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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77화 (177/605)

177화. 드루이드

177화. 드루이드

하얀 숲에는 참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등등 다채로운 나무가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여러 나무가 자라있지만,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였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비추자 하얀색이 더욱 도드라졌다. 한겨울에 눈이 내린 것처럼 온통 하얀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얀 숲이구나.”

“어어? 기사 나리도 처음이십니까요?”

“응. 너무 멀잖아.”

새소리, 풀벌레소리, 짐승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로 수십 명 무장 용병이 지나갔다.

창이 나뭇가지에 걸릴 때마다 투덜거리고,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헬멧을 자꾸 끌어올리고, 아침에 먹고 남은 비스켓을 조금씩 갉아먹고, 텅 빈 수통을 탈탈 털어서 마지막 한 방울로 입술을 적시고... 한적한 숲 속 오솔길에 어울리지 않는 분주한 집단이었다.

“사실 하얀 숲이 하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요.”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로 뒷짐 지고 깡충깡충 따라왔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의 눈빛이 빛나는 것을 걱정했다.

“저 자작나무 말고?”

“예! 진짜 진짜 아주 진짜 하얀 나무가 있거든요? 진짜 하얘서 하얀 숲이 되었어요.”

“그런 게 있어?”

“이렇게에어 생긴 떡갈나무에요! 가지가 막 이렇고요. 잎이 막 이렇게 자라는데...”

마녀 키르케가 두 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는데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직접 보면 알겠지.”

“음... 그치만 못 볼지도 몰라요.”

로벨은 의아해서 마녀를 보았다. 그러나 설명을 듣지 못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수레의 속도를 줄이며 속삭였다.

“기사 나리, 이상한 놈들이 있습니다요.”

로벨은 소드 벨트를 아래로 내리고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차례로 점검했다. 로벨 만큼이나 노련한 울프 용병단도 자연스럽게 병장기로 손을 옮겼다. 창대를 짧게 잡고, 도끼머리 고정끈을 젖히고, 파비스의 어깨끈을 느슨하게 풀고... 그런 준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한 놈들’이 손바닥을 보이며 길을 막았다.

“이곳은 노릭스 후작님의 땅이다. 정체와 목적을 밝혀라.”

로벨은 용병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허풍쟁이의 묘사는 정확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꽤 더워 보이는 꼬뜨를 뒤집어썼다. 얼핏 보면 수도사 같은데, 꼬뜨 아래로 길쭉이 삐져나온 칼집과 쇠뭉치, 움직일 때마다 철그덕거리는 쇠사슬과 쇠징 소리가 무장수준을 짐작케 했다.

‘스무 명? 숲 속에 더 있겠지?’

로벨은 좌우 수풀을 살피며 대화를 시도했다.

“노릭스 가문의 사람이야?”

기사가 등장하자 가짜 수도사들이 당황했다.

“걱정하지 마. 싸울 생각 없어.”

로벨은 가짜 수도사를 안심시키고 허픙쟁이에게 눈짓했다. 허풍쟁이가 헛기침하고 고용주를 소개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을 모시는 로드릭 가문의 기사이자 늑대성, 바위성, 가시성, 구릉성, 늪지성, 호른 성, 가시나무 성의 적법한 영주이고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며 포클랜드의 소드 마스터인 로벨 로드릭 백작님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허풍쟁이 장문의 소개를 술술 해내자 마녀와 울프 용병단 동료가 박수쳤다.

“와아! 대단해요!”

“어린 집사가 봤어야 하는데!”

허풍쟁이는 칭찬이 싫지 않은 듯 콧대를 살짝 높였다.

“험험! 기사 나리를 따라다닌지가 몇 년째인데, 이 정도야.”

로벨은 61명분의 부끄러움을 독차지했다. 기왕이면 좀 더 무게감 있게 행동하면 좋을 듯했다. 그러나 가짜 수도사는 충분한 무게를 느꼈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백작!”

가짜 수도사가 순차적으로 탄성을 질렀다. 로벨 일행은 로벨의 명성이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하얀 숲까지 퍼져있나 신기했다.

“본인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둠 노릭스 후작님을 모시는 서 숄트라 하오.”

“아, 기사였소?”

로벨은 흉갑을 한번 두드렸다. 기사끼리의 예의고 존중이었다.

노릭스 가문의 기사가 길을 열고 말했다.

“손님이 올 거란 말은 들었지만 그랜드 챔피언일줄은 몰랐소. 이쪽으로 오시오.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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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릭스 가문은 12기사 가문 중 가장 독특한 가문이었다. 우선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 가문이다.

“엉? 12‘기사’잖소?”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까 기사는 기사죠.”

“아, 그런 거요?”

그리고 건국 이전부터 하얀 숲의 유서 깊은 토후였다. 샘 포클에게 패배해서 충성한 다른 기사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혹자는 샘 포클의 공명정대한 성품에 감동해서 그랬다고 하고, 혹자는 마법사의 혜안으로 미래를 보았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가장 적은 피와 가장 작은 희생으로 공신반열에 올랐다.

“하얀 숲은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라서 힘으로 정복하려 했으면 검은 숲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거야. 그리되면 동방원정이 불가능했을 테고, 볼탄 반도는 아직도 야만의 땅으로 남아 있었겠지.”

로벨은 어린 시절 배운 역사를 들려주었다. 마녀 키르케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둠 노릭스 마을, 혹은 순백의 마을이라 불리는 하얀 숲 마을에 도착했다. 숲 속 마을을 본 소감은 극과 극이었다.

“우와! 요정 마을 같아!”

“뭐야? 딱따구리 소굴이잖아?”

숲을 일부 개간하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자연 그대로였다. 비좁은 공터에 집을 짓다 보니 하나같이 작고 옹색했다. 하지만 평범한 시골 마을은 아니었다. 나무 위에 망루 같은 움막을 짓고 동아줄로 다리를 놓아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숲에서 노는 아이들이 만든 비밀기지 같은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땅을 걸어 다니는 사람과 나무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반반이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친환경적인 고층건물에 감탄했다.

“정신 사나운 숲지기 집이군.”

“우리 동네 숲지기는 허리가 안 좋아서 이런 거 못 만들어.”

로벨 일행이 지나가자 마을주민이 움막 밖으로 나와 기웃거렸다. 거칠고 사나운 용병이 나타났는데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외부인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없는 모양이다. 마을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시야가 탁 트일 만큼 넓어졌다. 땅이 넓어지자 집도 많아졌다.

“어라? 집 같은 집도 있는데?”

“오! 그렇네?”

로벨 일행은 마을 중심에 자리한 집을 한 채 보았다. 안뜰에 당나귀가 한 마리 묶여있고, 지붕에 닭인지 오리인지 모를 조류가 꿰엑! 꿰엑! 울부짖는 ‘집 같은 집’이었다.

“저 정도만 되어도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일 거야.”

“오랜만에 생각이 일치하는군.”

울프 용병단의 추리는 정확했다. 노릭스 후작의 기사가 집주인을 소개했다.

“이곳이 둠 노릭스 후작님의 성(Keep)이오.”

“...성?”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단련 받은 자제력으로 표정을 관리했지만, 외팔이 이하 울프 용병단은 높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과장된 표현 없이 마구간만한 성이였다.

“성에 딸린 창고 같은 게 아니고?”

“에이, 저 기사 나리가 농담한 거겠지.”

울프 용병단이 왁자지껄 떠들자 기사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눈치 빠른 허풍쟁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만하면 있을 거 다 있겠다. 우리가 성 가지고 뭐라 하면 좀 그렇잖아?”

“뭐라는 거야? 이건 애초에 성이 아니잖아?”

외팔이가 버럭! 소리치자 기사가 성난 그리즐리처럼 노려보았다. 기사 공포증이 있는 외팔이는 찍소리 못하고 허풍쟁이 뒤에 숨었다.

로벨은 무례한 부하들에게 성 밖에서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사실 60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후작을 만나고 올 테니 쉬고 있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란 것을 잊지 말고.”

“으하핫! 걱정 마십시오! 꼼짝도 안 하고 기다리겠습니다요!”

로벨은 사고치지 말라고 당부하려다가 그만뒀다. 어린 집사가 없어서 아쉬웠다. 어린 집사라면 숨 한번 쉬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일러주었을 것이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늑대 남매만 대동하고 성 안에 들어갔다.

성문을 지나자 생각보다 넓은 홀이 나왔다. 영주의 의자가 맞은편에 자리하고, 중간에 기다란 탁자가 줄지어 있었다. 촛대, 횃불, 동물가죽 등등 허풍쟁이 말대로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둠 노릭스 후작까지 말이다.

“초기 겔몬 족 저택일세. 700년 전만해도 이정도면 대족장의 집이었지.”

성 밖의 소란을 전부 들은 모양이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성이 작았다.

로벨은 노릭스 후작을 자세히 보았다. 고목 껍질 같은 밤색 머리 사이로 탈색된 듯한 흰머리가 희끔희끔 자라있었다. 눈꺼풀이 두툼하고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데 눈이 맑고 허리가 꼿꼿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꾸깃꾸깃한 고깔모자와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지참하니 누가 봐도 마법사였다. 마녀 키르케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누구?”

마녀의 얼굴이 석양만큼 붉어졌다. 로벨에게 친한 척 말해놨는데 거짓말이 되었다.

“저 키르케에요! 레일라 뮬의 제자요!”

노릭스 후작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레일라... 레일라... 그래. 파나케아의 드루이드였지. 기억이 나는군.”

로벨은 익숙한 이질감을 느꼈다. 날카로운 둔기나 가벼운 중장갑만큼 어색한 표현인데,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익숙한 이질감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야?”

노릭스 후작은 빙그레 웃었다.

“마도에 몸을 담그니 이상한 감각이 생겨난 모양이군. 이처럼 바로 알아보다니 말이야.”

노릭스 후작은 고깔모자를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오래된 꼬뜨 때문인지, 아니면 어두운 배경 때문이지 흡사 고목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겔몬 족의 위대한 족장이자 떡갈나무의 화신, 최초의 드루이드이며 최후의 예언가. 둠 노릭스라고 하네.”

소개 방법이 귀에 익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꼭 저렇게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닌가?

“마도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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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노릭스 후작의 권유를 받아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정체를 알게 된 만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언제든지 칼을 뽑을 수 있게 손을 올려두었다.

노릭스 후작 의자 아래에 숨겨둔 술병을 꺼냈다. 왜 저런 곳에 술을 숨겨두는지 의아하지만, 표정이 진지해서 묻지 못했다.

“재작년에 담근 술이지. 지금이 마시기 딱 좋아.”

마도의 수호자라 통칭하지만, 늑대의 왕과 사뭇 달랐다. 가만 생각하면 요정왕, 뱀파이어 군주, 그림 리퍼가 죄다 성격이 달랐다. 노릭스 후작이 손가락에 묻은 술은 쪽쪽 빨며 지나간 이름을 거론했다.

“그림 리퍼의 안내를 받았군.”

“안내라고?”

로벨은 노릭스 후작의 술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색이 아주 예쁜 과일주였다.

“내가 잡아온 거야. 내 친구를 돌려받기 위해.”

“죽음을 잡았다? 흥미로운 발상이군.”

“흥미?”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것이 젊음의 매력이지. 허나, 죽음은 결코 피할 수는 없네. 죽음을 잡아놓을 수 있을까? ‘잠깐’이나 ‘나중에’라는 말도 통하지 않는데?”

로벨은 노릭스 후작이 괴짜라 불리는 이유를 알았다. 무슨 말인지 통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최대한 쉽게 질문했다.

“애꾸눈이 일부러 잡혔다는 거야?”

“글쎄,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끼리릭- 성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로벨은 무심코 돌아봤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애꾸눈!”

애꾸눈 볼포스가 태연하게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나치다 싶었던 포박과 금제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벨이 흐룬팅을 뽑자 노릭스 후작이 경고했다.

“여긴 내 성일세. 기사라면 예의를 지키게.”

로벨은 애꾸눈을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예의나 명예보다 현실적인 이유였다.

마도의 수호자가 둘이나 모였다. 로벨의 격정적인 인생에서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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