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26화 (226/605)

226화. 일상

226화. 일상

시간은 게으르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추수가 끝난 텃밭에 붉은 나뭇잎이 한 장, 두 장 떨어지고, 그 위에 하얀 서리가 살포시 내려앉더니, 어느 고요한 밤에 함박눈이 소리 없이 찾아와 뒤덮었다.

“와아아! 와아!”

“까르르륵!”

추위도 피로도 모르는 로드릭 마을 꼬마들은 눈밭을 구르며 즐거워했다.

예전과 달리 ‘배 꺼진다. 가만히 있어라’ 말리는 어른이 없었다. 집집마다 창고마다 부족하지 않게 겨울 식량을 재여 놓았으며, 여름과 가을보단 줄었지만 꾸준히 찾아오는 시장 손님이 있으니 굶을 걱정이 없었다.

로드릭 마을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땅을 갈며 살아온 늙은 농부는 황혼의 끝자락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호밀빵과 우유를 배불리 먹고, 양털을 씌운 의자에 몸을 파묻고, 뉴 로드릭 마을에 정착한 둘째 아들이 보내준 리암 수사표 맥주를 조금씩 홀짝였다. 젊은 시절에는, 아니, 불과 3~4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호사였다.

“이게 다 영주님 덕분이지. 암. 그렇고말고.”

늙은 농부의 독백에 40년을 함께한 아내가 미소 지었다.

세금을 낮추고, 노역을 줄이고, 징집도 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면 용병단을 이끌고 나가서 큰돈을 벌어왔다. 그 돈으로 양도 키우고, 소도 키우고, 농마도 부리고, 도로도 닦고, 멋진 시장도 만들었다.

“옛 신께서 보내주신 분이어요.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노(老)부인은 성호를 그리고 잠시 기도했다. 리암 수사가 온 뒤로 잊고 지내던 신앙이 다시 생겼다. 혹은 먹고살 만해져서 옛 신을 모실 마음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늙은 농부는 혀를 한번 차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철부지 손자가 눈덩이를 던지며 꺽다리 부부네 첫째 아들을 쫓고 있었다. 커서 용병이 되겠다고 속 썩이는 것만 빼면 씩씩하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 그렇지. 옛 신이 보살펴주실 게야.”

늙은 농부는 창문걸이를 치웠다. 탁-! 두꺼운 나무창이 닫히자 금방 온기가 차올랐다.

거룩한 옛 신과 고귀한 기사가 보살피는 로드릭 마을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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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옛 신의 종과 고상한 기사가 거주하는 늑대성은 평화롭지 않았다.

“이 마녀가! 이리 안 와요? 야!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휴우.”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새하얀 칼날을 창밖에 비춰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쾅!

집무실 문이 우악스럽게 열리고 울상이 된 마녀가 뛰쳐 들어왔다.

“기사님! 기사님! 못된 집사가 자꾸 때려요! 못된 집사 좀 말려줘요!”

“...또 와인 훔쳤어?”

“아니에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어저께 훔쳤는데 오늘 또 훔쳤겠어요?”

정말 당돌한 도둑이었다.

“그럼 고기? 치즈? 달걀? 양젖?”

“...왜 죄다 먹는 거예요? 제가 돼지로 보이세요?”

“그거 말고 없잖아.”

그때 머리끝까지 뿔이 난 어린 집사가 나타났다.

“여기 숨었구나! 이 도둑 마녀! 당장 나와요!”

“엄마야!”

마녀 키르케는 날렵하게 로벨 뒤에 숨었다. 로벨은 겁에 질린 마녀를 멀찍이 떼어내고 공명정대한 영주답게 진상을 파헤쳤다.

“왜 그래?”

어린 집사는 거칠어진 숨을 토했다.

“저 못생긴 마녀가 전투마를 몰래 빼갔어요! 그냥 도둑이 아니라 말도둑이에요!”

마녀가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로시난테 3세라고요! 그리고 훔친 것도 아니야! 겨울이라고 하루종일 가둬놓으니까 답답하잖아요!”

“그럼 말을 하고 가져가야지! 그 녀석 찾는다고 울프 용병단까지 동원했어요!”

로벨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며 중재했다.

“음... 로시난테 3세 의견을 들어봐야 할 거 같아.”

어린 집사는 마녀를 볼 때 표정으로, 다시 말해 대단히 한심한 표정으로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몹쓸 표정에 상처를 받았다.

“아무튼 큰일 아니잖아? 앞으로 어린 집사한테 말하고 산책하러 나가.”

“네에!”

마녀 키르케는 어린 집사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어린 집사가 발끈했지만 장소가 장소라 용케 참았다.

로벨은 두 사람을 내보내고 다시 창가에 앉았다. 눈 쌓인 연병장에는 ‘로시난테 3세 수색꾼’이 모여 젖은 신발을 털고 있었다.

어린 집사는 기왕 모인 인력이니 낭비할 수 없다며 제설작업에 투입시켰다. 거센 항의가 쏟아졌으나 어린 집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과 폭력의 스페셜리스트를 진압했다.

“눈 치울래요, 동계훈련할래요?”

울프 용병단은 용감하고 노련한 사내들이었다.

“빗자루가 어디 있죠?”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은 우수한 판단력이었다.

로벨은 연병장 구석구석에 쌓이는 눈 동산을 관람했다. 손재주 좋은 용병이 그냥 쌓기가 지루한지 눈사람과 눈짐승을 만들었다. 그럴듯한 작품이 많이 나왔지만, 오지랖이 넓은 동료들이 자신의 독창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점점 괴기스럽게 변했다.

로벨은 머리가 3개에 몸통에 고드름이 삐쭉삐쭉 솟은 8피트짜리 눈사람을 감명 깊게 구경하다가 엉덩이가 시려 일어났다.

“오늘 할 일은...”

“끼잉- 낑-”

로벨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아야와 이야카가 슬그머니 따라 일어났다.

“어린 집사한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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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란 자리는 놀고자 하면 마냥 놀기 좋고, 일하고자 하면 일거리가 한없이 쌓이는 자리였다.

겉보기에는 화목한 로드릭 영지지만,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는 법이라 영지 안팎에서 매일 같이 소송과 중재요청이 올라왔다. 대부분은 ‘누가 누구네 계란을 훔쳐갔네’ 수준이지만, 가끔 칼부림이 날 만큼 큰 사건도 있었다.

“땅 문제에요.”

어린 집사가 종이뭉치를 정리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록하고 보관할 자료가 아니라 싸구려 마지(麻紙)였다. 어린 집사의 알뜰한 성격상 값비싼 면섬유지를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주님이 새로 개간한 땅을 나눠줬잖아요?”

“그랬지?”

“그중 일부를 늑대도로 확장에 쓰면서 다른 땅으로 바꿔줬는데, 거기가 농사짓기 좋지 않아 그냥 묵혀뒀나 봐요.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안 지어서 일손이 모자라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데 새로 온 정착민이 주인 없는 땅인 줄 알고 건물을 지은 거예요. 그게 시비가 걸려서 온가족이 싸운 모양이에요.”

“촌장은 뭐래?”

“촌장도 난감한가 봐요. 땅주인 편을 들어두면 토착민끼리 싸고돈다고 욕먹고, 정착민 편을 들어주면 촌장의 입지가 흔들리니까요.”

“그래서 집사보고 해결해 달라 했구나?”

어린 집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공명정대한 영주님께 해결해 달라 한 거죠. 불쌍한 집사가 아니라요.”

“그게 그거잖아? 네가 곧 나니까.”

듣는 사람에 따라 의미심장했다. 어린 집사는 나이답지 않게 헛기침을 조금 하고 말했다.

“올해 소출량을 기준으로 땅값을 지불하게 해야죠. 페닝으로 값을 치르거나, 아니면 가축을 몇 마리 내놓거나.”

로벨은 점차 흥미를 느꼈다.

“양쪽 집안이 순순히 따를까?”

“영주님 이름으로 판결해야죠. 그럼 제깟 것들이 어쩔 거예요?”

“아, 그렇구나...”

로벨은 어린 집사의 일처리 방식을 깨달았다. 최대한 공정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생길 수밖에 없는 불만은 권위로 찍어 눌렀다. 양쪽 의견을 계속 저울질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만이 적었다.

“그럼 내가 도울 일은?”

로벨이 순수하게 묻자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우와! 우와앗!”

“왜 그래?”

“영주님이 자발적으로 일하다니! 기적이야!”

“...남이 들으면 오해하잖아.”

어린 집사는 신이 나서 영지내 소송문제를 몽땅 넘겼다. 로벨은 너무 많다고 하소연했지만, 어린 집사가 새로 꺼내는 3배 분량의 종이뭉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영지민의 불만불평 이외에도 볼탄 반도 각지의 사업장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리암 수사와 피터 부자(父子)가 도와주고 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업무량이었다.

로벨은 내뱉은 말이 있어 군말 않고 소송내용을 살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찰드 촌장이 작성해서 올렸는데, 악필에 오탈자가 많아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했다. 로벨이 침음을 흘리자 어린 집사가 톡! 쏘았다.

“그것도 많이 좋아진 거예요. 그래서 방앗간 장남 지미를 촌장 시키자고 했잖아요.”

“...이 정도면 훌륭해.”

로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살폈다. 그리고 솔직히 인정했다.

“...아니네.”

“그렇죠?”

로벨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을 직접 만나야겠어.”

“그게 좋을 거예요. 아참, 리암 수사랑 같이 가세요. 마을 사정을 잘 아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컹! 컹컹”

아야와 이야카도 몸을 일으켰다. 오늘 가장 신난 것은 심심한 늑대 남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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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리암 수사와 아야와 이야카를 이끌고 꽁꽁 얼어붙은 로드릭 마을을 시찰했다. 무지해서 용감하고 순수해서 격의 없는 마을 꼬마들이 ‘영주님~ 영주님~’ 노래 부르며 졸졸 따라왔다. 지미와 루시의 여관에 머무는 외지인은 늑대와 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기사를 생소하게 보았다. 로드릭 마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My Lord.”

외지인 중에는 기사도 있었다. 오늘 막 도착한 듯 신발이 눈투성이고, 후드와 망토도 젖어있었다.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다가 깜짝 놀랐다.

“켈트 경? 켈트 경이 이곳에 무슨 일이오?”

바위성의 켈트 경이 수행원 몇 명과 함께 찾아왔다. 이 계절에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봉신은 드문데, 그 봉신이 로벨에게 까칠한 켈트 경이라 더욱 의아했다.

켈트 경은 다시 한 번 목례하고 대답했다.

“지금 막 찾아뵈려던 참입니다.”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칼을 찬 기사들이 모여서 숙덕거리자 불안한 듯 다들 자리를 피했다. 로벨은 캐벌리어 모자를 고쳐 쓰고 말했다.

“송사(訟事) 때문에 촌장집에 가는 중이오. 같이 가겠소?”

켈트 경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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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마을 촌장 찰드 씨는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영주님과 수사님도 난감한데, 그 뒤로 송아지만한 늑대와 말 안 듣는 꼬맹이와 어떻게든 근엄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기사와 흉흉한 병장기를 소지한 수행원이 연거푸 들어왔다.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썰렁하다 여겨온 사냥꾼 시절 집이 온갖 종류의 인파로 꽉 찼다.

“저, 저기, 영주님? 나으리? 술이라도 내올깝쇼?”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소송서류를 정리했다. 찰드 촌장은 발발거리는 늑대와 겁 없이 늑대하고 뒹구는 꼬마들 때문에 자신이 작성한 서류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촌부들의 소송에 관심이 없는 것은 바위성에 온 기사 나으리도 마찬가지였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결혼합니다.”

로벨은 뜬금없는 결혼소식에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아... 축하해야 하오?”

“상대가 붉은 산의 하인즈 자작 막내딸입니다.”

로벨은 켈트 경이 화급히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켈트 경의 영지인 바위산은 붉은 산과 가까웠다.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켈트 경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로벨은 가장 난해한 문서를 찰드 촌장에게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했소.”

“그럼 대안이 있습니까?”

로벨은 두 손을 깍지 껴서 테이블에 올렸다. 꼬마들이 집안을 어지르며 뛰어다녔다. 한 계집아이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늑대 꼬리가 재미있는지 자꾸 잡아챘다. 아야와 이야카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의 반도 안 되는 꼬마의 장난으로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 녀석들도 나이를 먹으니 꽤 점잖아졌다.

로벨은 별일 아니란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먼저 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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