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편 가르기
170화. 편 가르기
허풍쟁이 제이콥이 해비 랜스를 길게 내밀었다. 로벨은 손잡이를 잡아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왼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정면은 안 돼! 왼쪽으로!”
칼밥을 10년 이상 먹은 베테랑 용병들이었다. 고용주의 명령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히얏!”
“이랴앗!”
로벨은 창자루로 플레일의 엉덩이를 때리고 고삐를 당겼다. 총 4필의 전투마가 구릉 왼쪽으로 비스듬히 돌격했다.
구릉을 넘어오는 적의 기병대는 어느덧 7명이 되었다. 바람을 가르는 짐승이 갤럽 속도로 마주 달리자 거리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눈 한번 깜박일 때마다 상대방의 모습이 2배로 커졌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수백 번의 실전과 수만 번의 연습을 믿어야 했다. 왼팔을 끌어당겨서 얼굴을 보호하고 오른팔을 신중하게 움직였다.
해비 랜스의 길이는 13피트지만, 창끝은 손가락보다 가늘었다. 그 작은 점을 정확히 맞히는 것은 기사에게도 쉽지 않다.
‘내가 이긴다!’
쾅-!
해비 랜스는 충격을 받으면 산산이 깨지는 마상시합용 버드나세가 아니다. 말의 무게와 속도가 손가락만한 창날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마상시합처럼 몸으로 버티며 마주 찌르는 터프함은 보기 힘들었다.
로벨의 해비 랜스가 정체불명의 기사 가슴을 정확히 때렸다. 창끝은 흉갑을 꿰뚫는 동시에 동강 부러졌지만, 그 직전까지 해소되지 않은 운동에너지는 200파운드의 기사 몸뚱이를 날려버렸다.
정체 모를 기사는 전투마 뒤로 튕겨나갔고, 로벨을 위협한 기사의 랜스는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고 사라졌다.
“하아... 하아...”
수년 동안 치른 수십 번의 마상시합 중 가장 쓰릴 넘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이 없었다. 실전은 1대 1로 붙는 주스트가 아니라 다수와 다수가 어우러지는 밀리였다. 적은 6명이나 남아 있었다.
로벨은 창끝이 부러진 해비 랜스를 추슬렀다. 어깨와 손목이 비명을 질렀지만 놓을 수 없었다. 두 번째 기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기사 나리! 위험합니다!”
로벨과 플레일은 첫 번째 충돌로 속도가 크게 줄어 있었다. 기마전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면 기선을 뺏기기 마련이다.
로벨은 해비 랜스를 끌어올리다가 포기하고 상체를 납작 숙였다. 전투마 플레일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뒤통수에 날카로운 바람이 스치고 육중한 무게감이 옆구리를 빗겨갔다. 표적을 빗맞힌 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
“로벨 로드릭! 승부를 피하는가!”
“에라이! 떼로 덤비면서 무슨 승부냐!”
“니미! 엿이나 먹어라!”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로벨을 옹호하며 대신 응징했다.
로벨을 스쳐지나간 기사는 ‘명예 없는’ 용병에게 집중공격을 받았다. 갑옷이 튼튼하고 전투마가 용감해도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메이스와 플레일을 버틸 재간은 없었다. 기사는 갑옷과 자존심을 모두 꾸긴 채 낙마했다. 우당탕- 쿵-!
적에게 노출된 것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로벨 앞에는 5명의 기사가 남아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해비 랜스와 무거운 플레이트 아머로 속도가 느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왼쪽을 먼저 공격해서 포위당하지 않은 것도 행운이었다. 시간차로 붙었으면 세 번째 차칭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벨은 거추장스러워진 해비 랜스를 팽개치고 말머리를 더욱 왼쪽으로 돌렸다.
“그랜드 챔피언이 도망간다!”
“겁쟁이! 정정당당히 싸우자!”
로벨은 순간 욱! 했지만 무모한 싸움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고지로 올라가야 해! 도보전으로 몰고 가자!’
로벨은 고만고만한 구릉 사이로 플레일을 몰았다. 아무리 뛰어난 준마라도 200~250파운드 무게의 기사를 태우고 장시간 질주할 수 없었다. 경사로를 올라가면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전투의 변수는 적이 아니라 아군에게서도 찾아왔다.
“기사님! 기사님! 아 좀! 빨리 몰아요! 악! 살살 가요!”
“이 마녀가! 뭘 어쩌라는 거야!”
허풍쟁이 제이콥과 마녀 키르케가 느려터진 짐수레를 몰며 나란히 달렸다. 로벨은 5명의 기사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화를 냈다.
“저 바보들이!”
로벨 입장에서 화날 만도 했다. 시간을 벌어주려고 중무장한 기사단과 정면대결까지 했는데, 도망치기는커녕 필사적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 입장은 달랐다.
“으히히힛! 선물이 있어요!”
마녀가 방정맞은 웃음을 흘리며 수레 난간에 ‘선물’을 올렸다. 네모난 나무받침대에 원통형 청동관이 놓인 까마귀 성의 선물이었다. 로벨은 눈을 의심했다.
“핸드 캐논?”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마녀 키르케는 정말 마녀다운 웃음과 함께 지팡이를 휘둘렀다. 딱! 쇠를 때리는 청명한 소리 뒤로 불꽃이 터지는 굉음이 따랐다. 콰과광-!
로벨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핸드 캐논의 명중률은 눈 감고 활을 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아군이라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포탄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공포는 정확히 명중했다. 정체 모를 기사단의 전투마가 폭음에 놀라 좌우로 흩어지거나 제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제길! 대포다!”
“후퇴! 후퇴해라!”
과묵한 몬트 외 기마 소대가 혼란에 빠진 기사단을 덮쳤다.
과묵한 몬트는 자루가 짧은 호스맨즈 플레일을 붕붕 돌리다가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은 겁먹고 도주하는 말을 향해 숏스피어를 집어던졌다. 기사(騎射)에 능하지 못해 투창은 빗나갔지만 전세를 굳히고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다.
“워- 워워-”
로벨은 플레일을 세우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좌우로 흩어진 기사들은 무사히 도망쳤으나, 과묵한 몬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사는 전투마에서 굴러떨어져 대자로 뻗었다. 무지막지하게 맞았는데 두꺼운 헬름 덕분에 용케 죽지 않았다.
‘역시 투구를 써야 한다니까.’
로벨은 허전한 이마를 만지며 기사에게 다가갔다.
“끄으윽... 큭...”
기사는 구울처럼 앓으며 몸을 뒤집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구부리고, 세상을 걷어차는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흉내쟁이 퍼시발이 발로 뻥! 차서 도로 주저앉혔다.
“움직이지 마쇼! 확! 담가버릴 수 있으니까!”
과묵한 몬트와 발가락 슈미츠가 안장 아래로 병장기를 늘어트리고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천박한 것들이...”
헬름 때문에 안 보이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로벨은 플레일에서 내려서 칼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난 로벨 로드릭이오. 나를 알고 습격했소?”
“후우... 후우... 그렇소.”
“이유를 말해주시오.”
과묵한 몬트는 갑옷에 가문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문장이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사전에 조치를 취했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의. 그리고 신뢰. 그 외에는 말할 수 없소.”
“역시.”
로벨은 아론다이트로 고짓 플레이트를 겨냥하고 명령했다.
“헬름을 벗으시오.”
기사는 순순히 헬름을 벗었다. 생각보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기사다운 근엄함과 죽음을 앞둔 공포심이 엿보일 뿐, 암살자의 잔혹함이나 결사대의 비장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로벨은 기사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아론다이트를 회수했다.
“얼굴을 기억했소. 떠나시오.”
“...떠나라고?”
“그렇소. 명예를 아는 기사답게 행동할 거라 믿겠소.”
로벨이 칼을 걷고 한 걸음 물러나자 기사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과묵한 몬트의 플레일과 발가락 슈미츠의 메이스를 한번씩 보고 자신의 말고삐를 잡아 안장에 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할 수 있는 말은 몇 개 없었다. 그중 간신히 하나만 골라냈다.
“...고맙소.”
기사는 로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전투마가 놀라지 않게 조용히 떠났다.
과묵한 몬트는 점점 멀어지는 패전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조언했다.
“명예를 알면 애초에 노상강도처럼 기습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문을 해서라도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기사에게? 명예롭지 못해.”
과묵한 몬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꼭 로벨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사’라는 직업종사자의 고질병이었다. 하지만 기사도 바보는 아니었다.
“얼굴을 봤으니 됐어. 저만한 무장을 갖춘 기사면 어딘가의 영주일 거야.”
“그렇다면 더욱이...”
“영주라면 봉신의 의무를 피할 수 없어. 전쟁이 시작되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럼 누가 왜 보냈는지 알게 될 거야.”
과묵한 몬트는 위험하고 번거롭다 생각했지만 로벨의 ‘명예’ 때문에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기사의 명예를 알량한 자존심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땅만 넓은 지주나 싸움만 잘하는 용병과 다른, 기사의 정체성이었다.
“2차 공격이 있을 거야. 나라면 그럴 테니까. 서둘러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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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2차 공격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죽어라 도망쳤기 때문이다. 수레바퀴가 빠질 정도로 달려서 사흘거리를 하루하고 한나절에 주파했다. 농담이 아니라 로드릭 마을 가도에서 뒷바퀴가 빠져 마녀와 늑대 남매가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힝... 두 번째야...”
마녀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수레에서 구른 횟수를 세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수치심을 허풍쟁이 탓으로 돌려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고, 허풍쟁이는 최선을 다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1년째 공을 쏟고 있는 ‘로드릭 마을 가도’를 앞뒤로 둘러보았다. 말과 마차가 다니기 좋은 평평한 길에 여러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안전할 거야.”
로벨의 말에 하루 종일 강행군을 지속한 울프 용병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지어 사람 말을 모르는 말들까지 안도했다.
“컹! 컹!”
그때, 아야와 이야카가 허풍쟁이를 놔두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에 왼손을 얹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척. 척. 척. 척...
철컥! 철컥!
쇠징이 박힌 발소리와 병장기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 무장한 군대가 내는 소리였다. 사흘에 한번 꼴로 전쟁이 일어나는 볼탄 반도에서 군대는 놀라울 것이 없지만, 문제는 장소였다.
‘내 땅에서?’
로벨은 분노보다 호기심이 생겼다. 정통성 전쟁 이후 늑대성을 위협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긴 것과 달리 겁 많은 아야와 이야카가 먼저 달려나간 것도 이상했다.
“마로드? 마로드!”
“...호른 경?”
내 땅에 들어온 군대라고 꼭 적은 아니었다. 아만다 성, 지금은 호른 성이 된 서쪽 영지의 군대였다. 로벨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반갑게 맞이했다.
“경이 이곳에 무슨 일이오?”
호른 경은 주군의 환한 웃음과 늑대의 재롱에도 표정이 진지했다.
“가시성의 바이란 경을 도우러 가는 중입니다.”
“바이란 경? 왜?”
로벨이 당황해서 되묻자 호른 경이 덩달아 당황했다.
“이틀 전 깁스 자작군의 공격을 받아 영지민이 다수 죽지 않았습니까.”
저 남쪽에서 이제 막 올라온 로벨에게는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깁스 자작이 왜...”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사트로 가문에 충성하는 봉신이니 왕위계승문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에릭 공작은 왕제파와 손을 잡았고, 볼프 사트로 후작은 제1왕자에게 충성했다. 그 말은 적과 아군이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윗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시골 영주에서 기사 종자까지 포비아 왕국이 편 가르기를 시작했다.
“이런...”
로벨은 포스트 포레스트가 있는 서쪽과 강철성이 있는 북쪽을 번갈아 보았다.
왕위계승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