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전쟁사
171화. 전쟁사
로벨이 자리를 비운 보름 남짓한 사이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가시성의 바이란 경과 사트로 시티에서 새로 온 깁스 자작의 싸움이었다.
첫 번째 전투는 ‘조금 과격한’ 말다툼으로 병사 1명이 죽고, 기사 종자를 포함해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바이란 경은 이웃 영지와 종종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사고로 넘겼는데, 깁스 자작은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명예가 걸린 싸움, 더 나아가 왕제파와 왕자파의 정통성 싸움으로 받아들였다.
사흘 뒤, 깁스 자작이 가시성 마을을 기습하여 유혈이 낭자한 두 번째 전투가 일어났다.
어린 집사가 세 마디로 평가했다.
“혹시 미친 거 아닐까요?”
로벨은 깁스 가문의 사람을 생각했다. 권력욕과 탐욕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고 몰락의 길로 접어든 불쌍한 가문이었다.
“외지에서 온 영주라 그럴 거야.”
“외지에서 올 때 개념을 놓고 와요?”
“이곳 분위기를 모르잖아.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관과 촌장 등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을 테고...”
“이야! 영주님이라 영주님의 심정을 잘 아시는군요? 우리 영주님은 무시 받지 말아야 할 텐데.”
“나, 나 무시 받아?”
“예? 아뇨! 누가 우리 영주님을 무시해요! 그런 인간은 제가 가만 안 두죠!”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가 재빨리 속삭였다.
“가만 안 있으면 자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냥 못 들은 척해요. 기사님 상처받아요.”
로벨은 자신의 턱밖에 안 오는 어린 집사를 든든하게 보고 남은 측근을 돌아보았다.
웃고 떠들긴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깁스 자작군 50명이 가시성 주위에 주둔 중이었다. 가시성 영지민은 물론이고, 자유민과 행상인까지 피해를 보고 있었다. 사실 깁스 자작군 정도야 울프 용병단 2개 소대만 파견해도 격퇴할 수 있지만, 그리하면 검은 성이나 강철성이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어 곤란했다.
‘우리가 강철성하고 싸울 때 에릭 공작 입장이 이랬을까?’
그렇다고 충성을 맹세한 봉신이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돈을 좀 빌려줄까요? 용병단을 고용하면 금방 몰아낼 텐데요.”
“그럴 돈이 있어?”
“요즘은 수익이 좀 있으니까요.”
로벨은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했다. 하지만 단순히 돈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펄프 대장이 이마의 주름을 깊게 파며 말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응. 병사를 모아야 해. 각 영지에서 30명 정도 징집할 생각이야.”
“깁스 자작이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울프 용병단 100명에 징집병 200명이면 깁스 자작령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았다. 깁스 자작이 겁을 먹고 검은 성에 원군을 요청하면 포스트 포레스트로 가기도 전에 볼탄 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로벨은 심각성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왕제파를 도와서 제1왕자 지지파와 싸울 거라고요? 볼프 후작이 어디 세력이고, 깁스 자작이 누구 봉신입니까?”
“...제길.”
이러나 저러나 깁스 자작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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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농사짓느라 바쁜 농민들 대신 생산성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울프 용병단만 포스트 포레스트로 보내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300명을 모으기로 약속한 만큼 곤란했다.
외팔이 더치는 통 크게 깁스 자작령을 박살내고 포스트 포레스트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으나 목소리 큰 것을 좋아하는 아야와 이야카 이외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리암 수사가 가장 그럴듯한 방책을 내놓았다.
“깁스 자작님에게 들키지 않게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음... 그렇지?”
“그럼 간단하죠. 집결지를 포클랜드 지방으로 하세요.”
간단하지만 기발한 방법이었다. 로벨은 감탄했고, 펄프 대장은 우려했고, 어린 집사는 반박했다.
“병사만 보내면 끝나는 게 아니에요! 무기랑, 식량이랑, 말먹이랑, 급료랑...”
“푸른 고래 호와 청새치 호가 로드릭 항구에 들어와 있어요.”
“전쟁 물자를 배로 옮기라고요?”
“수레보다 훨씬 많이 옮길 수 있어요.”
로벨은 그럴듯하다 생각했다.
“가시성은?”
“호른 경이 도우러 갔으니까 한동안 괜찮을 거예요.”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어린 집사 이하 측근들이 로벨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로벨은 본의 아니게 목운동을 한번 시킨 후 말했다.
“좋아. 바위성, 구릉성, 늪지성에 연락해서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오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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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 자작의 돌발행동으로 유례없는 진격작전이 시작되었다.
로벨은 봉신들이 병사를 모으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출발했다. 본대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2차, 3차로 도착하는 후속부대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벨의 울프 용병단은 최정예 군대답게 신속하게 행군했고, 단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비에 후작의 예상보다 보름이나 빠른,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전격전이었다. 그로 인해 전쟁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로벨은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 약 700야드 밖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은 아니겠지?”
“지금 돌덩이에 맞고 날아간 놈이 들으면 화낼 겁니다. ‘으악! 이게 훈련으로 보여?!’ 이러고 말입니다.”
펄프 대장이 덤덤한 목소리로 죽어가는 병사를 흉내 냈다. 로벨은 머쓱해서 아멧을 만지작거렸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가 공격받고 있었다. 10여 개의 사다리차가 허물어진 성벽에 걸쳐지고, 100여 명의 병사가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화살이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날아다니고, 단말마가 먼 산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적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샘 포클의 12기사 중 하나인 자비에 후작가 깃발이 열풍을 타고 펄럭이고 있었다.
로벨은 펄프 대장 뒤로 도열한 110명의 울프 용병단을 돌아보았다.
“도착하자마자 당황스럽지만, 수비군을 돕자. 전투준비 해.”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베테랑 소대장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크로스보우 전 소대 장전 후 대기!”
“스피어맨 앞으로! 어리버리하지 말고 튀어나와!”
과묵한 몬트가 뿔나팔을 꺼내들고 로벨을 곁눈질했다. 로벨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깃발이 높이 올라가고, 뿔나팔이 우렁차게 울렸다.
뿌우우우-웅-!
와아아아아!
전장 한복판에서 죽고 죽이느라 바쁜 병사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저 깃발은...”
“로, 로드릭 가문이다! 볼탄 반도의 군사야!”
“아군이다! 아군이 왔다!”
“왕제군의 지원병이야!”
성벽 위에서도, 사다리차 아래에서도, 자비에 후작의 본대에서도 혼란이 일어났다. 그랜드 챔피언의 명성에 겁먹은 기사도 있고, 울프 용병단의 악명에 좌절하는 병사도 있고, 볼탄 반도의 빠른 참전에 당황한 참모도 있었다.
자비에 후작은 지휘막사 밖으로 뛰쳐나와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내다보았다.
“말도 안 돼! 프란시스 공작이 벌써 움직이다니!”
말이 되든 안 되든 현실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앞을 가리켰다.
“전군 전진.”
척! 척! 척! 척!
울프 용병단이 전장으로 이동했다. 전쟁소설처럼 자극적인 돌격은 하지 않았다. 발을 맞춰서 천천히 전진했다. 길고 짧은 창이 고슴도치처럼 앞을 막고, 쇠촉을 품은 쿼럴이 독사의 송곳니처럼 곤두섰다.
성벽 아래에서 용을 쓰던 자비에 후작군은 울프 용병단의 진군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
“물러서지 마라! 고작 100명이다! 저놈들부터 밀어낸다!”
공격조를 이끄는 용맹한 기사가 울프 용병단을 가리켰다. 그러나 실전으로 다져진 크로스보우 3개 소대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200야드!”
“제1소대 조준!”
정예 중에 정예 제1소대가 사격자세를 취했다. 아바레스터의 비율이 가장 높고, 사격실력도 가장 좋았다. 애꾸눈 볼포스의 수제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발사!”
파파파팡-!
기계 힘으로 한계까지 당겨진 시위가 풀리자 나무를 패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반동을 고스란히 받은 철제쿼럴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자비에 후작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쇠촉에 햇살이 스치는 찰나의 반짝임뿐이었다. 총 22발의 쿼럴이 얼굴과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맙소사! 저 거리에서?”
자비에 후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울프 용병단은 멈추지 않았다. 크로스보우 1소대가 재장전하는 동안 옆을 지나쳐서 제2소대와 제3소대가 전진했다.
“180야드!”
“제2소대 사격준비!”
“발사!”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순차사격이 행군 중에 실시되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노기사들도 처음 보는 전술이었으니 얼결에 끌려온 농민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150야드!”
“제3소대 사격준비!”
자비에 후작은 기사 종자를 목 터져라 불렀다. ‘전투마를 가져와!’, ‘예비대 준비해!’, ‘저놈들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기선을 잡은 것은 울프 용병단이었다.
“발사!”
세 번째 사격이 끝나자 요새 앞에 공격조는 전부 죽거나 도망쳤다. 스피어맨은 발아래 너부러진 부상병을 찔러 사살하거나, 그조차도 귀찮으면 그냥 발로 짓밟고 지나갔다.
자비에 후작이 예비대를 돌격시킨 것이 이때였다.
100여 명의 예비대가 뒤쳐진 제1, 제2소대를 노리고 돌격했다. 그러나 로벨에게도 칼과 방패가 있었다. 로벨은 몸이 가벼운 풋맨 소대를 이끌고 예비대의 측면을 때렸다. 숫자는 5배 차이지만, 백전연마의 울프 용병단과 농민병의 싸움이었다.
로벨은 갑옷이라 부르기가 민망한 아퀘튼 차림의 병사에게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그래도 군사훈련은 받았는지 창대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어설퍼.”
로벨은 손목 힘으로 창대를 걷어내고 손잡이를 반 바퀴 돌려 어깨를 찍었다. 젊은 병사는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로벨은 플레일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피 냄새에 흥분한 플레일은 인정사정없이 병사를 짓밟았다. 피와 뇌수가 메마른 땅을 적셨다.
로벨과 플레일은 인정사정없이 베고, 차고, 찌르고, 밟았다. 아론다이트의 칼날이 좌우로 번쩍일 때마다 피분수가 솟구쳤다. 수백 명이 뒤엉킨 전장에서도 로벨의 칼질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랜드 챔피언...”
자비에 후작은 로벨의 호칭 중 가장 유명한 호칭을 중얼거렸다. 마상시합장이 아닌, 실제 전장에서 마주한 그랜드 챔피언은 공포였다. 100여 명의 예비대가 로벨이 이끄는 20명의 풋맨 소대에게 와해되고 있었다.
“후작님! 적의 본대가 이쪽으로 옵니다!”
“지금 후퇴해야 합니다!”
자비에 후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잇몸만 아플 뿐 전황은 바뀌지 않았다.
“...후퇴한다.”
“후퇴! 후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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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위계승전쟁의 첫 번째 전투인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전은 왕제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포비아 왕국 전쟁사 기록에 따르면, 자비에 후작의 의중을 꿰뚫어 본 로벨 로드릭 백작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주력군보다 한발 먼저 포클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그 결과 자비에 후작의 예상보다 보름이나 빨리 도착하였고, 자비에 후작의 치밀한 기습전은 무력화되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의 왕제군은 로벨 로드릭 백작의 뛰어난 식견과 과감한 전술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왕위계승전쟁의 첫 전투는 왕제파의 승리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