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하얀 숲
176화. 하얀 숲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덜컹. 덜컹. 덜컹...
볼탄 반도에서 먼 길을 따라온 농마와 오랜 세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수레가 우울한 기사를 태우고 나아갔다.
로벨은 아야의 몸통을 베고 이야카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뭉게구름 사이로 햇님이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쇠냄새와 흙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새 지저귐과 말 울음 사이로 울프 용병단의 도란도란한 잡담이 들려왔다. 시답지 않은 농담들인데 뭐가 재미있는지 숨죽여서 낄낄거렸다.
아야가 크게 하품하고 앞다리에 주둥이를 파묻었다. 로벨은 베개가 움직이자 머리를 움직여 다시 최적의 위치를 찾았다. 이야카가 못마땅하게 눈을 흘겼지만 어미와 누이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여유롭군.”
애꾸눈이 말을 걸어왔다. 로벨은 눈동자를 굴려서 애꾸눈을 보았다. 팔다리를 포박하고 성물과 부적으로 금제를 가했는데도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조급할 이유가 없잖아?”
애꾸눈은 애꾸눈답지 않은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의 얼굴이라 더욱 이질적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보잘것없는 지혜와 하찮은 경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지.”
“그런 인간한테 빌붙어 살아가는 주제 말이 많아.”
애꾸눈은 입을 다물었다. 마녀 키르케가 가르쳐준 내용을 바탕으로 대충 지껄였는데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로벨이 작은 승리감에 빠지자 애꾸눈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조금 거칠게 말했다.
“이 세상은 너의 작은 머리로 이해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고가 운명의 장난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로벨은 애꾸눈의 얼굴과 목소리로 잘난 척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너희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쉽게 당하지 않을 거야.”
애꾸눈은 코를 실룩였다. 건조한 비웃음이었다. 로벨이 한마디 하려고 할 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끼어들었다.
“기사 나리, 왼쪽을 보십시오.”
로벨은 상체를 일으켜 왼쪽을 보았다. 나무 두어 그루가 외로이 흩어져 있는 허허벌판이었다.
‘응? 이쪽이 아니잖아?’
로벨은 이동방향의 왼쪽이란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마녀 키르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양이처럼 웃었지만 못 본 척했다.
“저자들은?”
지평선 아래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동하는 대규모 집단이었다. 거리가 상당한데도 시끌시끌한 소란이 전해졌다.
“깃발을 가졌습니다. 근처 영주의 군대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진로를 봐서 피해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먼저 보낼까요?”
“그럴 필요가 있어?”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돌아보았다. 몰상식을 장기로 삼고 폭력성을 매력으로 여기는 무뢰배도 저절로 예의와 존중을 습득할 ‘거친’ 사내들이었다. 어지간해서 싸움 날 일은 없었다.
“그럼 그냥 가도록 하겠습니다요?”
“응. 혹시 모르니 경계하고.”
로벨의 지시가 떨어지자 울프 용병단은 헬멧을 착용하고 크로스보우를 장전했다. 크고 작고 뾰족하고 넓적한 각종 헬멧이 햇빛에 반짝였다.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평야는 거리감각을 죽인다. 꽤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반나절을 더 나란히 이동해야 했다. 그때쯤 되자 양쪽 모두 긴장이 풀려서 ‘덤비려면 덤비든가’ 식의 방만한 태도가 되었다. 로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수레에서 내려 휘적휘적 행렬 밖으로 나갔다. 외팔이 더치와 마녀 키르케가 수행원으로 따라붙었다. 정체 모를 영지군에서도 기사와 기사 종자가 나왔다. 로벨과 비슷한 나이에 로벨과 비슷한 컴포지트 아머를 입고 블랑크 산 전투마를 타고 있었다.
수 시간째 마주 걸어온 사이라 새삼스럽게 인사하기도 어색했다. 로벨이 아무 말 안 하자 상대 기사가 먼저 말했다.
“복장을 보니 기사 같은데, 어느 가문이시오?”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가문과 신분을 속이지 않는 법이다. 로벨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히 말했다.
“브릭 가문의 머를 브릭이오.”
외팔이와 마녀가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내왔다. 로벨은 얼굴을 붉혔지만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면 남사스럽지만,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백작은 워낙 잘 알려져서 소속과 목적을 숨길 수 없었다. 현재 에릭 공작이 하얀 숲의 노릭스 후작과 손잡으려 한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브릭 가문... 브릭 가문... 이 근방에서 못 들은 이름이군.”
“내 주군이신 둠 노릭스 후작의 명령으로 검은 숲에 다녀오는 길이오.”
“검은 숲? 어째서요?”
기사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위계승전쟁과 관련이 있는 군대였다.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법과 관련된 일이오. 자세한 것은 주군의 허락 없이 말할 수 없소.”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얀 숲이 드루이드의 고향이자 마법사의 성지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기사, 용병, 마녀 조합해서 의심할 건덕지가 없었다. 포클랜드 기사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본인은 사자성의 돌체 백작을 모시는...”
로벨 로드릭의 흉흉한 소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시에 다른 기사들은 흉내 낼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수레 위로 고개를 내밀고 헥헥-! 거렸다. 못 본 척하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개라고 믿기에는 생김새가 특별했다.
“회, 회색늑대?”
사자성의 기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로벨과 늑대 남매를 차례로 보았다. 여자라고 우겨도 믿어줄 만큼 곱상한 청년 기사와 야생 그대로의 회색늑대 조합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거기다 수십 명의 용병이 있었다. 일개 시골 기사가 거느리기에는 지나치게 잘 무장된 용병단이었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뤼-큭!”
이름이 꼬인 것은 기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로벨이 흐룬팅을 뽑아 겨드랑이를 찔렀기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오른쪽에 찬 롱소드를, 그것도 7~8피트 거리를 한 호흡에 뛰어들며 발검하니 방어는커녕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로벨은 일격에 기사를 무력화시키고 몸을 돌려 기사 종자를 노렸다. 기사 종자는 마스터가 당하자 재빨리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말 머리를 돌리고 고삐를 높이 올렸다. 그러나 ‘이럇!’이란 외침보다 빠른 것이 있었다. 아바레스트에서 발사된 철제 쿼럴이었다.
팡-!
허풍쟁이가 쏜 쿼럴이 기사 종자의 브리간디를 관통하고 등짝 깊숙이 박혔다. 폐와 심장 사이였다. 치명상이었다.
“꾸루룩...”
기사 종자가 말 아래로 미끄러졌다. 지휘관이 모두 당하자 사자성의 병사들이 패닉을 일으켰다.
“으아악! 나으리!”
“기사 나으리가 당했다!”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무기를 잡았는데, 어느 쪽이든 이미 늦었다. 상대는 사흘 밤낮을 떠들어도 무용담의 반도 자랑하지 못할 풍부한 전쟁경험을 쌓은 역전의 용병들이었다.
로벨이 기사를 거꾸러트리는 순간 2열 횡대로 자리 잡고 크로스보우를 견착하고 있었다. 지휘관을 잃은 농민병은 저항할 틈도 없었다.
“발사!”
파파파-앙! 파팡-!
40여 개의 쿼럴이 뿌려지자 20여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흠잡을 곳이 없는 일제사격이었다.
급소에 맞아 즉사한 병사는 운이 좋은 편이고, 무기를 팽개치고 상처를 부여잡는 병사는 아쉬운 편이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병사는 운이 아주 안 좋았다.
로벨은 흐룬팅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명령했다.
“몬트! 가서 잡아!”
과묵한 몬트 이하 기마소대가 즉시 출발했다. 로벨의 명령을 생포로 오해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숏스피어와 플레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에서 기마병에게 쫓기는 것은 극악의 공포였다. 비명, 애원, 욕설, 울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거품처럼 흩어졌다. 마녀 키르케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기사님...”
“어쩔 수 없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로벨도 내키는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를 들킨 이상 살려 보낼 수 없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잡고 핏물을 꿀렁꿀렁 토해내는 사자성의 청년 기사에게 다가갔다.
“...모른 척하지 그랬소. 그럼 살 수 있었을 텐데.”
“기사, 기사된 자가, 쿨럭. 쿨럭.”
“정말 미안하오.”
로벨은 기사의 메일 프린지를 끌어내린 후 목젖에 칼을 올렸다. 자비롭게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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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가장한 학살이 끝나자 무기 약간, 식량 조금, 전투마 두 마리가 생겼다.
포비아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포클랜드 농민답게 병장기의 질이 우수했다. 그러나 무게 때문에 가져갈 수 있는 양은 많지 않았다.
“가장 값나가는 것은...”
울프 용병단은 기사와 기사 종자의 무구에 눈독 들였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고용주가 방해였다.
“이 두 사람은 건들지 마.”
로벨은 기사와 기사 종자의 시체를 바로 눕혔다. 헬멧을 씌우고 롱소드를 뽑아 두 손에 쥐여 주었다. 땅바닥에 누워있지만 않으면 기사의 예를 갖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왔다.
‘이 글을 본 사람은 두 사람의 시신을 사자의 성 돌체 백작에게 전해 주시오. 필히 사례가 있을 것이오.’
까막눈인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서로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마녀 키르케에게 매달렸다. 마녀가 거들먹거리며 해석해주었다.
“저 기사님을 고향에 묻어주라는 호소문에요.”
“엥?”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누가 시체를 가져가겠어? 저 칼이랑 갑옷이 더 돈이 될 텐데?”
“저어, 기사 나리, 그냥 우리가 장례 치러주고 장례비로 받아갑시다요.”
로벨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편지를 고이 접어서 플레이트에 넣고 옛 신의 성호를 그렸다.
“옛 신의 가호가 있을 거야.”
“언제부터 옛 신의 신자였다고...”
로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툴툴거리던 외팔이가 움찔했다. 로벨은 화내지 않았다.
“지금 전쟁 중이잖아. 기사와 사제가 많이 돌아다니니까 그들이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 아니면 상인도 괜찮고. 전쟁에 뛰어들 만큼 야심찬 상인이면 갑옷 한 벌보다 돌체 가문의 연줄을 선택할 거야.”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기사 나리가 얻는 것이 뭡니까요?”
허풍쟁이가 혀를 차며 물었다. 로벨은 현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모두 생각했다.
“명예.”
명예와 거리가 있는 용병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 더 말했다.
“그리고 의심.”
“의심이요?”
로벨은 전리품 수집이 끝난 울프 용병단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아야와 이야카를 개나 말로 위장할 방법을 고심했다. 늑대를 거느린 기사 이미지가 강렬해서 정체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의심합니까요?”
로벨은 수레에 걸터앉으며 으쓱였다.
“나도 몰라. 왕자파 세력 중에 배신자가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고, 왕제파가 사자성을 노린다고 의심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얀 숲이 적이 되었다고 의심할 수도 있어.”
“에이, 그게 뭡니까요?”
로벨은 소리 없이 웃었다. 로벨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다. 순례자 일행이 시체를 발견하고 사자성에 전해주었다. 사자성의 돌체 백작은 적대세력의 영주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고 자비에 후작에게 보낸 병사를 불러와 아무도 노리지 않는 성을 철통같이 방어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전선 밖에서도 전쟁을 돕게 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 로벨 일행은 포비아 왕국 북서쪽 떡갈나무와 자작나무의 고향인 하얀 숲에 무사히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