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추억
205화. 추억
북해는 남쪽 인어의 바다와 달리 파도가 거칠고 해류가 빨랐다. 지난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만하게 갤리선에 오른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북해의 사나운 파도 앞에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으으... 죽을 거 같아...”
“아이참! 전쟁터에서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로벨은 무장 갤리선 청상아리 호의 선실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앓아누웠다. 파도가 수시로 갑판을 덮치는 선상이나 썩은 내가 진동하는 선창보단 낫지만 결코 아늑하지는 않았다.
화재 위험 때문에 촛불을 밝히지 못해 한낮임에도 초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머리 위에서는 멀미로 죽어가는 용병들의 신음 소리가, 발아래에서는 채찍질에 자지러지는 노잡이 노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둡고 음험한 세계가 파도에 휩싸여 끊임없이 흔들렸다. 옛 신의 사제가 말하는 종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거 참 영광이군.”
그때, 청상아리 호의 선장이자 선주인 주드 맥켈런 남작이 들어왔다. 로벨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며 주인을 맞이했다.
“영광?”
“암. 무적무패의 로벨 경을 쓰러트렸으니 길이 남을 영광이오.”
로벨은 농담을 받아줄 기운이 없어 대충 손사래 쳤다.
“본인의 부하들은...?”
“멀미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사람보다 말이 걱정이지.”
“모닝스타 말이오?”
“그놈 이름이 모닝스타요? 약을 먹여도 진정하지 않아 별수 없이 네 다리를 묶어 눕혀놓았소. 주인을 닮아 사납기가 그지없더이다.”
“순순히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소. 제기랄. 내 종자의 갈비뼈가 나갔소. 이 나이에 손수 갑옷을 닦게 생겼소.”
어린 집사가 고소하다는 듯 몸을 돌리고 히죽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그런 어린 집사를 너그러이 용서했다.
“사트로 시티 항구에 내려 곧장 검은 성을 공격할 생각이겠지만, 지금 작태를 보아 어려울 듯하오.”
“아니. 안 되오. 사트로 시티로 가야... 우욱-! 가야 하오.”
로벨은 헛구역질하면서 할 말을 다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고행하는 수도사처럼 정좌하고 앉아 팔짱을 끼었다.
“적의 본진을 기습할 기회가 흔치 않지. 검은 성을 점령하면 전황을 바꿀 수 있을 테고.”
“내 말이...”
“허나 병력이 부족하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주름진 눈매가 빛났다. 그는 ‘쇳가루와 말똥’이라는 기사의 편견을 깨는 인물이었다.
“경의 병사는 고작 200명 남짓이오. 내 병사는 그보다 적어서 노잡이 노예를 제외하면 100명이 채 안 되오. 우리 합쳐서 300명이오.”
“기습하면...”
“볼프 사트로 후작이 그리 만만한 줄 아시오?”
로벨은 짚더미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린 집사가 쪼르르 달려와 부축했지만 손을 저어 쫓아냈다.
“그래도 해야 하오.”
로벨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뜬다는 주장만큼 확고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소리 없이 웃었다.
“로벨 로드릭 경을 가리켜 빈집털이의 달인이라 하더군.”
로벨의 얼굴이 붉어졌다. 맥켈런 남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신이 용감하다 착각하는 바보들이 조롱이라 한 말인데, 기실 전술이란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얼마나 멍청한 헛소리인지 알 테지.”
전술의 목적은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전과를 얻는 것이고, 전술의 원리는 적을 속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성기술이나 진법 따위는 사소한 기교에 불과하다. 로벨은 타고난 재능과 다양한 전쟁경험으로 자신만의 전략 · 전술을 확립했다.
“경은 아니지.”
주드 맥켈런 남작은 재능 넘치는 아들, 혹은 영특한 새내기 기사 종자를 보듯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기억 저편의 아련한 향수로 순간 멀미를 잊었다.
여름꽃의 향긋한 냄새. 우물가의 젖은 냄새. 빵 굽는 고소한 냄새. 기사를 꿈꾸는 철부지 소녀가 작대기를 휘두르자 근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오라비가 미소로 화답한다. 정오의 햇살처럼 밝고 한여름의 뭉게구름처럼 포근하다.
“허나,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오. 검은 성은 북방의 야만족을 막기 위해 건설된 난공불락의 요새요. 그리고 볼프 후작은 영악한 자지.”
로벨은 추억의 화원에서 요동치는 북해로 돌아왔다. 불 꺼진 램프가 삐걱- 삐걱- 소리 내며 흔들리고, 갑판 아래로 바닷물이 새어 들어왔다. 차가운 갑옷과 딱딱한 칼자루가 전장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로벨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현실에 적응했다. 이제 12살의 소녀가 아니었다. 응석부릴 시절은 지나갔다.
“설령 함락하지 못해도 괜찮소. 사트로 가문 봉신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을 테지. 그들의 성까지 안전하지 않을 테니까.”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지. 허나 마무리도 생각해야 할 것이오.”
로벨은 한 시대를 풍미한 노기사와 전술을 맞춰보았다. 왕국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자리지만 그다지 품위 있지는 않았다. 그랜드 챔피언도 멀미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우욱-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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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로 시티는 북해에서 손꼽히는 교역항이었다. 어린 집사에게 교역항의 조건을 물으면 3피트짜리 양피지를 앞뒤로 꽉꽉 채우겠지만, ‘기사’ 로벨 로드릭은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개방성’이었다.
“꺄아아아악!”
여인네의 찢어지는 비명이 300년 묵은 도시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 정직하게 따지면, 정박지에 빼곡히 늘어선 어선을 들이박으며 선착장까지 들이닥친 3척의 전함이 원흉이었다.
“머, 뭣이여? 해적이여?”
“카악! 용병이다!”
뱃전 위로 들려진 노 사이로 무장한 병사들이 뛰어내렸다. 억세기로 유명한 선원들은 커틀러스와 행거를 빼들고 맞서려 했으나, 풀 플레이트 차림의 기사까지 등장하자 선원 나부랭이가 끼어들면 안 되는 상황, 즉 전쟁 상황임을 깨닫고 줄행랑쳤다.
로벨은 흔들리지 않는 땅을 밟고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렸다.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비명 지르며 뿔뿔이 흩어지는 도시민을 둘러보았다. 무장한 선원과 떠돌이 용병이 몇 명 보이지만 군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기사 나리, 어쩔깝쇼?”
외팔이 더치가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주었다. 조상 대대로 전해진 약탈자의 피가 끓어오른 듯했다. 그러나 허락할 수 없었다. 로벨은 시선을 높은 곳으로 옮겼다. 커다란 조선소와 뾰족한 교회탑과 넓적한 저택 위로 외로울 만큼 홀로 솟은 성이 있었다. 사트로 가문의 검은 성이었다.
“우리 목표는 저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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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 전투는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12기사 가문의 성답게 구조 자체도 철옹성인데, 성탑마다 5파운드짜리 최신형 팔콘 대포가 설치되어 접근을 불허했다. 지상보다 30피트 높이의 언덕, 그리고 언덕에서 17, 8피트 높이로 쌓은 성탑에서 쏘아 재끼는 포탄은 무시무시했다. 어지간한 군대는 질려서 공격을 포기할 것이다.
“재장전! 재장전!”
로벨 로드릭 후작군과 주드 맥켈런 남작군이 물러나지 않은 것은, 두 지휘관의 부대 장악력이 뛰어난 탓도 있지만, 검은 성에 뒤지지 않는 화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파이어!”
콰콰콰콰-쾅-!
울프 용병단의 팔코넷 5문과 청상아리 호에서 가져온 팔콘 2문, 도합 7문이 검은 성을 향해 불꽃을 토했다. 300년 동안 증축하고 보강해온 검은 성의 성벽이 흔들렸다. 여장이 깨지고, 상층부가 무너져 돌담처럼 변했다. 그러나 사트로 가문의 기사들은 용맹했다. 대포와 쇠뇌로 응전하는 한편, 자재를 모아 목책으로 보강했다. 아무리 용맹한 울프 용병단이라도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언덕을 올라 목책을 허물기는 힘들었다.
“파이어!”
콰쾅-!
펄프 대장 입에서 구령이 나올 때마다 어린 집사가 발을 동동 굴렸다. 포탄과 화약이 전부 돈이었다.
“2,000페닝... 2,500페닝...”
어린 집사는 저 돈으로 할 수 있는 영지 사업을 떠올리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검은 성의 재무관만은 못했다. 로벨 연합군에 의해 깨지는 성벽은 둘째 치고, 아군이 쏘는 포탄이 시가지를 깨부수고 있었다. 포탄, 화약, 성벽, 주택, 도로까지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었다.
“야! 이 망할 놈들아! 그냥 칼로 싸워라!”
로벨은 이름 모를 재무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래서는 결판이 안 나.”
대포의 위력이 어중간했다. 성벽을 허물기는 부족한데, 무시하고 돌격하기는 위험했다. 로벨은 겁쟁이 데비를 소환했다.
“화약이 얼마나 남았어?”
“에... 세 자루 반 남았습니다. 열 번 정도 쏠 수 있지요.”
“열 번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까?”
“대포가 먼저 깨집니다요.”
겁쟁이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청동 대포는 안정성이 높은 대신 장시간 쏠 수 없었다. 소구경이라도 2, 3번 쏘면 열을 식혀야 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더했다.
“적의 지원군이 올 거야.”
로벨은 검은 성을 점령해서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철수시키는 방법을 포기했다.
“그럼 어쩌죠?”
로벨의 목소리가 닿는 범위의 모든 기사와 용병이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적의 거점을 점령하는 것과 적의 군대를 괴멸시키는 거야.”
“적의 거점은 여긴데, 점령이 안 되니까...”
“...적의 군대를?”
로벨은 포격을 중지시켰다. 포신이 깨질까 봐 조마조마해 하던 포병들은 얼씨구나 바닷물을 끼얹었다. 보람찬 일과가 끝났다.
“덩굴성을 지나 버팅거 시티로 가자.”
펄프 대장이 눈이 한껏 커졌다가 도로 작아졌다.
“그 길은... 볼프 후작군의 진군로잖습니까?”
“응. 적의 배후를 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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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검은 성을 만 하루 동안 맹렬히 공격 후 자취를 감추었다. 볼탄 반도 북부 영주들은 검은 성이 공격받은 것 이상으로 깜짝 놀랐다.
검은 성을 삼키지 못해 단단히 화가 난 ‘맹수’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선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리 느껴졌다.
사트로 가문의 봉신 중 상당수가 원정을 포기하고 자신의 영지로 후퇴했다. 로벨의 공격에 검은 성조차 위기를 겪었는데, 자신의 빈약한 본거지가 버틸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과시가 아니라 은폐로 공포를 주는데 성공했다.
“이야! 날씨 좋다!”
“이 안개가 그리웠어. 그래. 아침은 이래야지.”
수많은 영주들을 공포에 빠트린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붉은 산의 오솔길을 통해 한가로이 남하 중이었다. 어깨와 허리에 걸쳐진 흉악한 병장기만 아니면 순례 중인 수도사 행렬이라 해도 믿을 만큼 여유로웠다.
“고향땅이 좋긴 좋군요.”
“...응.”
로벨과 로벨의 봉신들은 물론이고, 울프 용병단도 상당수가 볼탄 반도 출신이었다. 울퉁불퉁한 언덕과 구불구불한 강줄기와 듬성듬성한 숲이 정겨웠다. 긴장이 절로 풀릴 정도였다.
‘그럼 안 되지!’
로벨은 늘어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차갑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그러나 큰 효과는 없었다. 어린 집사는 당나귀가 알아서 걷게 두고 지도를 꺼냈다.
“이대로 쭉 가면 하인즈 자작령이 나오고, 거기서 붉은 강을 따라가면 덩굴성과 호수성을 차례로 지나가요.”
“하인즈 자작?”
로벨과 인연이 ‘있을 뻔’한 자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