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37화 (237/605)

237화. 말뚝

237화. 말뚝

울프 용병단 300명과 저스티스 기사단 100명은 사흘 치 식량만 지참하고 붉은 산 남쪽으로 강행군했다. 연합군의 목표는 펠트 성을 공격하는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었다.

“그쪽도 어중이떠중이 떼어내고 보냈을 테니까 만만치 않을 거야.”

“적군의 절반이잖아? 그놈들만 잡으면 다 끝난 거지.”

누가 말하지 않아도 펠트 성이 이번 전쟁의 승부처란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기사단도, 용병단도 막중한 책임감에 얼굴을 굳혔다. 예외가 있다면 항상 멍해 보이는 로벨과 그런 로벨의 눈치를 살피는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요즘 들어 유독 말이 없는 호른 경을 걱정했다.

“아, 호른 경? 몸은 괜찮소? 좀 더 쉬어야 하지 않소?”

로벨이 자상하게 말을 걸자 호른 경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괘,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호른 경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죄진 어린아이처럼,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로벨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도, 목젖을 훤히 드러내며 하품하는 것도, 마른세수하면서 코를 후비는 것도 이상하게 귀엽게 보였다.

‘...내가 미쳤나?’

로벨은 호른 경의 정열적인 고백을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백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전황이 긴박한 탓도 있고, 호른 경의 정신이 혼미한 탓도 있지만, 로벨의 뇌 자체가 남녀관계를 인지하는 기능이 떨어졌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호른 경의 심정은 대단히, 아주 대단히 복잡했다.

호른 경의 이성관은 조금 독특했다. 그것이 죄는 아니지만, 옛 신의 교리와 사회통념상 자랑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철저히 비밀로 하며 지금껏 미혼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첫사랑... 은 아니지만, 근 10년 만에 찾아온 사랑이 있었으니, 늑대성의 주인이자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었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고, 어린 집사의 눈총을 무릅쓰며 주위를 맴돌았고, 늑대성에서 가장 가까운 아만다 성까지 욕심내었다. 그렇게 간신히 가까워졌더니 난데없이 주군이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른 경은 첫사랑 이후 처음으로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기뻐할 일인지 괴로워할 일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붉은 산 요새로 떠나기 직전 깨달았다.

‘내가 사랑한 것은 ‘로벨 로드릭’이란 아름답고 당찬 기사일 뿐, 그의 성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갈등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고백까지 한 것이다. 비록 시기와 장소가 안 좋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섣부르고 위험한 짓이었다. 전투로 끓어오른 피가 식자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군의 정체가 밝혀지면 살리카 법에 따라 기사 작위와 늑대성의 통치권이 박탈되겠지. 주군을 적대하는 무리가 있으니, 어쩌면, 어쩌면 옛 신의 교단이 집행하는 마녀재판까지 오를 수 있다. 그리되면 무슨 낯으로 주군을 마주할 것인가.’

로벨에게는 지난 10년간 쌓아 올린 직위와 명예가 있었다. 자신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게 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로벨이 고백을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호른 경? 정말 괜찮소?”

로벨이 심각한 목소리로 호른 경을 불렀다. 호른 경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붉은 산을 내려와 울퉁불퉁한 구릉지대에 이르렀다.

“경답지 않소. 아무래도 전투에 나서는 것은 무리일 듯하오.”

“아, 아닙니다. 잠깐 졸았을 뿐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호른 경은 어설프게 둘러댄 후 바이저를 내려 얼굴을 감췄다.

로벨은 걱정이 되었지만 한사코 괜찮다 하니 말리지 않았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이 포로가 되고, 그들을 따르는 기사와 기사 종자가 대다수 실종된 상황에서 호른 경 정도 되는 기사를 전력에서 쉽게 제할 수 없었다.

로벨은 구릉 위에 포진한 볼프 사트로 후작의 주력부대를 관찰했다.

‘이번이 몇 번째지?’

크고 작은 전투에서 부딪쳐온 볼프 사트로 후작과 그 휘하 기사들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역사는 반복되고 실수는 계속되었다. 우연히 시작되었으나 필연히 부딪쳤을 질긴 악역이었다.

‘이제 끝내야 해.’

로벨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쓸어내렸다. 저스티스 기사단장 자크 경이 모닝스타 옆에 말머리를 붙이고 제안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 적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는 것이 어떻소.”

로벨은 고심 후 고개를 저었다.

“볼프 후작은 영리한 자요. 기사단의 공격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전력이 엇비슷하니 서두를 필요 없소.”

숫자를 비교하면 볼프 후작군 500명, 로벨&기사단 400명이지만, 무장수준에서 로벨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만약에 변수가 있다면 도반 도트넘 백작 이하 악마추종자일 것이다.

“천천히 접근합시다.”

로벨의 신중론에 자크 경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로벨 로드릭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탓에 존경심까진 아니어도 존중할 마음이 있었다. 로벨이 어린 시절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는 것도 호감에 일조했다.

“우리가 선두에 서겠소.”

“그리하시오.”

자크 경은 기사단을 일렬로 늘어트리고 시위하듯이 구릉 아래로 이동했다. 기분 같아서는 100명의 형제들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고 싶지만, 로벨의 충고를 새겨들어 꾹 참았다. 그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볼프 후작군과 거리가 300야드로 좁혀졌을 때, 기사단의 전투마 한 마리가 다리를 접질리며 꼬부라졌다.

“히히힝-!”

“어억-!”

기사단원은 돌발상황에도 재주껏 몸을 굴려 큰 부상은 피했다. 그러나 혼란까지 피할 수 없었다.

“모두 멈춰라!”

자크 경이 화급히 기사단을 정지시켰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도 덩달아 발을 멈췄다.

“저 친구 왜 저래?”

“저 친구 말이 문제인데?”

기사단이 웅성거리는 것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로벨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모닝스타를 전진시켰다.

“무슨 일이오?”

“그, 그것이...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로벨은 기사단원이 낙마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봄이 지나 무성하게 자란 풀잎 사이로 말뚝과 밧줄이 보였다. 용도가 뻔히 보이는 장치였다.

“볼프 후작의 새로운 함정이오.”

로벨은 시야를 넓혀 구릉 일대를 쭉 훑어보았다. 산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사이로 꼿꼿이 서서 꼼짝하지 않는 말뚝이 여럿 보였다. 그 사이사이에 밧줄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숫자가 많지 않고 워낙 조잡해서 주의해서 이동하면 사고 없이 통과할 수 있겠으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점에서 저스티스 기사단이 장기로 삼는 기마돌격을 물 건너갔다.

“로벨 경의 말이 맞았소. 무턱대고 돌격했다가는 낭패를 보았겠소.”

로벨은 야트막한 구릉 위에 방진을 형성하고 기다리는 볼프 후작군을 올려다보았다. 거리가 가까웠다. 힘 좋은 사수라면 요행에 기대어 저격을 시도할 만했다. 로벨은 즉각 결정했다.

“우리가 길을 열겠소.”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 어려운 명령은 아니었다.

“외팔이, 풋맨 소대 전부 데려가서 말뚝을 뽑아내. 못 뽑겠으면 아예 박아 넣던가. 애꾸눈, 외팔이와 풋맨을 엄호해.”

“제기럴. 이런 궂은일은 항상 우리 몫이지.”

“꼬우면 갑옷을 장만하던가.”

외팔이 더치와 풋맨 소대가 무기보다 공구에 가까운 장비를 챙겨서 움직였다. 훌륭한 병사는 훌륭한 일꾼이기도 했다. 벌목하거나 숙영지를 구축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말뚝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들지만 않으면 말이다.

휘리리릭-!

화살이 쏟아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외팔이 더치는 곰 같은 덩치를 손바닥만한 바클라 안쪽에 숨기며 소리쳤다.

“저놈들이 활을 쏜다!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애꾸눈 볼포스는 미우나 고우나 십수 년을 함께한 전우를 죽게 둘 생각이 없었다. 아바레스트를 견착하고 크로스보우 중대에 명령했다.

“조준!”

100개의 크로스보우가 푸른 하늘을 향했다. 거리가 멀고, 지대가 낮지만, 숙련된 사수들은 문제 삼지 않았다. 감각적으로 발사각을 조절했다.

“발사!”

파파파-팡-!

쇠뇌의 시위가 풀리는 소리는 활시위가 퉁기는 소리보다 거칠고 기계적이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쇠뇌의 발사음이 좋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더욱 좋아했다.

창공으로 치솟은 쿼럴 중 일부는 구릉 아래에 떨어지고, 일부는 구릉 너머로 날아갔지만, 대부분은 볼프 후작군 머리 위에 꽂혔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소란이 일어났다.

“재장전! 재장전!”

애꾸눈 볼포스는 윈드라스를 버트에 끼우고 능숙하게 손잡이를 감았다. ‘염소발’을 사용하거나 등자를 밟아 시위를 당기는 용병도 있었다. 무기에 따라, 재주에 따라 다르지만 30초가 지나지 않아 대부분 재장전을 끝냈다.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 소대 모습에 자크 경이 감탄했다.

“볼탄 반도에는 늑대성과 늑대성의 용병이 있다 하더니, 실로 대단하오.”

언덕 위아래로 화살이 오가는 사이, 용감하고 부지런한 풋맨 소대가 착실히 말뚝을 제거했다. 언덕 전체에 말뚝을 치울 필요 없이 기사단이 들어갈 길만 열면 되니 진행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볼프 후작은 길이 뚫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깃발이 크게 흔들리더니 번쩍번쩍 빛나는 기마대가 앞으로 나왔다. 로벨은 자크 경을 힐끔 보았다.

‘기병전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거리인데...’

기마 돌격은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마가 최고의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최적의 거리를 장악해야 한다. 기병전에서는 적보다 먼저 돌격해서 거리를 빼앗는 것이 당연코 유리했다.

“오, 옵니다요!”

볼프 후작의 기사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울프 용병단이 뚫어놓은 길을 자신의 돌격 루트로 바꾼 것이다. 자크 경은 바이저를 닫고 멋들어진 해비 랜스를 추어올렸다.

“옛 신의 이름으로! 돌격!”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저스티스 기사단의 위용을 근접해서 볼 수 있었다.

“나의 주여, 나의 보잘것없는 피와 살을 바치나니 거룩한 그곳에서 오롯이 영광되게 하소서.”

“나의 주여, 나의 볼품없는 몸뚱이를 가지시어 영광된 이름 아래 세세토록 보살펴 주소서.”

로벨은 거룩한 찬송가가 기합이 될 수도, 비명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랜스와 랜스가 엇갈리고, 사람과 말이 뒤섞여서, 찢어지고, 부서지고, 뭉개지고, 망가졌다. 전장을 오랜 세월 누빈 고참 용병 허풍쟁이도 중장기병의 충돌은 낯설었다. 양측의 충돌 직후 소감을 짧게 밝혔다.

“와우...”

로벨은 소감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승리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만약 볼프 후작의 기사들이 승리하거나, 고착상태에 빠지면 대응책이 있어야 했다.

“맨앳암즈! 우측으로 돌아서 적의 본진을 공격해! 기사가 전부 빠졌으니 지금이 기회야!”

싸움개 닥스와 맨앳암즈는 즉시 무장을 점검하고 언덕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대응책을 구상한 것은 로벨만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말이 없던 호른 경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주군! 좌측에! 적군입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시선이 일제히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볼프 후작의 함정은 말뚝 따위가 아니었다., 볼프 후작의 주력군은 기사 따위가 아니었다.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거대한 오우거 세 마리가 전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로벨의 머리는 저 큰 덩치가 어디 숨어 있었는지 의아해했지만, 몸은 현명하여 고민 따위 하지 않았다.

“랜스!”

허풍쟁이가 허둥지둥 해비 랜스를 풀어 로벨에게 주었다. 로벨은 호른 경, 마튼 경, 매튜 경, 램지 경 등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진 후 바이저를 내렸다.

“왼쪽은 우리가 맡는다! 가자!”

굳이 말하자면, 로벨 연합의 주력군도 옛 신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오우거 슬레이어로 명성 떨치는 로벨 로드릭 본인이 최고의 전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