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04화 (204/605)

204화. 수평선

204화. 수평선

포비아 왕국 해방군은 초승달 강의 지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검은 숲 지리를 잘 아는 제임스 가문 기사가 선두에 서고, 전쟁경험이 많고 무장이 우수한 로드릭 가문 기사와 울프 용병단이 중진을 맡았으며, 떡갈나무 성 전투로 피로가 쌓인 자비에 가문 기사가 후미를 담당했다. 앞서 전투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900명이 넘는 대병력이었다.

강변을 따라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가는 긴 행렬. 키가 큰 병사는 모리안(Morion:모자형태 투구)의 햇빛가리개까지 높아 위태위태해 보이고, 키가 작은 병사는 자신의 3배쯤 되는 롱 파이크에 매달려서 가는 것 같았다. 무기도, 갑옷도 되는대로 갖춰서 세부적으로 보면 우스꽝스러운 꼴이 많았다. 그러나 100야드만 떨어져서 보면 웃을 수 없었다. 체격에 안 맞고 용도에 안 맞아도 살인하기에 충분한 힘과 그 힘을 발휘하는데 거리낌 없는 기백이 있었다. 그래서 대단히 무서운 군대였다.

위풍당당한 행렬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중장갑 차림의 기사들이 모인 곳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와 깨끗이 씻긴 전투마가 나란히 이동하자 마상시합장의 퍼레이드처럼 화려했다. 그러나 진짜 퍼레이드처럼 무게감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이오. 기회가 되면 로벨 경의 무용담을 직접 듣고 싶었소.”

“내 고향에는 100년 묵은 커다란 코르크나무가 있다오. 후작께서 원하면 베어다가 선물하리다.”

로벨은 눈치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치근덕거리는데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는 우리 기사님이 인기가 많다고 좋아했지만...

“후작, 블랙우드 시티에서 승산이 얼마나 있다고 보십니까?”

“몇 차례 패전했어도 사트로 가문은 만만한 적이 아니오.”

“혹시 승리를 위해 생각해둔 바가 있소?”

포비아 왕국의 기사가 모두 아첨꾼은 아니었다.

출세에 큰 뜻이 없는, 혹은 출세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기사들은 전쟁의 향방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거기에는 ‘무적무패’라 불리는 로벨 로드릭에 대한 호기심과 호승심도 일부 있었다. 로벨은 여러 기사의 기대를 가볍게 저버렸다.

“블랙우드 시티는 제임스 가문의 영지인 만큼 제임스 공작의 뜻을 따를 생각이오.”

제임스 공작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지난날처럼 때려눕혀서라도 막겠지만, 지금은 적법하고 정당한 주인을 배려해야 했다. 로벨이 상식적으로 나오자 야심 많은 기사들이 실망했다.

그러나 진짜 실망할 일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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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우드 시티는 두 번째지만, 처음과 완전히 달라 감회가 새로웠다. 시체의 산이나 불타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욕심 가득한 약탈병과 추악한 고블린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뭐야?”

외팔이 더치가 기운차게 뽑은 손도끼를 어찌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외팔이는 성벽 위를 까맣게 채운 적병과 수성용 병기, 북해의 찬바람에 거세게 나부끼는 깃발 따위를 상상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블랙우드 시티에는 기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성문은 활짝 열렸으며, 대포와 투석기는 고사하고 돼지 잡는 도살용 칼 한 자루 볼 수 없었다. 성벽 위에는 비무장 시민 몇몇이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 소설을 자주 읽은 마녀 키르케가 제일 먼저 의심했다.

“함정이 아닐까요?”

로벨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기사의 숫자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많아. 병사도 블랙우드 시티 출신이 많고. 시가전이 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애써 복구한 성벽과 성문을 놔두고 성 안에서 싸울 리 없어.”

“그럼 볼프 후작군은 어디 간 걸까요?”

로벨을 포함한 고명한 기사 모두가 당혹했다.

고생고생해서 적의 본거지에 도착했더니, 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싸우기 싫다고 노래 부르던 병사조차 허탈해했다. 기쁨보다 황당함이 컸다.

“영주님이 무서워서 내뺐나 봐요.”

“그럼 어디로?”

로벨의 군대가 검은 숲 남동부를 장악하고 있다. 빠져나갈 곳은 서쪽의 위험천만한 검은 숲과 북쪽의 칠흑 같은 바다...

“북해야.”

블랙우드 시티와 사트로 시티는 뱃길로 이어져 있었다. 북해를 통해 군대를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로벨 및 신왕파 기사들이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볼프 후작은 아껴둔 사트로 가문의 군대를 소리소문 없이 회군시켰다. 그 목적은 분명했다. 로벨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볼탄 반도가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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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파 주력군이 포클랜드 시티와 블랙우드 시티에 발이 묶여있는 사이, 볼프 사트로 후작과 도반 도트넘 백작이 이끄는 구왕파 주력군은 노도 같은 기세로 볼탄 반도 남부를 휩쓸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하루 만에 덩굴성이 함락되고, 사흘 뒤에 팔콘 요새와 버팅거 시티가 함락되었다. 행군 속도가 곧 점령 속도였다. 1천 명이 넘는 정예 병력과 철저히 준비한 물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프란시스 공작령의 동부를 방어하는 몰드 헤르만 백작이 기이하게 침묵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스톤헤드 요새로 군대를 모았으나 호응이 좋지 않았다. 이름 있는 기사들은 원정을 떠났고, 그나마 볼탄 반도에 남은 기사들도 자기 땅을 지키기에 바빴다.

애꾸눈 볼포스가 외눈 안대를 고쳐 묶고 고용주와 고용주의 최측근을 한 번씩 보았다.

“스톤헤드 요새가 함락되면 프란시스 시티가 위태롭고, 프란시스 시티가 함락되면 볼탄 반도 전체가 볼프 후작 손에 넘어갑니다.”

그 말에 아야와 이야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좋아하던 마녀 키르케가 울상 되었다.

“그럼 우리 늑대성은요?”

“삼면이 포위당하면 방법이 없죠.”

어린 집사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로벨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 실수야. 웨던 남작이 충고했는데... 늑대의 왕이 경고했는데... 볼프 후작이 북부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알았는데...”

로벨이 생각 이상으로 우울해 하자 어린 집사가 뒤늦게 위로했다.

“아니에요. 그래서 수비군을 300명이나 두고 왔잖아요? 에릭 공작이랑 페르젠 백작한테도 경고했고요. 이게 다 헤르만 백작, 그 비열한 배신자 때문이에요! 호수성은 싸우지 않았다죠? 피는 못 속여요. 에라잇! 더러운 배신자!”

한 명은 울먹이고, 한 명은 자책하고, 한 명은 화를 내어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어린 상전이 어려워서 나이 든 상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펄프 대장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상기했다.

“늑대성으로 회군하시지요.”

“이곳은 어쩌고?”

“블랙우드 시티를 탈환했으니 영주님 역할은 끝났습니다. 노동의 대가를 받기도 전에 돌아가는 것이 안타깝지만, 집에 난 불부터 꺼야지요.”

로벨과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모두 회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회군하는 방법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그런데 어떻게요?”

“어떻게 라니? 왔던 길로 가야지?”

“여기서 늑대성까지 대군을 이끌고 가면 아무리 빨리 가도 열흘이에요. 게다가 식량은 어쩌고요? 긁어올 수 있는 것은 거의 긁어 와서 돌아가는 길에는 풀만 뜯어먹어야 할 걸요?”

어린 집사가 별일 아니란 듯 반박했다.

“이 도시에서 열흘 치 식량을 가져가야죠. 이곳 사람은 농사를 안 짓지만, 어업이 발달해서 청어절임 같은 보존식량이 꽤...”

“앗! 그거야!”

로벨이 큰 소리로 고함쳤다. 숙소 밖에서 염탐하던 발가락 슈미츠와 기타 음흉한 용병 패거리가 깜짝 놀라 뛰어 들어왔다. 성격이 급한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도끼와 칼까지 빼들었다.

“거기서 뭣들 해요?”

어린 집사는 대단히 못마땅하게 노려보았고, 마녀 키르케는 광대극을 본 것처럼 깔깔 웃었다. 로벨은 그러거나 말거라 방금 떠오른 생각을 정리했다.

“청어절임! 청어절임이야!”

“아... 청어절임이 드시고 싶으세요?”

“응! 아, 아니야! 그게 아니고! 청어 잡으러 가자!”

로벨이 횡설수설하자 영리한 집사, 쾌활한 마녀, 거친 용병 패거리가 다 함께 근심했다.

‘전쟁을 오래 하면 정신분열증상이 나타나지?’

‘고향이 위험해서 그런 거야. 금방 좋아지실 거야.’

로벨은 걱정 가득한 시선 속에서 재차 말했다.

“청어잡이로 유명한 곳이 어디야?”

어린 집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청어잡이는 잉그비아 왕국이 유명하지만, 우리 왕국만 보면 여기 블랙우드 시티랑 사파이어 섬이랑 사트로 시티... 아앗!”

“이제 알았어?”

로벨은 본의 아니지만 아랫사람의 지능 순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 집사를 시작으로 차례로 탄성을 질렀다. 평소 똑똑하다고 생각해온 순서였다.

외팔이 더치의 어색한 감탄사-눈알을 열심히 굴리는 것을 보아 아직 이해 못 했다-를 마지막으로 로벨이 명령했다.

“어린 집사, 항구로 가서 어부를 찾아봐. 키르케와 허풍쟁이는 호른 경과 여러 봉신들에게 회군 사실을 전해. 펄프 대장과 애꾸눈은 무기와 물자를 준비해. 난 제임스 공작에게 지원군을 요청해볼게. 모두 서둘러야 해. 빠르면 3일 뒤에 출발할 거야.”

“3일이요? 오늘이 아니고요?”

외팔이가 되물었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3일도 부족할 거야. 왜냐하면 우린 6일 뒤에 전투를 치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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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후작군이 블랙우드 시티 항구에 정렬했다. 로벨을 따라가기로 한 기사와 용병들, 비록 따라가진 않아도 배웅차 나온 제임스 공작과 자비에 후작 일행으로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어부들은 아침 바다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부두 광경에 슬그머니 뱃머리를 돌렸다. 인부들은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퀴퀴한 선술집을 찾아 흩어졌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힘겹게 터전을 일궈가는 도시민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은 양보할 수 없었다. 자비에 후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자는 사트로 가문의 사람이오. 정녕 올 거라 생각하시오?”

“올 것이오.”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로벨은 조용히 웃었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수평선 아래에서 여러 개의 깃발이 떠올랐다. 로벨 이하 항구의 모든 사람이 손그늘을 만들고 눈살을 찌푸려가며 깃발을 살폈다.

로벨의 비밀스러운 스승이자 청옥섬의 주인. 구국의 영웅 혹은 북해의 사자라 불리는 주드 맥켈런 남작의 깃발이었다. 세 척의 갤리선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긴가민가하던 기사와 용병이 환호성을 질렀다. 로벨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주드 맥켈런 경은 참된 기사요. 왕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작금의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소.”

그러자 호른 경이 어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런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지만, 혼란으로 따지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번 전쟁은 에릭 공작과 로벨 등이 신왕을 옹립하고 구왕을 배척한 탓도 있었다. 전후사정이 복잡하지만, 결과적으로 로벨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도 있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을 수많은 음모와 모략이 있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맥켈런 가문의 장자 호그 맥켈런의 원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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