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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36화 (236/605)

236화. 수싸움

236화. 수싸움

“옛 신과 옛 신의 신실한 신자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고결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자가 기사단(Order)이라.”

로벨은 옛 신의 기사단을 찬양하는 시구를 중얼거렸다. 어릴 때 읽은 시라 내용이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비슷할 것이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건성으로 박수쳤다.

“참 멋진 말입니다요.”

“...내가 지은 거 아냐. 200년 전 어느 사제가 지은 거지.”

허풍쟁이 정도면 성의를 표한 것이다. 그 외 병사들은 넋을 놓고 성문을 통과하는 저스티스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세 자릿수쯤 되니까 장난 아니네.”

“저치들이 우리 편이라 다행이야.”

울프 용병단은 검은 숲 해방전쟁에서 저스티스 기사단과 함께 싸웠다. 그때 당시 저스티스 기사단원은 30명뿐이었는데, 그들만으로도 검은 숲의 몬스터가 기를 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 배가 넘는 100명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의 기사가 83명뿐인 것을 생각하면, 비록 똑같은 ‘기사’는 아니지만, 중장기병 100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옛 신의 기사단은 갑옷과 문장이 통일되어 있어 더욱 위압적이었다.

성문을 지나 아성 앞에 이른 저스티스 기사단은 누가 신호하지 않아도 일제히 전투마에서 내렸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는 저것도 훈련했을까 진지하게 의논했다.

기사 단장이 앞으로 나와 에릭 공작과 봉신들에게 인사했다.

“샘 포클 수도원 소속 자크 니폴론이오.”

에릭 공작은 상대가 기사임을 알고 정중하게 맞이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본인이 에릭 프란시스요.”

기사단 중에는 기사 서임을 받은 ‘진짜 기사’가 몇 되지 않았다. 기사 서임을 받으면 영지를 계승하거나 기사로 임명해 준 왕과 제후에게 충성하지 고리타분한 수도원에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사단 소속은 기사 과정을 밟지 못한 시골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 혹은 부르주아의 후원을 받은 자유민이 대부분이었다. 로벨의 작은 오라비 ‘로벨’도 무재가 있었으면 저들 중 하나가 되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제후 입장에서 옛 신의 위광을 등에 업었다 하나 평민을 동등하게 대하기는 껄끄러웠다. 옛 신의 교단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자크 니폴론 경을 기사단장으로 삼아 보냈을 것이다.

“옛 신의 보살핌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소이다.”

“실로 옛 신의 광영이오. 우리 힘을 합쳐 저 사악한 악마와 이교도를 징벌합시다.”

에릭 공작과 자크 경은 성 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상하관계가 불분명한 동맹군이라 우두머리가 이 정도 제스처는 보여줘야 탈이 없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왕의 기사와 교리에 미친 옛 신의 기사단이 마찰을 빚으면 이로운 것은 악마추종자뿐이었다.

“자, 함께 갑시다. 성 안에 술과 음식을 마련했소.”

‘하인즈 가문 사람이 마련했지만...’

로벨은 가주를 잃고 재산을 징발당하는 하인즈 사람들에게 위로를 한 줌 던졌다. 그러나 신성한 기사단을 한참 잘못 보았다.

“술은 되었소. 군량과 말먹이를 부탁하오.”

에릭 공작은 깜짝 놀라 말했다.

“이제 막 도착하지 않았소?”

“사특한 자들의 발호는 한시라도 방관해서 아니 되오.”

순진한 사람은 과연 정의와 믿음의 기사단이라 탄복했고, 영악한 사람은 역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간 도살자라 감탄했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볼프 후작이 대(對) 기사전을 준비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리를 쟁취할 생각이었다. 물론, 수도원 출신답게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기도 했다.

에릭 공작은 아랫사람을 불러 식량과 건초를 내주라고 명령했다. 또다시 하인즈 가문의 재산만 축났다.

“더 필요한 것이 있소?”

에릭 공작은 남의 식량으로 선심 쓰며 물었다. 자크 경은 깊은 눈으로 볼탄 반도의 반쪽 주인을 쳐다보았다.

“무운을 빌어주시오.”

에릭 공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옛 신께 기도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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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은 막강한 전력이었다. 단순히 무장이 잘 되어있어서가 아니라, 규율이 잘 잡혀있고, 집단전술에 익숙하며, 또한 목숨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첫 전투에서 볼프 후작군의 항마병 부대를 괴멸시켰다.

페르젠 백작과 에디즈 자작이 열흘 동안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상대해온 고블린 무리를 기마돌격 한 번으로 학살한 것이다.

“미친놈들이야... 미친 것이 분명해...”

“어허? 불경하잖아!”

“저것들은 싸울 때 노래 부른다니까? 활짝 웃으면서 메이스로 대갈빡을 깨는데, 하!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더라!”

신앙심 깊은 병사가 찬송가라고 정정해주었다. 어수룩한 병사가 찬송가를 부르면 힘이 세지거나 용기가 생기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여하튼, 에릭 후작군을 저스티스 기사단의 활약으로 계곡 상류를 거의 장악했다. 마을 두 개가 에릭 공작쪽에 들어오면서 식량과 노동력도 추가로 징발할 수 있었다.

에릭 공작은 여세를 몰아 붉은 산 요새 앞까지 군대를 전진시켰다. 선봉을 맡은 맥기 남작과 도이첼 남작이 300명의 군사로 공성전을 시도했다. 성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요새 안 병사들에게 겁을 줄 수 있었다. 병사에게는 고립되는 것만큼 무서운 상황은 없었다.

“이상한데...”

로벨은 의기양양한 페르젠 백작의 전령에게 전황을 보고받고 의문을 띄웠다. 펄프 대장이 일찍 집에 갈 수 있겠다고 기뻐하다가 로벨의 의문에 의문을 가졌다.

“무엇이 말입니까?”

“볼프 후작은 영리해. 악마추종자를 정면에 내세우면 교회가 나설 것을 예상 못 했을 리 없어. 그래서 지금까지 마법사를 불러들이는데 조심스러웠을 테고.”

“교회가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겠지요. 실제로 당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로벨은 무심코 긍정했다가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지난 왕위계승전쟁을 생각해봐. 이중 삼중으로 계획을 세워두고 움직였잖아. 볼프 후작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어.”

로벨은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기뻐한 것이 무안해진 펄프 대장은 성급함을 반성한 후 고민을 거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볼프 후작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기사와 용병 대장이 무거워지자 항상 무거운 애꾸눈 볼포스가 기쁘게 끼어들었다.

“작년 전쟁으로 구왕파 영주들의 병력이 많이 소진되어 추가할 병사가 없을 겁니다. 지금 모은 병사도 그리 실력이 좋지 못하니, 야전으로 기사단을 대적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수성뿐인데...”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결국 고사할 겁니다. 아니, 가을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영주들은 40일이 지나면 맹세를 지켰다고 주장하고 이탈할 겁니다.”

귀족 아래에서 오래 일한 애꾸눈은 귀족의 생리에 밝았다. 진짜 귀족인 로벨이 군말 없이 동의할 정도였다.

“역시 괜한 기우일까?”

저스티스 기사단을 제외해도 페르젠 가문, 에디즈 가문, 맥기 가문, 도이첼 가문, 헤르만 가문 등등 쟁쟁한 가문의 군대가 있으니...

“헤르만? 헤르만 백작은 지금 어디 있어?

로벨은 잊고 있던 호수성을 떠올렸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몰드 헤르만 백작군은 광산수비에 투입됐습니다.”

“광산은 왜? 전쟁 중에 누가 광산에 간다고?”

장기전으로 흘러가면 광물도 징발해야겠지만, 길어야 올가을에 끝날 영지전에서 생산과 가공이 오래 걸리는 광물은 가치가 없었다. 차라리 농기구와 냄비를 징발하는 쪽이 편했다. 펄프 대장이 볼을 긁적이며 진실을 말했다.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따돌리는 것이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백작 나리를 좋게 볼 리 없잖습니까.”

‘그런 일’은 왕위계승전쟁 막바지에 볼프 후작군에게 길을 열어준 일을 뜻한다. 로벨은 몰드 헤르만 백작이 마음에 걸렸다.

“그 작자도 볼프 후작만큼 영악한 자야. 어떻게 보면 더 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니까. 분명 무슨 짓을 저지를 거야.”

로벨의 의심은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 40일의 의무종군일이 끝났다. 에릭 공작은 자신이 군비를 지원할 테니 계속 남아줄 것을 요구했다. 승기를 잡은 전쟁에서 전공도 없이 발을 뺄 기사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모두 동의했다. 한 사람, 헤르만 백작만 제외하고 말이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참전을 거부하고 호수성으로 철수했다. 전선에 남아있어 봐야 의심과 냉대에 공을 세우기 힘드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에릭 공작과 기사들도 이미 끝난 싸움에 혼자 뭘 할 수 있겠느냐 싶어 허락했다. 헤르만 백작이 담당하던 철광산은 공백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달이 벌어졌다.

“볼프 후작군이 남하를 시작했다고!”

로벨은 하인즈 성 집무실 앞에서 멈칫했다. 에릭 공작의 외침이 방문을 넘어 1층 홀까지 쩔렁쩔렁 울렸다. 2천의 대군을 지휘할만한 성량이란 한가한 생각을 잠깐 하다가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누구냐!”

에릭 공작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로벨은 허락으로 알고 방문을 열었다.

“로벨 로드릭입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 로벨 경. 이거 참. 미안하오.”

에릭 공작은 자세를 바로 하고 수행기사와 시종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로벨은 공작가의 최측근에게 눈인사한 후 땅바닥에 너부러진 집기들을 가만히 보았다. ‘이것도 하인즈 가문의 재산인데...’ 역시 한가로운 생각이었다.

에릭 공작은 체통 없이 성질 부린 것이 무안한 듯 몸을 돌리고 말했다.

“볼프 후작이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소.”

밖에서 이미 들어 놀라지 않았다.

“우리 군이 요새를 포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안에는 구왕파 잔당들뿐이었소. 볼프 후작의 주력군이 광산 안에 숨어있었소.”

로벨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헤르만 백작이?”

“아니라고 발뺌하겠지. 어쩌면 진짜 아닐 수도 있고. 광산이 깊고 어두우니 광부가 아닌 이상 몰랐을 수도 있소.”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다. 로벨은 짐짓 심각해졌다. 전장을 우회해서 빈집을 터는 것은 로벨의 주특기였다. 그런 만큼 볼프 후작의 노림수가 뻔히 보였다.

“펠트 성입니다.”

“펠트 성?”

“볼프 후작의 주력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500명이오- 그들만으로 프란시스 시티나 사트로 시티를 점령할 수 없을 겁니다. 크지 않고, 공략이 용이하며, 아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공격할 겁니다.”

“젠장! 펠트 성이군!”

펠트 성은 펠트 가문의 오랜 봉토로 크기는 크지 않지만 붉은 산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다. 징발로 해결할 수 없는 물자, 즉 병력과 무기를 공급하는 보급기지였다. 펠트 성이 함락되면 거시적으로 포위되고 고립되는 것은 에릭 공작군이었다.

“과연 북방의 주인이군. 망할 놈. 언제부터 광산에 숨어 있었던 거지?”

로벨이 기사단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볼프 후작은 전세가 역전될 것을 알고 미리 주력군을 빼돌렸다. 그야말로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는 수 싸움이었다.

‘기사단이 오지 않아도 아군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작전이야.’

로벨은 주드 맥켈런 남작 이후 오랜만에 감탄했다. 사실 볼프 후작의 스승도 맥켈런 남작이었으니, 로벨과는 동문이었다. 맥켈런 남작은 내가 왜 당신들 스승이냐고 어이없어하겠지만.

“차라리 잘 된 일입니다.”

“잘 됐다고?”

로벨은 잦은 징발로 배를 곯는 붉은 산 영지민과 가을 농사를 걱정하는 남쪽 병사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들만 처리하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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