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27화 (227/605)

227화. 명분

227화. 명분

울프 용병단의 모집이 끝났다.

검은 숲과 포클랜드에서 전쟁 경험을 쌓은 포비아 왕국 출신이 주류지만, 에르나 왕국인과 잉그비아 왕국인도 다수 고용했다. 그 결과 늑대성에 주둔하는 울프 용병단만 총 301명이 되었다. 회색산과 뉴 로드릭 마을에 파견한 용병까지 합치면 정확히 330명이었다.

철컥-! 철컥-!

울프 용병단의 장기는 숙련된 크로스보우맨의 일제사격 및 순차사격이었다. 그것만으로 어지간한 농민병 부대는 와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장갑 기사들이나 중무장한 용병단을 상대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크로스보우를 백업하고, 유사시 결정타를 먹일 맨앳암즈(Man at arms:중장병)가 필요했다.

그러한 이유로 로벨과 펄프 대장은 특별히 무장 수준에 신경 써서 용병을 모집했다.

철컥-! 철컥-!

“이 자식들아! 똑바로 서 있어! 기사 나리 오셨다!”

울프 용병단의 사열식은 일대 장관이었다. 모양은 제각각 달라도, 크고, 무겁고, 길고, 날카로운 것이 무리지어 질서 있게 움직이니 위압감이 굉장했다.

로벨은 쇠 냄새와 땀 냄새에 흥분하는 모닝스타를 거듭 진정시키며 맨앳암즈 3개 소대 앞으로 다가갔다.

새로 모집한 맨앳암즈는 체인 메일부터 코트 오브 플레이트까지 무장 수준이 기존 풋맨보다 월등히 좋았다. 그만큼 급료가 높지만, 그 부분은 어린 집사의 괴로움으로 남겨두었다.

“중보병 51명, 경보병 34명, 장창병 56명, 장궁병 12명, 쇠뇌병 118명, 포병 27명, 기마병 3명입니다.”

로벨은 펄프 대장의 보고를 받고 반대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기존 울프 용병단과 신규 울프 용병단의 차이가 살짝 보였는데, 기존 멤버는 턱을 바짝 당기고 병장기를 꼿꼿이 세워 경의를 표시한 반면, 새로운 멤버는 짝다리를 짚거나 창에 기대서 구부정한 자세를 보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외국 용병은 하품까지 했다.

‘저 나으리가 진짜 무적무패 나으리야?’

‘곱상하니 토끼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은데?’

‘급료만 제때 주면 따르기야 하겠지만...’

얼굴만 봐도 생각이 보이는 듯했다. 로벨은 개의치 않았다. 실전까지 갈 것도 없이 모의전만 치러도 복종할 것이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중앙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알겠지만! 우리는 ‘진짜’ 싸우는 용병단이야!”

그러자 정복왕 시절의 기사처럼 체인 메일에 쉬르코를 두른 신입 용병이 비웃었다.

“그럼 가짜로 싸우는 용병단도 있습니까요?”

“킥킥킥!”

물론 있었다. 특히 인어의 바다 남쪽 나라에서는 용병대장끼리 짜고 싸우는 시늉만 하며 수당을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기사도 알고, 용병도 알고, 농민도 알지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에구머니나! 진짜로 싸운다니! 무서워서 어쩌지?”

그 용병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용병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한 모양인데, 정도가 지나쳤다.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고참 용병들이 욱! 해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로벨이 먼저 말했다.

“...따라서 얼마나 잘 싸우는지 시험할 거야.”

“오호? 1대 1로 붙습니까요?”

“그것도 좋지만, 그래서 의미가 없어. 우리의 전쟁은 열 명, 스무 명이 싸우는 게 아니니까.”

그 말에 전쟁경험이 풍부한 몇몇 용병이 긴장했다. 도적이나 잡으려고 고용한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로벨은 주제넘은 용병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50대 50으로 붙어보자.”

@

중보병 대 경보병. 숫자는 50대 50이지만, 무게로는 70대 30 정도로 차이가 났다.

기존 울프 용병단의 보병전력은 무장이 가벼운 풋맨과 스피어맨이었다. 반면 새로 뽑은 용병은 중병기에 중장갑을 갖춘 맨앳암즈였다. 어느 영지, 어느 용병단에 들어가도 대우받는 고급 용병이기에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무기와 갑옷보다 중요한 것이 전술이고 협동심이었다.

신(新)과 구(舊) 울프 용병단의 모의전은 구(舊) 울프 용병단의 승리로 아주 싱겁게 끝났다.

“어, 어떻게...? 어떻게...?”

“으헤헤헷! 멧돼지 잡는 것보다 쉽구먼?”

서술하면 간단했다.

구(舊) 울프 용병단은 정면에 창벽을 세우고 조금씩 물러나다가, 상대편이 10야드쯤 끌려 들어오자 양익의 풋맨을 우회시켜 삼면으로 포위, 신명 나게 몽둥이 찜질했다.

글로 쓰고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실제로 써먹으려고 하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차! 하면 중앙이 뚫려 부대가 양분될 수 있고, 좌우익의 기동이 조금만 어긋나도 각개격파 당할 수 있었다. 전쟁사에서 포위섬멸전이 드문 것은 그만큼 위험하고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벨이 지휘하는 울프 용병단은 아주 간단하게 해냈다. 맨앳암즈에 지휘관이 없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 모두 갑옷을 믿고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로벨은 안장머리에 팔을 걸치고 보복성으로 중얼거렸다.

“몸값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데...”

자존심 강한 맨앳암즈는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에 솟은 혹이나 탈골된 어깨보다 수치심이 더 괴로웠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신이 나서 조금 전 조롱을 돌려줬다.

“이놈들아! 우리 기사 나리가 괜히 ‘무적무패’가 아니야.”

“전장에서 안 만난 것을 다행으로 알아. 적으로 만났으면 몽땅 요단강 건넜다.”

전투에서 졌지만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맨앳암즈가 발악하듯 외쳤다.

“시, 실전이면 다르지! 저 기사 나으리만 잡으며 이길 수 있었어!”

그 외침에 200명 가까운 구 울프 용병단이 침묵했다. 기이한 침묵이었다.

겁쟁이 데비가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저, 저 녀석... 광대 출신인가?”

이어서 폭풍 같은 웃음이 쏟아졌다.

“푸, 푸풉! 풉! 기사 나리를 잡아? 우리 기사 나리를?”

“으하하하핫! 올해 들은 농담 중 가장 웃겼다!”

자존심 강한 맨앳암즈는 발끈해서 더 크게 소리쳤다.

“뭐가 웃기냐! 아무리 기사라도 때리면 피나는데! 우리랑 제대로 붙으면 무사할 성 싶으냐?”

광대 출신은 아니어도 외국 출신인 것은 분명했다. 로벨 로드릭의 명성을 잘 아는 포비아 왕국 출신 맨앳암즈도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렸다.

로벨은 그 호승심이 싫지 않아 환하게 웃었다.

“그것도 시험해 볼까?”

“시, 시험?”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와 안장에 걸어둔 메이스를 뽑았다.

“한번 덤벼봐.”

@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맨앳암즈가 로벨 로드릭이란 기사에게 굴복했다.

로벨은 메이스 한 자루로 연거푸 다섯 명을 때려잡고 상큼하게 ‘다음!’을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설 도전자는 아무도 없었다.

유라피아 대륙 각지에서 모인 고급 용병은 고용주의 용병술은 물론, 개인의 무용까지 인정했다. 그래서인지 이후 로벨이 시키는 훈련도 군말 없이 따랐다.

“아이고! 죽겠다! 싸우기도 전에 죽겠다!”

“후... 후하... 내가 여러 용병단을 전전했는데, 여기만큼 빡센 곳은 처음이야...”

실전에 실전을 거듭하며 탄생한 울프 용병단 훈련법은 칼밥을 오래 먹은 베테랑 용병도 따라오기 힘든 수준이었다. 사다리를 짊어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리고, 100야드를 전력질주해서 30초 만에 파비스를 설치하고, 산개와 밀집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크로스보우맨을 엄호했다.

“대체 누구랑 싸우는데 이렇게 빡세게 훈련시킨다냐?”

로벨에게 덤빈 용기를 높이 사 ‘싸움개’란 별명이 붙은 닥스가 툴툴거렸다. 허풍쟁이가 어이없어 되물었다.

“임마, 그것도 모르고 왔냐?”

“높으신 분의 속셈을 알고 온 놈이 어디 있냐? 가격 맞으니까 온 거지.”

싸움개 닥스가 투덜거렸다. 그것이 ‘제대로 된’ 용병이었다. 허풍쟁이는 콧등을 긁적였다. 로벨에게, 그리고 울프 용병단에게 너무 물들어 ‘오늘만 사는’ 용병다움을 잊고 있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의 방아쇠를 점검하며 중얼거렸다.

“눈이 녹으면...”

그리 큰 목소리 아닌데 모두가 집중했다. 애꾸눈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컹- 시위를 걸지 않았음에도 서늘한 소리가 났다.

“...붉은 산으로 갈 거다.”

“붉은 산?”

외지에서 온 용병들은 눈을 껌벅였지만, 볼탄 반도 출신들은 깜짝 놀랐다.

“‘늙다리’ 하인즈 자작의 땅이잖아?”

“잠깐! 붉은 산의 자작과 싸운단 말이오?”

“어? 어어? 그 나으리는 중립 아니었어?”

애꾸눈은 아바레스트를 내려놓고 외눈 안대를 고쳐 맸다. 그리고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시킨 대로 ‘적절한’ 소문을 내었다.

“늙다리 하인즈 자작이 우리 영주님을 배신했다. 그러니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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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틴 지부장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붉은 산의 하인즈 가문은 로드릭 가문의 믿음을 배신했다. 이에 옛 신과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프란시스 시티의 지부장이 ‘배신’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무튼 네 잘못!’으로 함축되는 ‘명분’ 때문이었다.

“클리포드 하인즈 자작은 로벨 로드릭 후작과 맺어주기로 한 레이디를 아무런 양해도 없이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시집보냈다. 이것은 로드릭 가문과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을 모욕한 행위이다.”

로벨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중얼거렸다.

“너무 속 보이지 않아?”

그 혼사가 거론된 것은 햇수로 4년 전이다. 그것도 로벨 쪽에서 흐지부지 무마한 일이다. 어린 집사는 펜에 잉크를 묻히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쟁 명분이란 것이 다 그렇죠. 세상에 수백, 수천 명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정당한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냥 끼워 맞추기죠.”

“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

“아, 나쁜 사람 맞구나.”

어린 집사가 펜을 잉크병에 꽂고 버럭! 화를 냈다.

“영주님은 안 나빠요! 치사하게 광산 가지고 장난질하는 늙다리 하인즈 자작이 나쁜 거죠! 그 자작을 그냥 두면 프란시스 가문의 영주들은 전부 말라 죽어요! 그때 볼프 사트로 후작이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당하겠죠! 우린 정당방위라구요!”

어린 집사의 말에 펄프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의 봉신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나, 나도 알아.”

로벨은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어린 집사는 잉크를 흠뻑 머금은 깃털 펜을 뽑아 다시 글을 써내려갔다.

“이에 진심 어린 사과와 충분한 배상을 요구한다. 만일 거부 시에 로드릭 가문의 명예를 걸고...”

어린 집사는 ‘볼프 후작이랑 놀지 마!’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을 장문으로 작성해서 고이 접었다. 로벨은 촛불에 녹인 밀랍을 조심스럽게 붓고 로드릭 가문의 인장으로 꾹! 눌렀다.

“그럼 보낼 시기만 남았군요.”

로벨은 집무실에 모인 측근들을 한 번씩 보았다. 어린 집사는 항상 그랬듯 뚱한 얼굴이고, 리암 수사는 또 전쟁이냐는 듯 한숨만 쉬었으며, 마녀 키르케는 아무 말 없이 아야와 이야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결국, 펄프 대장이 반백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정대로 하시지요.”

로벨은 차갑게 식어가는 로드릭 가문의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정대로...”

로벨과 그 휘하 기사들은 ‘예정대로’ 눈이 녹는 봄에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로벨이 주도해서 시작하는 첫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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