동시에 해결하지만, 고지대에 있는 성은 물을 이용할 방법이 없어 여러 곳에 배수로를 만들어야 했다. 특히 폭풍우가 잦은 남쪽 지방에서는 배수시설이 안 좋을 경우 성벽이 주저앉거나 붕괴될 수 있었다. 폭풍성도 예외가 아니라 성 아래로 여러 개의 지하 배수로가 뚫려있었다. 지금 호른 경이 가리키는 곳도 그중 하나였다.

애꾸눈 볼포스와 외팔이 더치가 일행이 아닌 척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재빨리 속삭였다.

“여기가 폭풍성 안뜰로 이어진다굽쇼?”

랭스터 경은 미천한 용병이 의심하듯 묻자 기분이 상했다.

“그렇다. 천박한 잡놈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욕을 하십니까요.”

외팔이는 구시렁거리며 조금 떨어졌다. 로벨과 호른 경에게 익숙해져서 종종 깜박하는데, 기사란 본디 저런 종자였다. 로벨의 기사 중 까칠하기로 유명한 켈트 경도 사실은 꽤 자상한 편이었다.

로벨은 지하 배수로를 유심히 살폈다. 주의해서 살피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작은 바위굴이었다. 로벨은 허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쇠창살이 설치되었지만, 물이 흐르는 곳이 응당 그러하듯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폭풍성의 주인이 바뀐 뒤로 수년 간 관리가 안 되어 엉망이었다.

‘이 정도면 부술 수 있겠어.’

로벨은 호른 경에게 눈짓했다. 호른 경은 워 해머에 헝겊을 둘둘 감아 쇠창살을 힘껏 때렸다. 쿵! 쿵! 쿠쿵-! 땅이 울리고 흙이 우두둑 떨어졌다.

로벨은 성 안에서 눈치챌까 조바심을 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었다. 병력 대부분이 버티거 시티 성곽에 주둔 중이며, 성 안에 남은 기사와 병사도 폭풍성 지리에 익숙지 않아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우지직- 콰당-!

쇠창살이 외로운 기사의 망치질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로벨이 빠르게 명령했다.

“외팔이, 펄프 대장한테 가서 전부 올려보내라고 전해. 애꾸눈은 여기 남아서 상황을 주시해. 호른 경, 랭스터 경, 나와 함께 갑시다.”

애꾸눈이 가벼운 어깨를 추스르며 말했다.

“세 분이서 위험합니다. 허풍쟁이가 애들을 데리고 오면 함께 가시지요.”

“이렇게 좁은 곳에 많은 인원은 필요 없어. 성문을 열면 모두 들여보내.”

“그리고 세 분이 아니라 네 분이요! 저도 간다고요.”

마녀 키르케가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애꾸눈을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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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단 랭스터 경의 작전은 고전적이며 위험했다. 소수정예를 변장시켜 버팅거 시티에 잠입, 비밀통로-배수로를 이용해 폭풍성을 기습 점거한다는 작전이었다.

어린 집사의 포상에 혹한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50명이 혼잡한 도시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시내에서 50명이 몰려다니면 장님 눈에도 걸리기 쉽기에 2~3명으로 쪼개 폭풍성 언덕을 올라왔다.

1조가 호른 경과 랭스터 경, 2조가 로벨과 마녀 키르케, 3조가 애꾸눈 볼포스와 외팔이 더치였다. 그 뒤로 허풍쟁이를 비롯한 10여 개 조가 더 있지만, 로벨은 조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긴박한 작전이라 시간을 끌 생각 없었다. 그리고 기사 셋이면 해볼만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허리 아파요.”

마녀 키르케가 칭얼거렸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뒀다.

“목도 아프고요.”

폭풍성의 지하 배수로는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유쾌하지 않았다. 천장이 낮아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걸어야 하는데, 쥐와 쥐똥이 사방에 깔렸고, 고인물이 썩어 악취까지 풍겼다.

마녀는 후드를 벗고 망토를 바짝 끌어올렸다. 그래도 답답함과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조용해라.”

마녀의 질문에 랭스터 경이 차갑게 대꾸했다. 마녀는 입술을 삐죽였고, 랭스터 경은 눈을 부릅떴다.

‘고귀한 후작이 왜 저런 천한 것들을 데리고 다니는가!’

호른 경은 랭스터 경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도 처음 늑대성에 왔을 때 그리 생각했으니까.

‘익숙해지시오. 주인을 닮아 좋은 친구들이오.’

로벨은 랜턴에 남은 기름을 확인하고 마녀 질문을 반복했다.

“얼마나 남았소?”

랭스터 경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지나온 거리를 가늠했다. 폭풍성에서 나고 자라 눈 감고도 산책할 수 있는 랭스터 경이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앞이오. 벽을 잘 살펴보시오. 사다리가 있을 것이오.”

로벨은 랜턴을 높이 들어 좌우 벽을 비췄다. 조심스럽게 몇 걸음 떼자 과연 철로 만든 사다리가 있었다.

“폭풍의 홀 남쪽 배수구로 이어져 있소. 성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오.”

“그럼 경비가 삼엄하겠군.”

로벨은 망토자락을 걷고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밖으로 꺼냈다. 호른 경은 워 해머를 감싼 헝겊을 벗겼고, 랭스터 경은 시꺼먼 수염도끼를 뽑아 단단히 쥐었다. 세 자릿수 병사가 지키는 적진에 뛰어들 준비가 끝났다.

“주인이 돌아왔으니 불청객은 사라져야지.”

7년 만에 고향집을 찾아온 조단 랭스터 경이 사납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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